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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IDY Feb 23. 2024

고난의 하원길

 아이와 하원을 약속한 날이었다. 보통은 할머니나 외할머니가 하원을 도와주시지만, 그날은 시간을 잘 조정해서 평소보다 빨리 집에 갈 수 있었다. 아침에 같이 등원할 때부터 아이는 하원까지 엄마와 함께 한다는 생각에 들떠있었다. 하원하면서 아이가 정말 좋아하는 츄러스 가게에 들러 간식을 사먹자는 약속까지 했다. 분명, 아침까지는 모든 게 다 괜찮았다.


 그러나 딱 하나 괜찮지 않은게 있었다. 요 며칠 따스함과 추위를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그 전날 눈이 펑펑 와서 온 세상이 하얗게 뮬들어 있었다. 등원길에는 나무 위 아름답게 핀 눈꽃에 대해 아이와 즐겁게 얘기했는데… 회사에 출근하니 건물 관리사무실로부터 폭설로 쌓인 눈 낙하에 주의하고, 대중교통이 혼잡하니 해당 내용을 참고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튼. 별다른 일은 없었기에 계획했던 시간에 퇴근하여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아주 먼 거리는 아니지만 지하철역이 애매해서 두 번을 갈아타야 한다. 지하철 시간표를 보기 위해 어플을 켜니 원래 주로 다니던 루트의 지하철이 한참 뒤에 오고, 그 반대편으로 살짝 돌아가는 루트를 추천하는 것이었다. 조금 찜찜했지만 그 루트로 갈 경우에도 예상도착시간에는 얼추 맞는 것 같기에 그 방향으로 탔다. 평소에는 이동하면서 짬짬히 핸드폰으로 웹툰도 보고, 영상도 봤는데 이번에는 익숙한 루트가 아니니 혹시나 잘못 내릴까봐 핸드폰도 가방에 바로 넣어버렸다.


 그런데 아침에 방송으로 경고한 것처럼, 지하철이 조금씩 연착되기 시작했다. 눈이 와서 그런지 지하철을 타는 사람도 평소보다 많고, 일반적인 퇴근 시간도 아니다보니 지하철 간격이 넓어서 와르르르 타고 와르르르 내리며 시간이 조금씩 지체됐다. 예정시간보다 조금씩 늦어질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결국, 두 번째 지하철을 갈아탈 때 간발의 차로 지하철을 놓치고 말았다. 어플을 다시 켜서 다음 지하철이 언제 오는지를 보니, 8분은 걸린다는 것이다. 그 시간에 타면 100% 하원 시간에 맞추지 못한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바로 택시 어플을 켜고 만약 택시를 탄다면 예상도착시간이 어떻게 될지 계산하며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그러나 택시를 탈 경우 지하철보다 예상도착시간이 10분은 더 늦는 것 아닌가. 나가서 바로 택시를 탈 수 있다는 보장도 없기에 다시 바로 내려와서 하원선생님께 원래 하원 시간보다 10분정도 늦을 것 같다고 연락했다. 선생님께서는 하원 장소가 정차를 오래 못 하는 곳이라, 지하철역에서 더 떨어져 있는 다른 장소로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 장소까지 가려면 역에서 내려서 아무리 빨리 뛰어봤자 5분 이상은 걸리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께 다시 전화가 왔다. 선생님께서 XX역 3번 출구로 올 수 있냐고 하셨는데 마침 다음 역이 XX역이었다. 그 역은 유치원 방향과 반대편에 있는데, 그때는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이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마침 그 역이라고, 알았다고 하고 바로 내렸다. 출구로 달려가는 길에 전화가 다시 와서 받으니 선생님이 역을 착각했단다. 원래 내가 내리려던 역 3번 출구인데 XX역이라고 잘못 말했다는 것이다. 난 벌써 내렸는데 지금 다시 내려가서 지하철을 타려면 또 한참 기다릴 텐데, 역과 역 사이 거리는 비록 한 정거장이지만 걸어가려면 20분은 걸리는데, 게다가 거리가 멀지 않으니 택시도 잘 안잡힐텐데 하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이미 하원시간은 넘어가 있었다.


 일단 역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봤는데 마침 택시가 한 대 보였다. 택시 어플로 택시를 호출해봤자 가까운 거리는 수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알았기에, 가려는 장소의 반대편 도로임을 알았지만 선택의 여지 없이 바로 보이는 택시를 잡았다. 타자마자 너무 가까운 데라서 죄송하지만 oo역 3번출구로 가달라고 말씀드렸다. 헐떡이면서 타는 나를 보고 택시기사님이 급한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최대한 급박하게 아이 하원 시간에 늦어 빨리 가야한다고 대답했다. 택시기사님은 그 마음 이해한다며, 하지만 아이가 잘 하원할 때까지 선생님이 잘 봐주실 거라며 나를 위로하셨다.


 그러나 정말 내 급박한 마음과는 다르게, 바로 유턴하면 5분도 안걸릴 거리를 유턴이 불가한 곳이라며 네비게이션은 자꾸 위로 위로 올라가라고 안내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 무슨 골목으로 들어가서 한바퀴 돌라는 안내가 떴다. 골목을 통과하니 내가 처음 탄 그 장소가 나왔다. 그렇게 원래 장소로 돌아오는 데만 10분이 걸렸다. 계속 한숨이 나왔고 길을 이렇게 안내하는 네비게이션도 원망스럽고 길 설계를 왜 이따위로 한 것인지 화도 났다. 택시기사님은 계속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선생님이 잘 봐주고 계실 거다, 길이 왜 이렇게 이상한지 모르겠다, 가능한 빨리 가주겠다 계속 친절히 말을 걸어 주셨다.


 드디어,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여 택시기사님께 서둘러 감사인사를 남기고 셔틀버스로 달려갔다.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안겼고 나는 연신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흥분하고 초조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아이에게 엄마가 약속한 시간에 맞추지 못해서 미안하고, 기다리는 동안 어땠는지 물었다. 아이는 “엄마를 빨리 보고 싶었어요” 라고 대답했고,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친구들이 다 내리고 버스에 혼자 남았을 때 얼마나 놀라고 당황스러웠을까 생각하니 계속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그런 나를 보며 츄러스 먹으러 가자고 약속했으니, 빨리 가게로 가자고 재촉하며 웃음을 지었다. 아이의 미소에 오늘의 짜증과 당황스러움이 확 씻겨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이와 가게로 이동하면서, 선생님께도 잊지 않고 문자를 보냈다. 아까 경황이 없어서 이야기를 제대로 못 했는데, 늦게까지 아이 하원 기다려주셔서 감사하다고. 기사님께도 감사 인사 전해달라고. 내가 시간계산을 좀 더 넉넉하게 해서 아이를 데리러 갔어야 하는데, 괜히 남 탓, 상황 탓만 한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고 부끄러웠다. 선생님도 아이가 하원하지 못하는 돌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을 것이고, 택시 기사님도 급한 손님을 빨리 데려다주고 싶었을 것인데 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제대로 고맙다는 말을 못한 것 같아 후회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와의 시간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크게 남았다.


 그러나 울지 않고 엄마를 기다려 준 아이의 의젓함에, 엄마를 원망하기보다 “빨리 보고싶었다”고 말해주는 다정함에 한 편으로는 크나큰 감동을 받았다. 이 맛에 엄마를 하는구나! 앞으로 아이를 키울 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이 때의 아이 미소를 떠올리면 뭐든지 용서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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