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말부터 농사를 시작했다. 주말 농부로서의 타이틀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셨지만 가끔 놀러 갔을 뿐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도시에서 자란 나는 땅에서 튀어나오는 지렁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어려웠고 땀을 뻘뻘 흘리며 하는 경작활동이 그다지 재미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나마 감자를 캐어 올릴 때 줄줄이 달려 나오는 알맹이들과 흙장난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내가 농사를 지어 보고 싶다는 결심이 서기까지는 여러 요인이 있다. 아마 그 시작은 내 몸과 건강은 내가 먹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에 있는 것 같다. 20대 초반에 미국 대학에서 전 세계의 음식문화를 배우는 수업 중에 접한 Kosher(코셔) 문화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코셔란 "전통적인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식재료를 선택하고 조리한 음식을 일컫는 말로, 사전적으로는 '적당한, 합당한'이란 뜻이다. (두산백과)" 유대인들의 믿음이 식문화에도 반영되어 신이 주신 몸에는 깨끗한 것만을 받아들인다는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는 꼭 종교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충분히 실천해볼 만한 식습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나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신경 써야 하는 중요한 하루의 일과가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내가 먹는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더 신경을 쓰면서 식단을 구성하고 채소나 식물성 단백질을 더 많이 섭취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네덜란드에서의 라이프 스타일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집에서 요리를 해 먹는 경우가 많다. 외식비용이 비교적 비싼 네덜란드에서 사람들은 슈퍼에서 신선한 재료로 장을 봐서 친구들과 함께 요리를 해서 저녁을 먹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의 식사에서는 샐러드가 거의 빠지지 않는다. 점심에도 간단하게 바게트에 좋아하는 치즈나 햄을 넣고 야채를 듬뿍 넣어 샌드위치를 먹는 것이 이들의 식습관이다. 자연스럽게 나 역시 생야채를 즐겨 먹는 것이 식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Vegetarian이나 Vegan 음식점 혹은 메뉴들이 많다는 것에서도 네덜란드 사람들이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는 배경이 된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육류나 어류의 음식 재료들이 다양하지 않아 채식의 문화가 자리 잡은 것도 있겠지만 건강하게 먹고자 하는 그들의 식문화가 이러한 트렌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맛도 있다.
하지만 단순하게 이러한 건강한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농사로 직결되지는 않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가 디지털화되어 변화하는 양상이 내가 농사를 지어보고 싶은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마케팅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디지털 마케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전공도 그렇고 나에게 맞는 성향도 그렇고 온라인 보단 오프라인 마케팅을 더 즐겨하는 사람이다. 사람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간의 교류를 좋아한다. 디지털 전환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도 해보았지만 디지털 전환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IT 기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변화에 맞게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것이라 믿는다.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완벽한 디지털 전환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신기술을 받아들이는 데에 거부감은 없었지만 디지털화되어 가는 비즈니스 환경은 사실 일정 부분 나를 지치게 하고 있었고 일 외적인 부분에선 최대한 탈디지털적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계나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광고들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활동을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느낀것이다.
그러던 와중 2020년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면서 인간의 활동이 멈추자 자연이 회복되고 있다는 뉴스들을 접했다. 그러면서 관심을 갖고 다양한 환경 다큐멘터리들을 보기 시작했다. 자연이 회복되지 못하면 결국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는 메시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제조업의 시대보다 환경오염이 덜할 것 같았던 디지털 시대는 사실 디지털 탄소 배출로 인해 자연에 또 다른 피해를 입히고 있다. 과연 이렇게 발전만 지향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어떤 일이든 균형이 깨지면 힘들어지기 마련인데 인간이 코로나를 통해 심판대에 오른 것이 아닐까. 인간이 이루어낸 발전으로 지구는 점점 훼손되어가는데 후세를 꿈꾸는 것이 맞을까. 극단적이다 할 수도 있겠지만, 이때 나는 농사를 결심했다. 코로나로 인해 이미 많은 분야는 울트라-디지털화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과 관련된 일을 안 할 수는 없으니 그와 정반대 되는 아날로그적 농사를 택함으로써 나와 가족의 정신 및 신체 건강, 그리고 자연의 지속 가능함을 위해 내가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해양 생태계에 관해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한 해양 전문가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Change starts with someone. Some 'one'. No 'one' can do everything but everyone can do something... that's what you can do right now."
(변화는 누구에게서나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가 모든 것을 할 순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실천을 통해서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도 자신도 없지만, 2021년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 보기로 한 올해는 귀국과 농사를 결심하면서 그동안 느끼던 심적 불안함을 깨끗이 씻어내고 있다. 조금 더 인간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나를 돌보고, 가족을 돌보고, 친구를 돌보고, 그들과 나눌 채소들을 돌보면서.
밭 갈고 파심는 나
밭에 가서 몸빼 바지를 입고, 장화를 신고, 쪼그리까지 차고 움직이는 순간만큼은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는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놓고 그에 맞춰서 곡괭이 질, 삽질, 김을 매고 있으면 세상 힙한 농부가 된 느낌이다. 저 멀리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칭찬이 땀범벅이 되어도 신나게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된다. 쟤 네덜란드 가서 농사 배워왔냐고, 왜 저렇게 땅을 잘 가냐며. 그냥 사는 게 재밌다고 느껴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없다. 하지만 요즘 하루하루 사는 게 재밌어지고 있다. 어딘가 균형이 맞아가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