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안
예전에는 세상이 언제나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가까이에서만 진짜가 보인다고 믿었고, 보이지 않는 것은 내가 더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글씨 하나, 모니터의 미세한 픽셀 하나에도 의미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세상을 밀착해 읽어내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나는 ‘가까움’이 곧 ‘진실’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가까이 다가간 나보다
세상이 먼저 한 뼘 뒤로 슬며시 물러나는 듯했다.
마치 “조금 떨어져 봐도 괜찮다”고, 혹은 “그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분명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데, 초점은 언제나 한 뼘 뒤에서만 정확히 맞았다.
그 거리감이 어느새 내게 익숙한 틈이 되어 있었다.
카페에서 영수증을 확인할 때도,
스마트폰의 문자들을 읽을 때도
내 눈은 먼저 ‘거리’를 찾았다.
초점이 또렷해지기까지
눈을 채근하듯 미간이 조여진다.
왜 선명함은 자꾸 뒤로만 달아날까.
가까이 다가가면 멀어지는 그림자처럼.이 감각은 어느새 일상에 무심히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끝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밀어내며 거리를 찾는 내 모습을 보고
그때 생각했다.
이 변화는 단지 노안 때문만이 아닐지 모른다고.
가까움이 흐려질수록,
나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흐릿함은 갑작스런 결핍이 아니라,
내 시선이 머물러야 할 자리를
다시 정해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가까움 속의 미세한 의미보다
멀리서 봐야만 드러나는 윤곽과 흐름을 읽기 시작했다.
바싹 들여다보고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한 뼘 뒤에서 저마다의 위치를 찾는 것을 목격했다.
어쩌면 오랫동안 나는
‘가까이 본다고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라는 단순한 진실을
애써 모른 척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
더는 작은 디테일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자리.
시간이 흐르며 가까이에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한때 집요하게 들여다보던 작은 글자들이 담고 있던 정보 또한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음을 조용히 깨닫게 된다.
한 뼘의 거리.
그것은 사라진 시력의 빈틈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의 변곡점이었다.
가까이 있을 때 보이지 않던 여백,
내가 지나치게 붙어서 흐려졌던 진심들,
너무 선명하게 보려고 해서 오히려 잃었던 것들이
그 거리 속에서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세상에서 조금 멀어진 느낌.
그러나 그 멀어짐은 삶에서 밀려난 감각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어떻게 보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자리였다.
나는 이제 흐릿한 가까움을 지나,
더 먼 곳의 선명함에 시선을 맞춘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내가 오래 찾아 헤매던 의미의 윤곽이
또렷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