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요즘은 계절이 제 순서를 잃은 듯하다.
가을은 제 몫을 다하기도 전에 서둘러 물러나고,
겨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성큼 들어선다.
아침 공기엔 찬 숨이 묻어나고, 햇살에도 냉기가 스며든다.
일기예보는 갑작스러운 추위에 겉옷을 챙기라 친절히 당부하지만,
정작 옷장은 아직 그 말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옷장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인다.
적당히 따뜻하면서도 과하지 않아야 한다.
아직 겨울 외투를 꺼내 입기엔 어딘가 어색하고,
사람들의 시선도 은근히 신경 쓰인다.
기후변화로 간절기가 짧아진 탓일까.
이맘때 입기 좋은 옷도 마땅치 않다.
두꺼운 옷은 이르고, 얇은 옷은 불안하다.
결국 손끝은 늘 익숙한 셔츠와 자켓 사이,
그 틈을 메워줄 가디건으로 향한다.
꾸미거나 멋을 내는 일에는 서툴지만,
하루를 단정히 견디고 싶은 마음은 늘 같다.
그건 어쩌면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자리 잡은 습관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그런 옷차림의 기준 같은 것이 생긴 건
중학교 시절이었다.
그 무렵, 미술 선생님 한 분이 기억에 남는다.
서른을 갓 넘긴 듯한 남자 선생님이었다.
늘 같은 색의 긴팔 와이셔츠와 바지를 입으셨다.
흰색과 검정, 계절과 상관없는 무채색의 조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단조로움 속엔 단정한 품위가 묻어났다.
여름엔 땀을 머금은 채 칠판 앞에 섰고,
겨울엔 코트 대신 얇은 자켓 하나가 전부였다.
소매 끝은 단정히 접혀 있었고, 카라는 닳았지만 정직했다.
두어 벌쯤 되는 셔츠였지만, 그 위엔 오래된 태도의 질서가 느껴졌다.
그는 유머가 있었다.
웃다 보면 어느새 수업이 끝나 있었고,
남은 건 짧고 명확한 핵심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수업은 늘 지루할 틈이 없이 유쾌했다.
말이 많지 않았지만, 필요할 땐 단호했다.
그의 수업에는 단정한 질서와 온기가 공존했다.
남자가 봐도 멋있는 사람이었다.
꾸밈이 없고, 자기만의 기준이 분명한 사람.
그의 말투와 걸음, 셔츠의 주름 하나까지도
그 시대가 지녔던 정직함과 절제를 닮아 있었다.
학기가 끝나갈 무렵,
그의 단벌 셔츠는 어느새 옷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진심을 드러내는 표정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며 셔츠의 하얀빛은 옅어졌지만,
그 안에 담긴 태도는 오래 남았다.
그때 알았다.
그는 멋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 태도를 걸친 사람이었다.
옷은 단순히 몸을 가리는 천이 아니라,
그 사람의 습관과 마음가짐이 드러난
가장 단정한 자신감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 선생님보다 나이를 더 먹은 지금.
아침마다 옷장을 열면, 세탁을 거듭해 조금 빛이 바랜 흰 셔츠가 눈에 들어온다.
어깨선은 내 몸에 맞게 자리 잡았고, 새 옷보다 편하다.
그 셔츠를 손끝으로 고르며 문득 생각한다.
아마도 세월이 준 가장 현실적인 안식은
이렇게 낡았지만 단정한 옷 한 벌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 선생님의 단벌 셔츠가 검소함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분은 그 자체로 멋있는 사람이었다.
말보다 행동이, 스타일보다 태도가 그를 빛나게 했다.
진짜 멋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비싼 옷이나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하루를 단정히 견디는 마음,
자기만의 기준을 지키는 힘.
아침마다 옷장을 열면,
그때 배운 태도와 질서가
아직도 내 하루의 첫 단추를 대신 채워준다.
시간은 멀리 흘렀지만,
그 흰 셔츠의 질서와 태도는
내 옷장 속에도, 내 마음속에도 여전히 서 있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그 선생님이 남긴 숙제,
‘멋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조용히 풀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