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승일 Feb 04. 2023

사소한 불운을 즐기다

소노 아야코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

 사를 그만둔 친구 K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해 본다. 꺼져 있는 전화…. 곧 다시 연락이 온다. 이번엔 토익 900점을 넘겨 보겠다며. 서른 살 언저리 친구가 하는 다짐, 동정하기엔 나도 변변치 않다.


 배우 손석구는 10년 동안..., 코미디언 김원훈은 개그콘서트 종영 후..., 평론가 이동진은 조선일보에서 14년 동안..., , 기어코 얼굴을 알리게 된 사람들마다의 고진감래를 구경하며 산책하는 지금의 자신을 본다. 그래 과도기겠지, 미래엔 웃겠지, 그래도 지금 내 주변엔, 다짐하고 약속해도 두 발 뻗고 잠들긴 쉽지 않다.


 약간은 지난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가족들이 모였다. 가족들과의 대화는 재밌다. 에르메스인 줄 알았다가 헤리 메이슨을 선물 받았다는 엄마, 옆에서 비닐 봉다리라며 웃는 아빠, 내가 여행 간다니 자기도 거기 가 봤다며 일본언지 영언지 분간 안 가는 말을 쓰는 형. 아빠가 연꽃 얘길 하니 엄마가 연꽃 좋아하냐 묻는다. 아빠가 엄말 가리키며, 아니 나는 이 꽃 좋아하지, 한다. 엄마가 곧, 죽을래, 그래서 꺾었냐, 한다. 곧 먹을 아이스크림 케이크처럼 팔방으로 씁쓸하기도 재밌기도.


 불운하고 불행하기 쉬운 세상, 우연히 집어 든 책 속 간단하고 명료한 지침들에 나도 모르게 끄덕인다. 공연히 부끄러울 일 없이 책과 조용한 대화를 통해 깨닫는 잘못과 이내 오는 반성은 얼마나 감사한가. 가끔 만나 시원하게 한소리 해 주는 이모 같은 책, 소노 아야코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




1부 나답게가 중요해

1부와 2부에선 '나답게' 바로잡기와 '괴로워' 다시 보기를 주선한다.


 "은 시절이든, 힘든 시절이든 티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매사 결과는 내 몫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 탓을 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자기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지점이 발견된다. 나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나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도 나에게만 주어졌다." (p. 20)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퇴로'를 미리 계산해두지 않는 것이야말로 잘못이다. 욕심부리지 않는다면 도망칠 길은 얼마든지 있다. 지금과 같은 생활을 앞으로도 유지해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달라지지 못하는 것이다. 인생의 기본은 소박한 의식주의 확보로 충분하다. … 나는 누군가에게 영혼을 팔지 않고 살아가는 것보다 훌륭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 무엇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믿는다." (p. 29)


 "나이가 들고부터는 큰 방향을 정하고 나면 사소한 것들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다.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고작 저녁 찬거리 정도다. 찬거리라고 해도 막상 마트에 들러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되면 예정한 품목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다. 운명은 마트에서 장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미의식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기 전까지 막연히 흘러가는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저항하기보다는 당당하게, 그리고 묵묵히 주변 사람들과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고 싶다.

 한집에서 같이 사는 가족일지라도 실은 서로 고독하다. 왜냐하면 각자 나름대로 살아갈 것을 신에게 명령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삶들은 누구 하나 칭찬해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훌륭하게 완결되어 빛난다. 자기 행위를 타인에게 평가받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은 버둥거릴 수밖에 없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을 보내고 있다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하다,는 자신감이 중요하다." (pp. 32-33)


2부 고통은 뒤집어볼 일

 "어렸을 때 우리 집은 가정 폭력이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만 있다면 평화로운 가정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나를 평화롭지 못한 가정의 외동딸로 선택했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고, 적극적으로 이를 개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녀 시절에 매일같이 이런저런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 바람에 무척 이른 나이에 인생은 비참하고 어둡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나이에 인생의 밑바닥을 체험한 덕분인지 작은 도움에도 한 줄기 빛을 만난 것처럼 감사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무리 어두운 터널 속에 있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 살기 어렵다지만 매년 조금씩이나마 좋아지는 모습도 있다. 나는 그 작은 변화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어려서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겪었기 때문이다. 별것도 아닌 일에 고마움을 느끼는 현재의 내 모습이야말로 그 시절 나를 괴롭혔던 쓰라린 운명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pp. 41-42)


 "고식(姑息)이라는 말은 '잠시 동안 한숨 돌리다'라는 뜻이다. 인간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잠시라도 한숨 돌릴 수 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진행을 미룰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오늘 중으로 자살을 계획하고 있던 사람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러 친구 집에 들른다. 친구는 유난히 따뜻하게 맞아주며 "목욕부터 해."라고 권한다. 저녁상까지 대접받고 어찌 죽을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친구는 "피곤할 테니 오늘밤은 푹 쉬어."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 말을 듣고 왠지 오늘은 죽기가 좀 뭐 하다. 결과적으로 죽어버릴 기회를 놓친 것이다." (p. 57)


 "한탄해 본들 불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두운 얼굴을 해 보인다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라면 같은 상황에서 밝게 웃고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자신의 몫이다.

