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Den Haag
나에게 네덜란드와 헤이그는 애증의 나라이자 도시였다. 그곳에 살 때는 네덜란드를, 헤이그를 조금 미워했다. 나의 순탄치 않았던 네덜란드 유학생활 때문에 생긴 피해의식 때문이다. 석사논문을 쓰면서 감내해야 했던 우울증과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살았던 몇 달간의 트라우마로 6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았던 이 나라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그리 좋지 못했다. 스키폴 공항에 도착해 헤이그로 내려오는 밤기차를 타고 오랜 친구의 집에서 잠을 청한 후 맞은 다음날 아침, 내 눈에 들어온 헤이그의 풍경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폭격과 방화로 파괴된 네덜란드의 도시 중 가장 조화롭게 현대 건축물들로 재건한 곳이 헤이그 일 것이다. 뭐 하나 허투루 지은 것 없는 건물들이 자아내는 리듬에 나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이 도시가 왜 그렇게 차갑고 따분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네덜란드에서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예술인 친구와 후배들을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10년 전 유학생활을 마치고 떠났던 네덜란드가 바로 어제 떠난 곳처럼 친숙해졌다. 비싼 물가 때문에 뭐 하나 사 먹기 쉽지 않은 곳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깔끔하게 정돈된 중심가를 걸으며 이야기하다 보니 새삼 이 나라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광장에서 잠시 한낮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적당한 속도로 걷는 사람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도시의 속도. 유학생의 신분이 아닌 여행자로 찾은 헤이그는 신중하고 말끔한 신사 같은 매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추억을 보정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살아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에 이번 여정의 시작을 헤이그로 결정한 것은 매우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네덜란드 6년의 유학생활동안 4년을 헤이그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이주민거주지인 게토(Ghettos)에서 살았었다. 폴 쿠루거란 (Paul Krugeraan)이라는 거리 이름을 가진 그 동네 인구의 대다수는 북아프리카 출신 무슬림들이 사는 곳이다. 아무래도 가난한 동네고 치안도 비교적 좋지 않은 곳이다 보니 나도 여러 문제들에 치여 살았다. 옆집에 살던 커플은 매일밤 서로 죽일듯이 싸웠고 간혹 내문을 두드리며 돈을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었다. 정말 난감한 순간들이였다. 가장 위험하고 끔찍한 기억은 밤늦게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불량배들에게 얻어맞고 부상을 입었던 순간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아찔한 순간이다. 하지만 이곳에 나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내가 헤이그에 가면 반드시 먹고 말리라 다짐했던 정말 맛있는 케밥집이 근처에 있다. 당시 내가 살았던 집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곳이라서 일주일에 3번 이상은 들려 이곳의 케밥을 사 먹었을 정도로 정말 좋아하는 식당이다. 특히 일반적 케밥과 다른 캅살롱케밥(KapsalonKebop)은 은박지그릇에 감자튀김을 깔고, 그 위에 양고기를 뿌리고, 치즈를 녹여 각종 토핑과 곁들여 먹는 케밥이다. 한국의 비빔밥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저렴한 가격에도 항상 풍성하게 한 그릇을 담아줬기에 네덜란드 유학시절에 나의 단골 저녁메뉴였다.
