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무엇일까요. 누군가는 나를 단련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나를 사랑해서 주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반대도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분이 만든 지옥에서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고난을 말할 때 무언가의 원인과 결과를 떼어 놓지 않습니다. 고난이 원인일 수도,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원인인 고난은 영광의 꽁무니를 쫓습니다.
진실로, 고난과 영광은 여러 곳에서 닮은 표상으로 나타납니다. 가시 면류관과 월계관이 대표적입니다. 절망 뒤 희망도 있지요. ‘기대’라는 형상 사이에서 희비를 나눕니다.
이는 빛과 그림자로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거듭, 영광은 고난의 뒤에 붙습니다. 이 둘 사이를 매듭짓는 것, 그 이행을 우리는 극복이라 칭합니다. ‘변성’의 과정입니다.
저는 ‘변성’을 힘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조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영광은 인과로 연결되는 것일 뿐 성질이 연합되지 않습니다. 빛과 그림자가 서로 연결되지만, 직능을 보조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알파이자 오메가는 오직 그분입니다.
그러니 ‘영광된 고난’은 없습니다. 모든 고난은 아프고 슬픕니다. 고난 뒤 영광이 있을 뿐입니다. 이치에 어긋난 연합의 주장은, 아린 파열음을 낼 겁니다.
결과인 고난의 비애에 값싼 가격표가 붙는 슬픔도 주로 이에 말미암습니다. 혹자는 고난의 한가운데 있는 이웃에게 그의 슬픔을 영광의 재료로 삼으라 말하곤 합니다.
변성을 요구하는 채찍질입니다. 채찍질이라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으로 가는 변성을 결과인 고난 속에 있는 이에게 묻는 것은 폭력입니다.
고난에 대해, 우리를 사랑한다는 그분께서 주신 것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지옥불 속에 넣고 끝없이 주신다고까지 합니다. 어쩌면 그분은 원인인 고난과 결과인 고난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달라 호소하셨을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자애로우신 그분께서, 설마 진실로 우리를 지옥불에 넣어 영원히 고난을 겪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영광도 온전히 각자의 몫은 아닐 겁니다. 고난과 극복을 연합할 순 없어도, 연결의 끊어짐을 방치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고난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연대할 수 있습니다. 연대의 수평적 토대 위에 극복이라는 변성이 수직으로 연결되는 일을 우리는 이미 알지 않습니까. 이런 기적을 ‘진실된 공감‘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참된 영광은 머리 위에 얹어진 관이 아니라, 지친 이웃의 어깨에 얹은 손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