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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희 Mar 17. 2024

간다라의 국제도시 '시르캅'

간다라 이야기 #13


탁실라의 두 번째 고대도시 '시르캅'


탁실라의 두 번째 고대도시 '시르캅(Sirkap)'을 소개한다. 시르캅은 첫 번째 도시 비르마운드에서 동북방향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있다. 시르캅(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은 비르마운드(기원전 6세기~기원전 2세기)의 뒤 이어 조성된 도시임에도 두 도시 간의 극적인 변화가 눈에 띈다. 바로 도시의 중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대로를 두고, 공간을 격자형으로 구획하여 건물들을 배치한 점이다. 이 특징은 도시의 입구에서 보이는 뻥 뚫린 도로로도 알 수 있지만, 항공사진이나 위성사진을 보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항공사진으로 바라본 시르캅 도시유적
시르캅 유적의 주요 건축물


간다라에 도입된 도시계획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격자형 도시계획을 그리스의 건축가 히포다무스(Hippodamus of Miletus, BCE 498 - BCE 408)가 구상한 것이라 기록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학자들은 격자형 도시계획을 히포다무스식 도시계획이라 부른다. 하지만 히포다무스가 태어나기 전에도 격자형으로 조성된 도시의 사례가 확인되기도 하여 완전히 그의 생각에서 구상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그리스에서 시작된 격자형 도시는 그리스 중심 도시뿐 아니라 식민도시, 나아가 헬레니즘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고 말해진다. 이 주장을 뒷받침 하는 대표적인 증거로 탁실라의 고대도시 시르캅이 거론된다.


사실 격자형 도시가 모두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에는 비약이 있다. 단적으로 기원전 2500년 경에 만들어진 모헨조다로도 격자형으로 만들어진 도시이다. 다만, 시르캅이 만들어진 역사를 살펴보면 이를 그리스식 도시라고 말할 수 있겠구나 하고 납득이 간다. 그 배경을 좀 더 알아보자.


알렉산더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동방원정이 끝난 이후, 점령했던 영토에는 그리스계 왕국들이 유산처럼 남겨졌다. 그중 하나인 '그리스-박트리아(Greco-Bactrian)'는 기원전 3세기 박트리아에서 성립되어 세력을 키워나갔다. 기원전 2세기 초반 데메트리우스 1세(Demetrius I Anicetus)는 간다라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고 직접 출전에 나섰다. 탁실라는 기원전 186년 즘 함락되었다. 공격은 순조로웠지만 본토였던 박트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돌아갈 수 없게된 데메트리우스 1세는 탁실라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국 '인도-그리스(Indo-Greek) 왕국'을 만들었다. 기존의 도시 비르마운드는 폐허가 되어버렸기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외부에서 온 그리스계 집단은 자신들의 방식을 적용하여 도시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렇게 간다라에 히포다무스식 도시가 탄생하게 것이다.


시르캅의 왕궁 추정지

고대 간다라의 국제도시 시르캅


그리스계 통치자들은 알렉산더가 그리하였듯이 이문화와 다양한 종교에 대한 넓은 포용역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탁실라의 중심지 시르캅은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이는 시르캅에서 확인된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간다라의 중심 거리, 다양한 종교 건축물이 모두 모여있다.


탁실라에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융성했던 것은 불교였다. 탁실라에 인도-그리스 왕조가 들어서기 이전에는 마우리아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다.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대왕이 불교를 널리 포교한 왕으로 유명한 만큼, 탁실라에서 주로 신봉되고 있던 종교는 불교였다. 이러한 흐름은 통치세력이 바뀌어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시르캅에서 가장 큰 종교 건축물은 압시달 사원인데, 이는 불교 스투파를 안치한 사원으로 추정된다. 또한 해시계 사원이라 불리는 건축물도 사실 불교 스투파의 기단 부라는 견해가 있다. 그 외 여러 유적들에서 불교와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을 통해, 새로운 통치자들은 기존의 종교와 문화에 대해 포용적인 정책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좌) 불교 사원으로 추정되는 압시달 사원, (우) 선 다이알 사원은 서양의 영향이라는 설과 불교 스투파라는 설이 있다.


포용적인 정책은 불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도 도시의 정문에서 불과 6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쌍두취탑 사원은 그리스 쪽의 영향을 받은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사원의 벽면에 그려진 다국적 사원들의 모습은 당시 시르캅이 얼마나 국제적인 도시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좌) 자이나 스투파, 상부의 원통부는 파괴되었다, (우) 자이나교 스투파 내에 놓여있는 자이나교 관련 추정 유물
시르캅에서 출토된 자이나교 관련 유물들 (좌) 탁실라 박물관 소장 유물, (우) 이슬라마바드 박물관 소장 유물
다양한 종교의 사원이 동시에 그려져 있는 쌍두취탑 사원 (좌) 항공사진, (중) 정면사진, (우) 주요 조각부



그리스 왕과 불교 승려의 대화


시르캅의 포용적인 분위기는 문화의 융합을 이끌어냈다. 그 성과를 대표하는 사례로 '밀란다왕문경(Milinda Pañha)'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밀란다왕문경은 인도-그리스 왕국의 8대 왕인 메난드로스 1세(Menander I the Savior)와 저명한 승려 나가세나(Nāgasena)와 문답을 담은 경전이다.


메난드로스 1세는 그리스식 교육을 받고 자랏지만, 일찍부터 자신이 통치하던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알고 싶었던 왕은 많은 불교 승려들을 불러 날카로운 질문을 하였지만, 왕을 만족시키는 답변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저명한 승려 나가세나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왕은 나가세나에게 평소부터 가지고 있던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나가세나는 그리스 왕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적절한 비유를 들어가며 납득을 시켜나갔다. 이렇게 대화가 삼 일간 이어졌다. 결국 나가세나의 대답에 탄복한 메난드로스 왕은 불교에 귀의하고, 나가세나를 스승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시르캅 유적의 왕궁터, 이 곳에서 메난드로스왕과 나가세나의 대화가 있었을까?


역사에 따르면 메난드로스왕은 수도를 간다라의 탁실라에서 펀잡의 사갈라로 옮겼다. 따라서 둘의 대화가 이루어진 장소는 간다라의 탁실라이거나 펀잡의 사갈라(Sagala)일 것으로 추정된다. 밀린다왕문경의 내용을 이해하기에 장소의 특정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시 이곳에서 그 역사적인 대화가 오갔을 것이라 생각하면  빈 시르캅의 왕궁터를 둘러보는 감회가 새로워진다.


시르캅 유적지

참고자료

서경수, "밀린다팡하", 동국역경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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