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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Aug 22. 2023

중년소년의 잠깐 트레블로그

7. Puenta La Reina - Torress Del Rio 

DAY 5. Puenta La Reina - Estella 


어느새 순례길 동료들과 많이 친해졌다. 며칠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가까워졌다. 어젯밤 이태리 친구 페페는 자발적으로 나서서 순례길 친구들에게 까르보나라를 요리해 대접했다. 한 15명 정도 함께 식사를 했을까. 같이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돈을 나누어 내는 것은 경제적이지만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친절한 누군가에게 일이 몰릴 수 있다. 하지만 페페는 그런 수고를 전혀 마다하지 않는 친구였다.  

에스텔라로 향하는 길가에는 포도밭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산지인 리오하(Rioja) 지방에 접어든 것이다. 나는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나무를 이전에 본 적이 없어서 생각보다 작은 나무의 크기에 놀랐다. 아직 3월이라서 나무가 덜 자란 탓도 있을 것 같았지만 우리나라 하우스에서 덩굴처럼 자라는 포도나무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리오하 지방의 와인은 해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스페인 와인이라고 한다. 내가 보통 마셨던 스페인와인은 템프라니요(Tempranilo) 품종의 메이드인 스페인이라고 라벨링된 저렴한 와인이 대부분 이라서 스페인의 와인산지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었다. 이왕 와인산지를 걷게된참에 리오하 와인을 실컷 마셔볼 작정이었다. 보통 한국 이마트에서 3~4만 원은 줘야 먹을만한 스페인산 와인이 이곳에선 7~8천 원 정도면 구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길에서 마주치는 오래된 건축물들에 주로 사용된 돌들의 색깔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차가운 회색빛이 아닌 스페인 북부의 붉고 어두운 흙이 배어있는 따듯한 색깔이다.이 색감이 순례길 사이사이 마주치는 마을의 정겨움을 한결 배가 시키는 것 같았다. 흙과 돌, 집과 마을, 그리고 사람과 술이 한데 어우러지는 고요하고 정겨운 순간들이 벌써 그립다. 


DAY 6. Estella - Torress Del Rio 

 이날 역시 새벽 5시경에 일어나 해가 떠오르기 전 길을 나섰다. 어두컴컴한 길이 조금씩 밝아올 즈음에 앞서 걷던 사람들이 수도꼭지를 틀면 와인이 나온다는 명소 앞에서 모여있었다. "와인이 안 나오는데..", "왜?? 너무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 건가?" 와인이 나온다고 쓰여있는 수도꼭지를 돌려보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서 조금 허탈했다. 알고 보니 나중에 여유있게 출발한 사람들은 이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고 했다. 살짝 억울하긴 했지만 공짜 와인을 맛본다는 사실 이외에 아침부터 취해봐야 좋을 일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금세 잊어버렸다. 

뭐.. 뭐지

이날은 코스초반에 넘어야 하는 언덕을 제외하면 완만한 내리막 경사와 비포장된 흙길을 걷는 코스가 대부분이었다. 언덕 너머 정갈하게 포개진 산위로 햇살이 따듯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순례길 두번째날 내렸던 가랑비 외엔 날씨가 계속 좋았다. 스페인 3월은 우리나라 보다 일교차가 더 크고 건조한 날씨가 이어진다. 아침은 춥지만 해가 들기 시작하면 금새 더워져 반팔티만 입어도 충분했다. 등에 땀이 한 방울씩 흐르기 시작하면 걸음에 더 집중하게 되고 어느새 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가 걷는 길 맞은편 저 멀리 거대한 메세타 고원지대가 보였다.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며칠 후 우리는 평균 해발 600미터 이상의 고원지대를 지나게 된다. 길 양옆으로는 본격적으로 와인농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대지 사이 완만하고 양지바른 곳은 어김없이 와인농장의 차지였다. 경사면을 지나 평탄한 길로 접어드니 그야말로 압도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순례길 모든 코스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으로 기억한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에서 평탄한 길에 이르기까지 눈이 닿는 모든 곳이 아름다웠다.  

새삼 스페인의 광활한 영토가 부러웠다. 한국에서 임야지대를 이렇게 내버려 둘 수 있을까? 사람의 손이 닿는지 안 닿는지 알 수 없는 이 넓은 땅덩어리에 골프장 같은 인공시설 하나 없이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것이 놀라웠다. 이 길을 걷는 내내 여기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이 모든 것이 감사한 순간이었다. 이 여행이 내 인생을 바꿀 수 도 있고 그렇지 않아도 괜찮지만 적어도 이 짧은 인생에 멋진 점 하나를 찍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이런 멋진 점들을 더 많이 찍고 싶어졌다. 그렇게 찍힌 멋진 점들이 이어가는 선들은 좀 더 아름다워 보일 것 같았다.  

나. 크리스토퍼, 페페 그리고 Photo by Jinseo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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