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서 간다라의 스투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간다라에 지어진 스투파는 이른 시기부터 장대한 규모로 만들어졌으며, 후대로 갈수록 높아지고 장식도 화려해져 더욱 장엄해졌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 스투파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무엇을 넣어두었기에 이렇게 거대한 스투파를 건립했을까?
Mankiala 스투파에서 발견된 유물 위치 ⓒ James Fegusson
스투파의 가장 깊숙한 곳, 기단부의 정중앙 혹은 기단의 아랫부분에는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사리'란 산스크리트어로 몸을 의미하는 '사리라(शरीर, Śarīra)'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불교에서는 열반에 든 부처님을 화장하고 남은 유해와 재를 의미한다. 즉, 스투파는 부처님의 무덤인 것이다. 불교도들은 부처님의 무덤을 돌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떠올렸고 말씀을 되새겼다.
인도 정부에서 인정한 유일한 부처님 진신사리 piprahwa 출토(델리박물관) ⓒ 위키피디아
부처님이 처음 돌아가셨을 때, 부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서로 사리를 갖고자 했다. 평화로운 방법으로 합의를 보았는데, 그 방법이 무리의 수에 맞춰서 나눠가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이 해탈한 직후에는 여덟 개의 스투파가 만들어졌다. 이를 근본팔탑이라 한다. 시간이 더 지난 후, 불교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했던 아소카왕은 이 근본팔탑 중 일곱 탑을 해체한 후 사리를 소분하여 팔만사천탑을 조성했다. 이후 아주 작은 사리 하나도 소중하게 다루어지게 되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함께 보석이나 귀금속을 넣기 시작했다.
피프라와(Piplawa) 스투파 출토 사리(중박 특별전)
간다라에서 불교가 가장 유행했던 쿠샨 왕조 시기는 부처님 사후로부터 500~1000년이 지난 시기였다. 진신사리를 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사리함에 보석이나 귀금속 금화나 동화를 넣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법사리라고 하여 불경을 넣기도 했는데, 간다라에서 그런 경우에 대해서 필자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
사리의 가치가 높아진 만큼 사리를 보관한 사리함도 화려하게 만들었다. 돌을 정밀하게 깎아 항아리 형태의 석함을 만들거나, 귀금속을 가공하여 상자형태로 만들기도 했다. 스투파의 모양을 본떠 만든 사리함도 있다. 몇몇 사리함은 사리보다 더 가치가 높아 보일 정도로 정밀하고 화려하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스투파 또한 사리함의 일종으로 볼 수 도 있지 않을까 싶다. 사리함이든 스투파든 소중한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만든 시설이다.
Bimaran 스투파 출토 사리구 ⓒ British Museum
Manikiyala 출토 유물(Ventura 1830 출토) ⓒ British Museum
그런데 유럽에서 온 탐험가나 군인들의 눈에는 스투파가 종교적 대상이라기보다 거대한 보물상자로 보인 듯하다.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간다라에 위치한 많은 수의 스투파들은 파괴되었고, 스투파 깊숙이 안치되어 있던 성스러운 유물들은 약탈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에는 탐험가들이 주축이 되어 유물을 반출했다. 그리스의 예술작품을 닮은 간다라의 조각들은 유럽에서 높은 인기가 있었고, 탐험가들은 불교 유적들을 장식하고 있던 부조 조각들을 떼내어 유럽으로 운반했다. 이 시기에 많은 스투파들도 해체되었다. 거대한 건물에 구멍을 뚫고 안에 들어 있는 보물들을 꺼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지만 탐험가들에게는 꼭 탈취해야겠다는 사냥감이었는 듯하다.
이러한 약탈은 19세기에 더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 인도-파키스탄은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회사가 무슨 군대를 파견했나 싶지만, 당시 식민지를 개척하는 회사에는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동인도회사 소속의 군인은 많을 때(세포이 항쟁시기) 거의 30만 명에 육박했을 정도이다. 힘을 가진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관할 지역 내의 스투파나 유적을 뒤집어 보물 찾기를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두 세기 동안 탐험과 조사라는 명분으로 스투파는 철저하게 약탈되었다.
문제는 탐험가나 군인들의 행보를 지켜보던 일부 지역주민들이었다. 간다라의 문화유산이 돈이 된다는 사실에 도굴꾼들이 등장해 스투파나 승원들을 무분별하게 도굴하였다. 이렇게 시장에 유통된 유물들은 출처를 명확히 할 수 없었다. 또한 모조품들이 섞여 들어 진위여부도 애매해졌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스투파 안에 잠자고 있던 많은 유물들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세상에 알려질 수 없는 상태의 건들이 많았고, 또 어둠의 길로 사라져 버린 것이 더 많다.
KP주 출토지 불명 ⓒ Horniman Museum
1957년 카불에서 구매한 간다라 사리장엄구 ⓒ British Museum
다행스럽게도 19세기 후반부터 유럽인들의 보물 찾기는 고고학스러움을 갖추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알렉산더 커닝엄의 공이 크다. 그도 역시 인도의 식민지배를 위해 파견된 군인이었다. 다만 그는 인도에 파견되기 이전부터 고고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인도에 고고학 조사의 개념을 가져왔다. 그는 유적과 유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학회에 논문을 투고하기도 하였다. 소장까지 승진을 하였음에도, 전역을 신청하였고 인도제국의 고고학연구관이 되었다. 그는 인도고고학연구소를 설립하여 고고학 조사를 정부 주도로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의 노력은 20세기에 고고학을 전공한 전문가들이 인도고고학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덕분에 스투파에서 출토된 유물들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시르캅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사리함 ⓒ 존 마셜
다르마라지카 출토 사리함과 사리 ⓒ 존 마셜
(좌) 다르마라지카 출토 사리함 ⓒ 존 마셜, (우) 카라완 출토 사리함 ⓒ 존 마셜
이번 글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간다라의 스투파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던 사리들은 유럽의 열강들의 손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명분이 조사 연구에 있었던, 탐험에 있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많은 수의 사리함들은 간다라를 떠나 유럽으로 넘어갔다. 카니슈카 대탑에서 출토한 사리함은 영국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다시 페샤와르 박물관으로 반환되긴 하였지만, 이는 아주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즉, 스투파를 보려면 파키스탄으로 스투파에 들어있던 유물을 보려면 유럽으로 가야 한다. 스투파에서 출토된 유물 중 다수는 유럽의 박물관에 공개되어 있지만, 더 많은 수는 부자들의 금고 속에 있다. 간다라에 남겨진 반파된 스투파들을 볼 때마다 식민지배 끝에 껍데기만 남겨둔 듯하여 씁쓸함이 감돈다.
시르캅 출토 사리함 ⓒ 탁실라 박물관
(좌) Sonara 스투파 출토 사리함 ⓒ British Museum, (우) 스왓 박물관 소장 스투파 ⓒ 스왓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