캅살롱은 터키어로 "미용실"을 의미하는 캅살롱과 케밥을 조합한 이름이다. 네덜란드 어떤 미용실에서 너무 바빴던 한 미용사가 급하게 점심을 때우기 위해 케밥을 이렇게 주문해 먹기 시작했던 것이 인기를 끌기 시작해 정식 메뉴가 되었고 이제는 네덜란드 케밥집 어딜 가든 캅살롱케밥을 팔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난 이 식당 사장님의 둘째아들과 꽤 친해져서 자주 대화를 나눴었다. 대화의 주제는 툭하면 유럽이나 미국과 대립하는 무슬림국가들의 정치상황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마초적이면서도 순한 친구였는데 내가 어느 날 그 동네를 떠나 이사를 간다고 이야기하니 나에게 영문판 코란을 선물로 건네며 꼭 읽어보라고 권하던 그 친구의 눈빛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기독교집안 출신의 나에게 그의 그 선한 눈빛은 교회사람들의 순수한 전도의도와 하나도 다를 수가 없었다. 어찌 이런 사람들이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지옥에 가야 한다는 것인지. 왜 신은 자신의 배에서 나온 서로 다른 종교를 이토록 용납할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인지. 난 그의 눈빛이 여전히 그렇게 빛나고 있는지 궁금해서 이 케밥집에 또 찾은 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그 식당에 보이지 않았고 막 성인이 된 그의 아이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맛도 그때 그대로였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에는 한국사람뿐만 아니라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정말 따가웠다고 한다. 어떤 선배는 길을 걷다가 "코로나 코로나! 꺼져!"라는 욕설도 들었고, 친한 후배는 트램만 타도 느껴지는 불편한 시선들에 마음앓이를 했단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도 네덜란드 유학시절 잘 드러나지 않게 경험하게 되는 인종차별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다. 이민자 출신의 아이들이 무례하게 "니하오, 니하오"라고 경멸의 인사를 건네는 것은 그저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학교 내에서, 공공기관에서, 학우들에게서 경험하는 드러나지 않는 인종차별은 내 속에서 스펀지처럼 흡수되고 누적되어 알 수 없는 적개심과 분노를 느끼게 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참 예민한 사람이었고, 적개심과 분노에 나를 내맡겨 버리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후회를 유학생활 뒤에도 오랫동안 하고 있다. 몰지각한 개개인은 네덜란드 사회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을 것이고 네덜란드 사회 시스템에서 유학생은 이방인 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온 이 국제적인 도시에서 그들을 다시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니 참 대단한 포용력을 갖춘 사람들이 사는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총 2000만명이 좀 안되는 네덜란드의 전체인구 중 국적별 이주민 인구합산이 약 100만 명에 달하고, 이중 대다수가 사회구성원으로 함께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물론 그 속으로 들어가 보면 심층적이고 구조적인 사회적 문제가 산재해 있겠지만 이토록 이주민들을 빨리 포용하고 사회 안으로 받아들이는 시스템을 갖춘 나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수도권에서 100만 명 정도의 외국인과 함께 살아가는 한국을 상상하면 우린 어떤 것을 떠올릴까? 게다가 외국인의 절반 이상이 무슬림국가에 아프리카 사람들이라고 하면. 언젠가 다가올 미래지만 아직도 한국은 시스템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들이 엄청나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수준 낮은 인종적 편견은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 나에게 네덜란드를 떠나 살던 10여 년의 세월을 통해 경험한 한국의 오늘과 이 여행을 통해 다시 경험하는 네덜란드의 오늘이 다시금 내가 어떤 나라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에게 앞으로 닥칠 사회적 문제는 어떤 것 일지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 건물은 이제 시내 중심가에 새 건물을 짓고 이전했다. 그 전에 쓰던 건물은 어찌 되었는지 후배에게 물어봤더니 우크라이나 출신 예술가 난민들의 캠프로 활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뉴스 검색을 해보니 위와 같은 사진을 몇 장 찾을 수 있었다. 난민들을 대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진정성 있는 대처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난 참 속이 좁았고 어렸었다. 네덜란드는 유학생활의 학교와 삶의 공간을 제공한 나라였지만 나는 그 속을 제대로 걸어 들어가 보려 하지 않았다. 내가 실망할 것들만 쳐다보고 진실이라고 믿는 토라진 아이처럼 굴었었다. 이번 네덜란드 추억보정여행은 어떤 응어리가 해소되는, 나에게는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어리석었던 과거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나에겐 다음의 여행지가 있고 새로운 내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여행을 다녀와서 들었던 슬픈 소식..
Rest in Peace. Tilmar Junius.
Rest in Peace. David B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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