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역까지의 긴 여정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열아홉 살 추억의 불암산을 곱절의 시간만큼의 긴 시간을 보내고서야 다시 만나러 가기 때문이다.
수능을 마치고 논술이었는지 면접이었는지를 보기 위해 서울에 왔고 월계동에 사는 큰고모 집에 며칠 신세를 지기로 했다.
이미 대학생인 사촌 언니와 수험생인 사촌 동생이 놀아주지 않아 심심했던 고모부는 나를 반기시며 동네 뒷산이나 다녀오자며 나를 꼬드기셨고, 서울의 높은 빌딩과 바쁜 인파에 사뭇 기가 죽었던 나로서는 콧바람이라도 쐬고 싶은 마음도 들어 고모부를 따라나섰다.
등산은 애초에 계획에도 없었던 지라 서울나들이 온다고 큰맘 먹고 산 통굽 신발에 나보다 키가 작은 사촌 언니의 댕겅한 오리털 패딩을 빌려 입고서 향한 동네 뒷산이 바로 불암산이었다.
주로 혼자만 다니다가 동행이 생겨 신이 난 고모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코펠에 삼겹살과 김치까지 챙겨 앞장을 서셨다 (지금 생각하면 산에서 화기라니 싶지만 그땐 정말 동네 뒷산인 줄만 알았고 산에서 고기도 많이 구워 먹던 시절이긴 했다).
무등산 같은 육산만 다니다가 거의 처음 경험한 매끄러운 돌산인 불암산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밧줄까지 잡고 낑낑대며 올라가는 동안, 가뜩이나 높은 통굽 신발 덕에 죽죽 미끄럼을 탔다.
잔뜩 긴장하며 어찌어찌 꽤 올라갔던 것 같은데 그게 정상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코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던 바람을 피해 어느 큰 돌틈 아래에서 구워 먹었던 삼겹살과 김치만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항암치료를 하시다가 돌아가셨던 큰고모부는 그렇게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50대의 건강한 산꾼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각설하고, 오늘 코스는 조금 즉흥적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상계역까지 가는 내내 지하철에서 친구와 급하게 검색에 검색을 거듭한 결과 해골바위를 볼 수 있는 6등산로로 올라 정상에서 일몰을 본 후 최단코스인 5등산로로 하산하기로 한다.
친절한 유투버님들과 블로거님들, 그리고 트랭글 덕분에 요리조리 찾아가는 길도 헤매지 않고 무사히 들머리인 불암산 나비정원에 도착한다.
공휴일이라서인지 가족 단위로 유모차, 킥보드, 자전거 부대가 즐비하다.
화장실에서 채비를 마치고 힐링타운 코스로 본격 불암산 탐방 시작!
돌계단과 나무계단, 오솔길을 따라 꾸준히 오르막이 계속된다.
소문난 돌산답게 중간중간 암반 구간도 등장하지만 쇠줄과 핸들이 잘 되어있어 큰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다.
많이 오르지 않아도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어 기분좋게 오르다 보면 해골바위(지도상 정식 명칭은 풍화바위)에 도착.
블로그 선배님들은 구멍구멍마다 쪼그리고 앉아 인증샷을 멋지게 찍었던데 우리팀은 등력이 부족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와글와글 이리 올라가봐라 저리 다리를 뻗어봐라 갑론을박해보지만 도저히 각이 나오지 않아 등린이의 현실과 타협해 적당히 멋지게 찍어본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헬기장과 불암산성을 지나면 부드러운 능선길을 따라 거북산장에 도착한다.
주류파들은 멸치 한 줌에 막걸리 한 통을 나눠마시고 다시 정상으로 고고~
사방이 탁 트인 암벽이지만 등린이도 오를 수 있도록 잘 정비된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면 드디어 만나게 되는 정상석.
커다란 바위 배경에 비해 정상석은 작고 아담하지만 되려 단단해 보인다. 정상석 뒤판의 멋진 문구 덕에 단단함이 더해지는 기분이다.
정상석 위로도 암벽등반 수준의 (등린이 기준) 줄타기를 하고 오르면 세찬 바람에 힘차게 태극기를 펄럭이는 국기봉을 만날 수 있다.
이제 지평선까지 한 뼘 남짓밖에 남지 않은 채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보며 옹기종기 모여앉아 산뽕을 충전한다.
하지만, 산은 해가 지고 나면 순식간에 어두워지기 때문에 조금의 아쉬움은 남겨둔 채 이제 하산하기로 한다.
빠른 하산을 위해 최단코스인 5등산로로 향하는 길.
거북산장을 조금 지나 상계역으로 안내하는 이정표를 따라간다.
불암정에 잠시 앉아 이제 북한산 봉우리 코끝에 걸린 노을과 인사한 채 바지란히 걸음을 재촉한다.
잠시 헤매는 기분도 들긴 했지만 다시 이정표를 만나고 혹시나 준비해 간 랜턴을 켜기 전에 무사히 하산을 완료한다.
노원역으로 이동해 순두부, 오돌뼈, 계란말이, 닭똥집, 오징어볶음까지 모든 메뉴를 나오는 족족 흡입하고 디저트로 달달이 전문가 친구의 강추템인 나뚜르 그린티 퍼지 아몬드까지 편의점에서 마지막 하나를 겟하여 사이좋게 노나먹고 나니 오늘 하루의 행복은 이것으로 차고 넘치는 듯하다 (개표 방송 따위 ㅠㅠ).
산에 다니며 배우는 것이 있다면, 일희일비하지 않는 삶의 태도 같은 것이다.
쉽게 올라도 끝내주는 전망이 펼쳐지기도 하고, 꾸역꾸역 올라도 곰탕같은 날도 있는 법, 매일 하루치의 행복과 성취감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테고, 나는 또 내일의 산을 오를 테고, 나의 대한민국도 또 내일의 미래를 살아내겠지.
힘내자, 내일의 나! 힘내라, 내일의 대한민국!
[요약]
1. 코스: (6등산로) 상계역-불암산 나비정원 -천병약수터-헬기장(불암산성)-거북산장-정상-(5등산로) 불암정-불암계곡, 5.8km, 2.5시간 운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