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이 오는 것이 싫었던 나는 요즘 월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상관없이 아침이면 눈을 뜨고 있다.
그 이유는 잠에서 깬 고양이가 놀아달라고 다가와 아침잠을 방해하며 나를 깨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주말과 평일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아침에는 고양이 밥을 챙기고 놀아주고 그렇게 출근준비도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고양이는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나에게 마치 올바른 생체리듬을 갖게 만들어주기 위해 나타난 선생님처럼 자야 할 시간과 일어나야 할 시간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쉬는 시간에 휴대폰 앨범 정리를 하다가 예전에 찍어두었던 알버트 슈바이처의 문구가 눈에 띄었다.
저 당시 나는 불행하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고 살고 있던 시절이었고, 고양이를 데려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아기 고양이를 케어하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피곤하던 시절이라 저 문구에 완전한 공감은 하지 못한 상태였다. 언젠가 저 말에 공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글을 써야겠다 하는 심정으로 사진촬영만 해두었었다.
그렇게 저 사진을 찍은 지 2달 정도가 지난 것 같다.
지금은 고양이와 수면패턴이 조금씩 맞아지고 있고 고양이는 어느새 덩치도 많이 커졌고, 새로 만들어준 캣타워에 자신만의 공간을 갖기 시작하면서 분리불안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잘 때에도 예전에는 무조건 살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붙어 자려했었는데 이제는 침대맡에서 나의 베개와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도 잘 자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사는 구성원으로서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지만 연연하지는 않는 딱 좋은 우리만의 거리감을 터득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서로에게 스며들어가는 것이겠지. '따로 또 같이'가 가능한 편안한 사이가 되어가는 중인 것 같다.
이렇게 서로에게 편안한 거리감을 지키며 지내는 동안, 나는 사진 속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된 것 같다. 고양이 덕분에 나는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내 공간을 사랑하고 나를 아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고양이를 보면서 울고 웃고 또 배우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생이 불행보다는 행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처음 고양이를 데려오고 실제로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시절에는 주변에 고양이를 키운다는 말을 선뜻 먼 저 하지 못했었다. 당시에는 힘이 들어서 좋은 이야기보다는 힘든 이야기가 더 많이 떠올랐기도 했고, 고양이를 평생 케어할 자신이 없기도 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신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이제는 해낼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도 조금씩 생기고 있다. 고양이 덕분에 나는 작았던 내 그릇을 조금 더 넓히고 한층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휴대폰 알람이 아닌 고양이 알람이 지금처럼 매일같이 나를 깨워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