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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숲속에서

낙서2 노인과 요양병원

#희망


노인은 천천히 병원 복도를 걸었다. 약간 굽은 허리, 주름진 손에 들린 지팡이. 그가 걸어가는 소리만이 정적 속에 희미하게 퍼졌다. 문을 지나갈 때마다 병실 안에서 들리는 낮은 기계음이 그를 따라다녔지만, 이제는 익숙한 소리였다. 낯선 병원에 온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이곳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여기가 내 마지막이겠지…” 그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잔디밭과 그 뒤로 펼쳐진 숲은 어린 시절 그가 뛰놀던 나무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숲이 그저 멀리 느껴질 뿐이었다. 마치 자신이 다시는 닿을 수 없는 세계에 있는 것처럼. 그는 기억 속의 그 나무들을 떠올리며, 거기서 마주했던 자유로움과 고독감을 동시에 느꼈다.


침대 옆 창가에 앉아 있던 어느 날, 그는 작은 방문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젊은 간호사가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할아버지, 산책 가실래요?”


노인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그는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 속에서 어쩌면 오랜만에 느껴본 작은 변화였다.


병원 밖으로 나가자, 바람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 속에서 그는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인은 간호사의 손을 빌려 천천히 병원 정원을 걸었다. 바람은 여전히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스쳤지만,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마치 그를 옛 기억으로 이끄는 듯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그는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어릴 적, 그가 살던 마을도 이렇게 숲이 깊었고, 숲속에 혼자 있을 때는 세상에서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고요함이 두려웠다. 병원에 온 지 몇 달이 지났지만, 그는 그곳에서 점점 더 자신이 사라져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사람들은 지나가고, 시간은 흐르지만, 그는 마치 그 흐름에서 멀어진 것 같았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속에선 무언가가 갈라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리 낯설지 않지만, 그의 내면은 너무도 멀리 떠나 있었다.


노인은 작은 벤치에 앉았다. 나무 위로 떠 있는 새들의 지저귐이 들렸지만, 그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그 숲속에서처럼, 모든 소리가 멀어져갔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는 그 안에 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노인은 그 속에서 느꼈던 두려움이 다시금 자신을 에워싸는 것을 느꼈다. 고요함 속에서 자신이 점점 잊혀지고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요양병원의 모든 것이 그를 삼켜가는 것만 같았다. 그의 기억도, 그의 정체성도, 이제는 그저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갑작스레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노인은 속으로 다짐했다.


노인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 동안 정원에 놓인 꽃들과 나무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는 아주 오랜만에 무언가 깨달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온 이후, 그는 한 발짝도 자신의 의지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병원의 규칙에 따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스스로 나아가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어디든 가고 싶어,” 노인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지팡이를 짚으며 그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내면 깊은 곳에서 묘한 힘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주변의 나무들과 잔디,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새들의 소리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이제 그 소리는 더 이상 멀리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소리들은 그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며 문득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침묵 속에 갇혀 있었는지 떠올려보았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살아있다는 느낌도, 그 무엇도 그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삶’이라는 감각이 다시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감각은 낯설었지만, 동시에 위안이 되었다.


“난 아직 살아있어.” 노인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비록 그는 여전히 병원이라는 경계 안에 있었지만, 이곳에서의 고립은 그가 세상을 다시 바라볼 기회를 주었다. 자신이 병원을 떠날 수는 없을지라도, 그의 마음은 이미 그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 노인은 정원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문득 자신의 곁에 다가온 작은 존재를 느꼈다. 고개를 들어보니, 젊은 간호사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따뜻하고 진심이 담겨 있었다. 노인은 잠시 멈칫했다. 오랫동안 누군가의 손길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그에게 이 순간은 너무나도 낯설고도 감동적이었다.


“괜찮으세요?”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마치 무언가가 풀리는 듯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동안 억눌렀던 외로움, 두려움, 그리고 혼자라는 생각이 그녀의 손길에 의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오랜 시간 홀로 걸어왔던 길에서 드디어 누군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다는 것을 실감했다.


“오랜만에 누군가의 손을 잡아보는군,” 노인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따뜻하고, 삶의 온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는 그 손을 통해 잊고 지냈던 감정을 다시금 떠올리기 시작했다.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다는 감각이 그의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고맙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안에는 오랫동안 감추었던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간호사는 그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노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 순간, 노인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가 자신의 곁에 있음을 깨달았다. 삶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의 날들 속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그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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