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보다 1주일 정도 늦었던 개나리와 벚꽃의 개화를 보며 철쭉도 1주일 늦겠거니 하며 작년 피크철보다 한 주 늦게 가기로 계획하고 4월에 미리 숙소를 예약해 두었었다. 그런데 개나리, 벚꽃과 달리 철쭉은 예년과 비슷하게 개화를 하는 바람에 우리는 피크인 5월 5~8일에서 1주일이나 늦게 황매산에 가게 되었다. 5월 첫 주, 등산 카페에 한 시간이 멀다 하고 올라오는 황홀한 황매산 사진에 눈호강하면서도 우리가 갈 땐 이미 졌겠지 싶어 마음 한 켠이 시렸더랬다. 그래도 피크철에는 새벽 4시에도 주차장이 만차라는데 우린 늦게 가니 그 정도는 아니겠지, 라며 위안삼았다. 기왕 먼 길 떠나는 지방 산행이기에 1박을 계획하고 황매의 일출을 위해 근처 산을 토요일에 다녀오기로 했다. 가야산 만물상 코스가 물망에 올랐지만 어려운 코스라 이른 시간 일어나야 하는 황매 일출을 위해 좀 더 쉬워보이는 황석산으로 정했다.
아침 7시 사당에서 출발해 만남의 광장에서 토스트와 김밥을 배급받고 출발. 황석산 입구는 구불구불 1차선의 시골 농로라 맞비켜 서기도 어렵고 차를 돌리기도 버겁다. 멀미 직전에 들머리인 우전마을 사방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선크림도 두들두들 다시 발라주고 등산 시작. 황석산은 등로가 내내 그늘이라 여름에 가기 참 좋은 산이다 싶었다.
'성이 함락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은 왜적의 칼날에 죽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고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수십 척의 높은 바위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꽃다운 여인들이 줄줄이 벼랑으로 몸을 던졌으니 이 어찌 한스러운 비극이 아니겠는가. 그때의 많은 여인들이 흘린 피로 벼랑 아래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 슬픈 전설의 피바위 앞에서 만약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설왕설래 속 잠시 숨을 고른다. 한참을 오르고서야 얼마나 높은 바위에서 떨어졌기에 아래켠 바위에 핏물이 그리 깊게 물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서울 근교산이나 국립공원의 데크길이나 야자매트에 익숙해져서인지 황석산의 등로는 감히 날것의 느낌이 농후했다.
사람의 손이 크게 닿지 않은 듯한, 누가 일부러 정비한 길이 아닌, 사람의 발길 닿는 대로 생겨난 산길 그대로를 걷는 느낌은 낯설긴 했지만 조금 불편할 뿐 싫지는 않았다.
다만 밟는 돌이 매우 커도 흔들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걸어야 했다.
그렇게 거친 오르막을 바지란히 오르다 보니 위풍당당한 황석산성이 나타났다.
그 옛날 이 울퉁불퉁한 산길로 어찌 이 많은 돌들을 나르고 쌓아올렸을지 가히 짐작도 되지 않았다. 산성을 지나 잠시 숨을 고르는 완만한 숲길을 지나자 갑자기 반지원정대가 뛰쳐나올 것 같은 비현실적인 신비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잠시간 마지막 깔딱을 숨차게 올라서니 드디어 황석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오고 황석산성이 길게 드러누워있다. 싱그러운 신록으로 뒤덮인 황석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굽이굽이 소백산맥 줄기의 산그리메가 커튼처럼 드리워져있다.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과 함께 영혼까지 날아갈 것 같았지만 멋진 풍광에 정신줄을 붙잡고 열심히 사진도 찍고 정상석 인증도 찰칵.
맹렬한 바람에 순식간에 식어버린 몸을 데우려고 볕좋은 산성에 자리를 펼치고 점심을 먹는다.
김밥과 편육, 오징어와 스프링롤까지 화려한 점심 메뉴를 거뜬히 해치우고 소화 잘 되라고 파인애플까지 단디 챙겨먹고 하산을 시작한다. 가파른 오르막이 가파른 내리막이 되고 조심조심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믿지 못할 돌다리들을 두드려가며 다들 무사히 하산 완료.
근처 합천의 숙소는 강을 낀 너른 펜션. 시골 정육점에서 2cm 두께로 두툼하게 썰어온 삼겹살은 껍질까지 고소함을 더하고 목살과 장어에 묵은지로 끓여낸 김치찌개까지 아주 꿀맛이다. 동네 주민에게 물어보고 사온 맛난 막걸리와 서울서 함께 내려온 와인까지 오늘 산행의 고단함을 씻어준다. 하지만 즐거운 음주는 내일의 일출산행을 위해 적당히 마무리하고 이른 잠자리에 든다.
