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1. 요양병원 존엄케어를 생각하며
# 저녁 무렵
정원수는 창가에 기대어 누워있었다. 병실 천장의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저 형광등 하나 교체하는데도 얼마가 들까, 그는 문득 생각했다. 요즘은 그런 사소한 것에도 자꾸 돈 생각이 났다.
지난 주말, 둘째 아들이 병원비 영수증을 들고 왔을 때의 한숨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한숨 속에 담긴 무게를 모를 리가 없었다.
"여보, 당신은 참 편하게 갔구려..."
불현듯 아내가 원망스러워졌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둘이 나란히 앉아 저녁 드라마를 보던 사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잠든다며 누웠다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그였다.
"아버님, 저녁 드시고 약 드실 시간이에요."
간호사의 목소리에 정원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간호사가 약병을 들고 서 있었다.
"...이런 약이 뭐가 소용이오. 빨리 보내주면 좋을 텐데."
"아버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이제는 내가 살아있는 게 죄지. 자식들한테 짐만 되고..."
약을 받아들며 정원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매달 들어가는 병원비에, 자식들은 적금까지 해약했다고 들었다. 큰 손주는 올해 대학입시인데, 그 학원비는 어떻게 감당할까.
병실 서랍을 열어보니 통장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남지 않은 잔고를 보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모아둔 돈은 아내의 병원비로 다 나가고, 퇴직금마저 바닥이 났다.
"당신이라도 살아있었으면... 내가 이렇게 외롭진 않았을 텐데."
문득 아내가 그리워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내는 항상 그의 한 걸음 앞에서 길을 밝혀주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어둠 속을 홀로 걸어야 하는데, 그 길이 너무도 막막했다.
"아버지, 저희예요."
저녁 무렵, 막내딸이 찾아왔다. 손에는 과일 봉지가 들려있었다.
"들어와라."
"아버지, 이번에 제가 승진했어요. 월급도 조금 올랐으니까... 병원비는 제가 더 보태드릴게요."
정원수는 가슴이 아파왔다. 이제 막 결혼해서 집도 마련해야 할 딸이, 자기 때문에 또 희생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너희들 살기도 바쁠 텐데..."
"아버지, 저희가 효도도 못해드리고..."
"효도는 무슨... 내가 너희들 잘 살면 그게 효도지."
딸이 눈물을 글썽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마치 아내의 손길 같았다.
밤이 되자 병실은 다시 적막해졌다.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정원수는 문득 아내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여보, 우리 자식들 잘 크지 않았소?"
그날 밤, 아내는 그렇게 말하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당신은 떠나면서도 자식 생각뿐이었는데... 나는 이렇게 이기적이구려."
정원수는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 걸터앉았다.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기댔다. 살고 싶다는 생각과 죽고 싶다는 생각이 뒤엉켰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어느 쪽이 더 나을까.
그때였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정원수는 고개를 돌렸다. 야간 당직 간호사였다.
"아버님, 아직 안 주무셨네요?"
"잠이 안 오는구려..."
"제가 따뜻한 우유라도 데워다 드릴까요?"
그 순간, 정원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요? 아버님?"
"미안하구나... 이렇게 늙어서까지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게..."
간호사는 조용히 그의 곁에 앉았다. 달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아버님, 살아계신다는 건 축복이에요. 자녀분들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정원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는 알고 있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도피일 뿐이라는 것을. 살아있다는 건, 아직 희망이 있다는 뜻이니까.
"내일도... 해가 뜨겠지?"
"네, 아버님. 분명 더 따뜻한 해가 뜰 거예요."
달빛 아래, 한 노인의 깊은 한숨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작은 희망의 씨앗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