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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사랑의 물리학>, 김인육, 문학세계사, 2016
사랑이라... 저에겐 여전히 민망하고, 수줍은 단어입니다. 마흔 중반의 경상도 남자가 손발 오글거리는 사랑 어쩌고 하는 말을 나긋이 하기엔 스스로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유년시절을 제외하고 남중 3년, 남고 3년, 직업군인으로 또 6년 그리고 소방관이 되어 여자 소방관이 근무하지 않는 구조대에서 14년... 그렇게 보니 이건 뭐 그럴 만도 하네요. 내 성격이.
술 한 잔 거나하게 걸치고 노래방 가서 불렀던 고만고만한 사랑노래들이 유일하게 내 입으로 뱉어낸 세레나데가 아닐까 합니다. 남자답다는 게 그런 건 줄 알고 살았는 겁니다. 짙은 군청색 새미 정장 차림의 교복을 입고 우르르 떼로 몰려다니며 같잖은 어른 흉내 내며 고향 동네 활보하던 청소년기 때나, 죽을똥 살똥 악바리 같은 강인함이 최고인 줄 알고 지내 온 특수부대 군인이었던 시절이나 말입니다.
그래도 이성에게 심장이 두근거리던 날이 왜 없었겠습니까마는 애써 외면하며 '남자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퍽이나 제 감정을 속이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못난 고백이지만 흔하다면 흔한 연애 한 번 못해본 저입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말입니다. 아내가 첫사랑이라 말할 수 있겠네요. 에이 설마 하는 분들 있으실까 봐 꾸역꾸역 기억을 뒤져봅니다만... 맞습니다. 지금의 아내가 첫사랑 맞습니다.
이 시에서 나오는 대로 하자면 그렇습니다. 우선 짚고 가자면 시의 제목에서 나오는 사랑과 물리학은 하등 저와 먼 단어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 시를 들고 나온 이유는 뒤이어 나오는 말 때문입니다.
제비꽃같이 조그맣고,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계집애...
나의 아내는 저에게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시커멓고 커다란, 거기에 여자라는 생명체와의 교감 따윈 평생 나눠 보지도 못한 27년 묵은 사내에게 어마어마한 질량으로 다가왔습니다. 질량이라는 표현을 살면서 얼마나 쓰겠습니까마는 암만 봐도 기가 막힌 비유가 아닐까 합니다.
깊은 산중에 홀로 박혀 있는 돌부처 같은 나에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고 말 걸기도 무섭게 하루 온종일 굳은 인상만 쓰고 있는 나에게 아내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질량을 머금고 나를 당겨버렸습니다. 절대로 여자에게 먼저 말 걸지 못할 것 같았던 나는 귀신에 홀린 듯 그렇게 사랑을 고백하고 맙니다.
'나랑 사귈래?'
지금도 잊을 수 없는 12월의 어느 눈 내리는 밤이었습니다. 딸랑 두 마디의 말을 휴대전화 문자에 옮겨 담아 벌벌 떨리는 엄지 손가락으로 전송했던 그날의 밤에 나는 결국 뉴턴의 사과처럼 쿵하고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꼴랑(?) 사귀자는 말 한마디, 그것도 휴대전화 문자로 보내 놓고 비 맞은 고양이 새끼마냥 부들부들 떨며 자기보다 6살이나 어린 여자의 답을 심장 졸이며 기다렸습니다.
1분이 지났는지, 2분이 지났는지 알 수도 없는데 혹여나 누가 볼까 휴대전화 화면을 내 방 책상 위에 뒤집어엎어 놓고 이제나 저제나 진동만 울리길 기다렸습니다. 세상 센 척 다하던 유디티 출신의 남자는 오간데 없고 괜한 짓 한 듯 머리만 버벅거리며 앉았다 섰다 안절부절못하는 촌놈 모습만 방 안 거울 속에 비쳤습니다.
싫으면 싫다고 하지 뭐 이리 시간을 끌지?라는 괜한 용심이 올라오던 차에 '그래'라는 짧은 대답의 글자가 휴대전화 알림음과 함께 도착합니다. 저는 다시 한번 아까보다 더 큰 질량에 빨려 들어갑니다. 쿵, 쿵쿵. 심장소리가 귀에 크게 들릴만큼 요동치더니 이내 난생처음 겪어보지 못했던 희열이 밀려옵니다. 그렇게 나의 고백을 받아 준 그녀에게로 한없이 굴러 떨어집니다. 좁은 내 방에서 방방 뛰며 중력의 힘을 그렇게 나마 즐겨보기도 했습니다만 여리디 여린 여인이 끌어 다니는 중력의 힘에 비하면 이 또한 가볍습니다.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맞습니다. 그날 밤 나의 심장은 롯데월드 롤러코스터보다 더 높게, 더 낮게, 더 격렬하게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그렇게 나에게 첫사랑이 왔습니다. 누가 볼까 봐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시골 촌놈 상남자에게 찾아온 첫사랑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헬스장에서 무거운 바벨의 중력을 들어재끼며 근육의 질량을 키우며 매일 이글거리던 남자는 제비꽃같이 하늘거리는 어린 여자가 가진 더 큰 질량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입니다.
이 시를 올봄, 어느 신문의 칼럼란에서 봤습니다. 길지 않은 시구를 한참을 바라보다 17년 전 그렇게 처음 시작했던 지금의 아내와의 사랑이 새삼 고마워 얼른 다른 곳에 옮겨 적었습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내의 입이 삐죽거립니다.
'그 시, '도깨비'에 나왔던 거 알아?'
이건 뭔 소립니까? 도깨비라니요? 귀신이 시를 읊을 일도 없을 텐데 전 어리둥절했습니다. 말인즉슨 도깨비라는 드라마에 나왔던 시라고 합니다. '허준'이후 드라마는 일절 보지 않는 내가 도깨비를 알리 만무합니다. 더 묻진 않았습니다만 이래저래 유명한 시구나라는 생각만 잠시 했습니다. 거기에 TV 드라마에 잘생기고 훤칠한 남자 배우가 읽었으면 폼나겠구나라는 생각에도 미쳤습니다.
이때쯤이었습니다. 시가 가진 말과 시가 가진 생각 그리고 시가 주는 감정이 어떤 것인 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니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십수 년 전에 있었던 그 심장 떨어지는 듯한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구나. 이렇게 시 속에, 드라마 속에 여태껏 공존하고 있구나 느끼니 나름 이런 시 찾아낸 내가 스스로 뿌듯합니다.
그렇게 적어 둔 시를 이곳에 옮깁니다. 여전히 시를 잘 모릅니다만 시 좋아하는 아내 덕에 집안 곳곳 놓여 있는 시집은 가끔 꺼내 듭니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시를 읽은 것도 어쩌면 여태껏 잘 살아내는 것도 그러고 보니 모두가 아내 덕입니다. 아니 아내의 힘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살다 보니 더욱 느끼고요. 남자가 가진 물리적 힘보다 가녀린 아내가 가진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 지 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가진 물리학을 이제야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