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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희 Apr 13. 2024

아소카 대왕 이야기

간다라 이야기 #17

신라에는 신라삼보라 칭해졌던 거대한 불상이 있었다. '장육존상'이라 하여 이름에서 유추학 수 있다시피 높이는 일장육척으로 이를 환산하면 약 5미터에 이른다. 존상은 아쉽게도 1238년 몽골의 침략으로 소실되었다. 삼국유사에서 삼국유사 이 존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쪽 바다에 큰 배가 정박하여 조사해 보니 다음과 같은 첩문이 있었다. '서천축의 아육왕(阿育王)이 황철 5만 7천 근과 황금 3만을 모아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기 못해, 이를 실어 바다에 띄웠으니 인연이 있는 나라에 이르러 장육존용을 이루어라.' - 삼국유사 권 제3 탑상 편


기록에 의하 장육존상은 천축국의 아육왕, 즉 아소카왕이 축원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에 살았던 아소카 왕이 띄워 보낸 배가 거의 천 년 가까이 지난 후, 이역만리 떨어진 신라에 도착했다는 것은 영화에서 다뤄질 법한 판타지급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진위를 역사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담겨 있는 의를 읽는 것은 역사를 이해하는 것에 유익하다. 기록을 검토해 보자면 신라에서 황룡사 주불상에 어울리는 불상 조성고자 했. 기에 정당부여하기 위해 천축국의 아육왕, 즉 아소카 대왕을 가져다 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자면 6세기 신라에는 이미 아소카 왕이 불교 포교를 위해 힘을 쓴 대왕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점 알 수 있다.



아소카 대왕 이야기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전륜성왕으로 신라까지 알려진 아소카 대왕은 불교가 전해진 대부분의 나라에서 존경받는 왕으로 거론된다. 또한 불교가 더 이상 신봉되지 않는 인도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왕으로 꼽힌다. 그 배경에는 그의 영화와 같은 인생 일대기 때문일 것이다.


산치대탑에 묘사된 아소카 대왕(출처: 위키피디아)


아소카는 마우리아 왕국의 두 번째 왕인 빈두사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빈두사라가 낳은 아들들은 101명이나 되었고, 아소카는 낮은 신분의 어미니로부터 태어났다. 또한 거친 피부와 못생긴 얼굴로 아버지 빈두사라는 아소카를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즉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있는 왕자였다.


어느 날 저명한 고행자 핑갈라-바차지바(Pingala-vatsajiva)가 왕궁을 방문하여, 왕에게 아소카를 후계자로 추천했다. 왕은 고행자의 조언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탁실라 지역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그러자 빈두사라는 아소카에게 이를 진압하게 하였다. 하지만 터무니없이 적은 군대와 부족한 군장비를 주었다. 이는 왕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였고, 당시 인도에서 흔히 행해졌던 권력자의 정적 제거의 방식이었다. 아소카는 이 명을 담담히 받아들였고, 탁실라로 출정을 떠났다.


그러 아소카는 반란을 손쉽게 제압하고 돌아왔다. 오히려 반란세력의 대부분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돌아올 때에는 군대가 훨씬 커져 있었다. 빈두사라가 아소카를 제거하고자 하였던 함정이었지만 아소카는 오히려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스스로의 역량을 왕국 내에 알려 아소카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탁실라에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빈두사라는 장자인 수시마(Susima)에게 반란 제압을 명했다. 그런데 왕위 계승 1위의 왕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빈두사라가 급사하였다. 아소카는 이 기회를 틈타 왕위에 올랐다. 소식을 듣고 급히 수도로 복귀한 수시마의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다. 또한 그는 잔혹하게도 자신의 친형제 한 명을 제외한 99명의 형제들을 모두 처단하여, 자리를 공고히 하였다.


아소카는 왕위에 오른 지 1년 뒤 바로 인접국 칼링가를 공격했다. 칼링가는 바다를 끼고 교역을 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며, 해군을 비롯하여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소카의 할아버지이자 마우리아 왕국을 건국한 찬드라굽타도 칼랑가를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아소카는 특유의 영민함과 잔혹함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다만 3년간 이어진 전쟁에서 약 3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아소카의 잔혹한 처사로 사람들은 그를 찬다쇼카(Chandashoka), 잔혹한 아소카라고 불렀다.


전쟁 후 아소카는 불교에 귀의하였다. 99명의 형제들의 처단과 30만 명의 희생자들에 대해 진심으로 참회하였는지,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통치를 하기 시작했다. 전국에 병원과 고아원, 양로원을 설치하고 서민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심지어 동물을 함부로 해하지 못하도록 하고, 동물병원도 건립했다. 불교의 포교에 대해서도 아주 적극적이었는데, 그의 활동은 지금도 남아있는 수많은 석주, 비석 등을 통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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