 질병에 걸리고 수험에 실패하고 실연하고 망하고 전쟁에 휘말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육친의 사별,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한 사람은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몰라보리 만큼 강해진다. 마침내 불행이 그만의 개인적인 자산이 되어 그의 등 뒤에서 밝게 빛난다." (p. 63)


 "도쿄 우리 집에는 서너 평 남짓한 텃밭이 있다. 그 밭에서 시금치, 쑥갓, 순무, 유채, 청경채, 써니레터스가 자란다. 추수는 가을부터 다음 해 여름 직전까지 가능하다. 겨울에도 내 밭에서는 채소들이 자란다. 겨울에는 벌레도 없고, 추위에 단단해져 채소들이 더 맛나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약간이라도 녹색을 띠기라도 하면 감사해하며 무조건 먹는다.

 나의 자랑스런 채소들을 가리키며 친구가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소노 씨는 종자 박스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다가 밭에 뿌린다면서요? 참 대단해요"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칭찬하는 줄로 착각하고 짐짓 겸손을 가장하며 되물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해요?"

 "그렇게 뒤섞여 뿌려도 쑥갓은 쑥갓으로 자라나고, 청경채는 청경채로 자라나고, 유채는 유채로 자라나잖아요. 우리네 같은 보잘것없는 인간은 사상적으로 타협해서 유채를 심었는데 쑥갓으로 커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 관찰은 매우 훌륭했다. 식물은 이것저것 뒤죽박죽 심어놓아도 자기 자신을 잃는 법이 없다. 그걸 보면서 나는 식물보다 인간이 훨씬 비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p. 78-79)





3부 타인의 오해

3부와 4부에서는 '시선'에서 자유하라고, 지금대로도 … '행복'하라고 말한다.

 

"각할수록 인간이라는 존재가 재미있다.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같은 지점을 동시에 점유하지 못하며, 동일한 공간을 두 사람 이상이 소유하지 못한다. 전쟁과 내전에서 행해지는 폭격을 피하고자 어머니는 어린 자녀를 품에 안고 엎드린다. 자기 몸으로 위험을 막아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시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어머니는 무사하고 어린 자녀만 희생되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두 사람이 동일한 평면과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면 어머니와 어린 자녀는 사느냐, 죽느냐라는 운명을 함께 나눴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지점에서 서 있을 수 없으므로 단 한 발자국 차이로 생사가 뒤바뀐다. 한 걸음 앞에서 있는 어머니는 살고, 한 걸음 뒤에 따라오던 어린 자녀는 목숨을 잃는다.

 우리는 가까이에 어울려 살아가더라도 바라보는 인생의 풍경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바라보고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함부로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넘겨짚지 말자고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타일러왔다. 그 다짐은 이 나이가 되어서도 변함없다. 상대방을 위해 나의 희생을 감수하며 수고한 일이더라도 그가 고마움을 모른다고 해서 서운해한다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그럴 수도 있음을 인식하며 미리 각오해둬야 한다." (pp. 92-93)


 "긴장이란 일반적으로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생겨난다.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칭찬받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칭찬받는다고 해서 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칭찬받았다고 해서 나의 실체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듯 비방당했다고 해서 나의 본질이 훼손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

 칭찬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타고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 날뛰지 않아도 대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힘껏 밟고 서 있기만 해도 편안하다. 처세를 논하는 데 자연스러움이 서투름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자연스러움은 정신에 불어오는 맑은 바람이다. 그 바람이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pp.. 98-99)


 "믿음은 필연적으로 의심이라는 조작을 거쳐야 한다. 의심도 해보지 않고 믿었다는 건 엄밀히 말해 행위로써의 성립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 일탈이며, 그런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나의 경험을 돌이켜보자면 처음에 의심했던 사람일수록 나중에 신뢰가 돈독해진 예가 많다. 다만 훗날 수치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가 나중에 실망하고 상대를 원망하거나 힐책하느니 의심한 것을 혼자 부끄러워하는 편이 낫다. 더구나 의심했던 상대가 정말 훌륭한 인격자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맛보게 되는 행복과 안도는 처음부터 기대하고 믿음을 허락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큰 기쁨이 된다." (pp. 103-104)