새벽 3시, 알람도 울리기 전에 눈이 번쩍 떠지고 서늘한 강바람에 놀라 5월임에도 경량패딩과 각종 외투를 껴입고 채비를 서두른다. 구불구불 캄캄한 시골길을 지나 도착한 황매산 오토캠핑장은 지난주까지 새벽 4시에 만차였다는데 걱정과 달리 4시 반에도 아주 한산하다. 우리는 해뜨는 시간에 맞추기 위해 잘 닦여있는 등산로 대신 깎아지르는 듯한 최단코스 등로를 선택했다. 황매산은 편평하게 넓은 황매평전 덕에 일출은 물론 은하수를 보기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오늘은 하필 보름이라 달이 밝아 별을 보기는 어렵다고 해 일찌감치 일출에 집중하기로 했었다. 블로그 기분 50분 코스라는 최단코스는 황석산 못지않게 정돈되지 않은 너덜길이었다. 물론 들머리 초입에 정상 직전의 100m는 아주 가파르니 노약자는 다시 생각해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문이 있긴 했는데,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수준이었다. 어제 산행이 어렵지는 않아 딱히 느껴지는 통증은 없었지만 이틀 연속 산행이다 보니 허벅지의 피로함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눈뜨자마자 빈속에 격한 오르막을 올라서인지 자꾸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이 들어 얼른 달달이 하나를 뜯어먹는다. 일출 예상시간은 5시 20분이었는데 4시 50분경부터 이미 사방이 환해지며 먼동이 터온다. 주변이 점점 환해질수록 이를 악물고 가파른 경사를 올라챈다. 거친 숨을 고르며 시계를 보니 50분 코스를 35분 만에 올라왔다.
정상에 올라서니 산등성이에 걸친 해는 아직 얼굴을 내보이기 전이지만 아쉽게도 구름이 잔뜩이다.
뽀얗게 수줍은 얼굴로 구름 뒤로 숨어버린 햇님에게 잠시 인사를 나누다 잠시간 바람을 피해 빈 속을 채우기로 한다. 예티통에 이고지고 올라온 뜨거운 물로 컵라면을 익혀 어제 삶아둔 달걀을 풀어먹으니 뜨끈하게 몸과 마음이 풀린다. 여유로워진 발걸음으로 황매평전으로 하산 겸 나들이 시작. 원래는 너른 평야 가득 철쭉으로 풍성했겠지만 사실 절반 이상은 이미 져버렸다.
그렇지만 꼭 철쭉이 아니더라도 저멀리 지리산 천왕봉까지 겹겹이 산수화처럼 농담을 달리하는 멋진 산그리메 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산행이지 싶다. 일행들과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철쭉 앞에서 사진도 찍고 산보하듯 느긋하게 여유로운 하산길을 만끽한다.
가을엔 억새도 가득하고 은하수도 멋지게 볼 수 있다니, 꼭 다시 보자 황매산!
[요약] 1. 코스 Day1 우전마을 사방댐 - 피바위 - 황석산 정상 - 원점회귀 Day2 미리내 오토캠핑장 - 황매산 등산로 - 정상 - 황매평전 - 황매산 산책로 - 미리내 오토캠핑장 2. 기온: 10/22 (하지만 일출산행시 엄청 추웠음) 3. 착장 - 상의: 긴팔티, 노스페이스 바람막이 + 아톰lt (일출) - 하의: 춘하바지 4. 기타 준비물: 헤드랜턴, 물통 5. 장점: 황매산은 캠핑장에서 올라오면 아이들도 아장아장 올라올 수 있음. 6. 단점: 황석산은 들머리까지 시골길 운전 (비키거나 차 돌리기 매우 어려움) 7. 다음 방문 계획: 철쭉 피크 시즌 도전! 가을 억새도 도전! 최단코스 말고 능선길 따라오는 코스로 도전!
[별점] 1. 난이도: 3.5 (두 산 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돌이 많음) 2. 풍경: 4.0 (황석산은 날씨 덕, 황매산은 날씨 탓) 3. 추천: 4.0 (황석산), 4.5 (황매산)
[오늘의 교훈] 1. 일출산행은 예상보다 훨씬 춥다. 따듯한 옷은 안 입더라도 오버해서 준비하자. 2. 한국 사람들이 몰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다음엔 사람이 많더라도 피크 시즌에 도전해보자. 3. 아아, 긴 머리는 바람에 어찌해야 하나... (여신머리 유지하는 등산 인스타그래머들 리스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