 "친구는 자녀가 아니다. 부모도 아니다. 남편도 아니다. 형제자매도 아니다. 연인도 아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친구로부터 의견과 감상을 요구받기 전까지 그들의 삶에 참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친구라는 입장에서 그의 성공과 건강을 남몰래 기도하는 것으로 족하다." (p. 105)


 "결점을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이상하게도 친구들이 늘어난다. 사람들은 나의 장점에만 호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결점에도 큰 관심을 보인다. 예를 들어 내가 지독히 말주변이 없더라도 나의 약점을 드러냄으로써 상대방에겐 저절로 위안이 된다. 인간의 우월함을 자극하는 비겁한 방법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넓게 봤을 때 이 또한 사랑의 표현 방식 중 하나다.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가장 큰 체력소모는 결점을 감추는 데 소비된다. 타인에게 나의 결점을 감추느라 거짓말을 하게 되고, 나중에 이것이 탄로 나 서로 곤혹스러워진다. 차라리 과감하게 드러냄으로써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사전에 절약할 수 있다면 각자의 장점을 통해 더 큰 매력을 드러낼 수 있는 기운이 생기는 것이다." (pp. 125-126)


4부 보통의 행복

 "오십을 앞두고 시력에 위기가 찾아왔다. 중심성망막염이 양쪽 눈에서 발견되었다. 선천적인 고도근시 때문에 백내장 수술까지 받아야 되는 상황이었다. 매우 위험한 수술이어서 시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다시는 글을 쓸 수 없다는 불안이 우울증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내면적 갈등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진행되었다. 육체적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음에도 나는 겉보기에 건강하고 활기가 넘쳤기에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터키 여행을 강행하고야 말았다. …

 해질녘에 창밖을 바라보는데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벅차올랐다. 나는 여섯 개의 연재를 중단하고 터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언제부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휘감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다. 오직 언제쯤 저녁을 먹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있었다. '결핍'에 의해 얻어진 생활에 대한 실감이었다." (pp. 142-143)


 "자기가 뜻하는 대로만 살아온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대신 우리 대부분은 수도와 전기의 은혜를 누리며 오늘 먹을 저녁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만에 하나 걱정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조금 적은 양에 불편을 느끼는 정도다. 국민 누구나나 최소한의 의료지원 혜택을 받고 있으며, 기본적인 교육은 의무적으로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다.

 이런 혜택이 전 세계인이 다 함께 누리는 보편적인 현실은 아니다. 정치적 난민이 넘쳐나며, 동물보다 못한 처참한 빈민촌도 많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진 상태에서 인간다움을 보장받아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없는 것을 헤아리지 말고 있는 것(받은 것)을 헤아리라."는 속담이 있다. 나는 이런 자세로 살고 싶다. 이것이 지혜이며, 행복해지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pp. 144-145)


 "적당한 자신감, 적당한 가난, 또는 적당한 풍요로움, 적당한 좌절감, 적당한 성실, 적당한 안정, 적당한 거짓말, 적당한 슬픔, 적당한 싫증, 적당한 기대 또는 적당한 체념…. 이것들이 인생에 깊이를 더하고 그늘을 드리우며 좋은 맛과 향기가 나는 존재로 만들어준다." (pp. 149)


얼마 전 카페에서 만난 강아지 깨비, 사람을 어찌나 좋아하던지. 며칠 뒤 교보문고에서 낙서장에 L과 함께 그린 그린 도쿄 여행 네 컷 낙서.


 음 주엔 일본으로 여행을 간다. 10년 동안 쉬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찍는 방점이다. 백 군데가 넘는 곳을 검토하며 꼼꼼히 여행을 계획하다 보니 피로가 쌓이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간의 계획을 마치고 들른 간단한 술집의 정취가 일본을 방불케 했다. 같이 간 L과 '여기가 일본 아니야?' 함께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고생 끝에 잠시 주어진 달콤한 휴식과, 휴식을 앞둔 괜한 걱정과 불만이 한 데 섞인 감사가 아닐 수 없다.


 일상 속 생기는 의심과 불안에 지치기도 하지만, 또 의심 없이는 제대로 믿을 수 없다는 문장에 위로받기도 한다. 또 남들 앞에서 긴장하고 못난 모습 보이진 않을까 조바심하기도 하지만 난 여기 그대로 있을 수 있고, 또 못난 모습도 사랑 표현의 한 방식이라는 데서 안도한다. 적당히 거리를 둔다. 사람들은 잘 모른다.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상처받지 않는다. 거리를 두면 아팠던 것들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내 마음에 바람 통할 창문을 열자. 활짝 열자.

매거진의 이전글 퇴행기 처형(處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