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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Aug 24. 2023

중년소년의 잠깐 트레블로그

9. Nájera - Belorado




순례길 DAY 9.  Nájera - Santo Domingo De La Calzada

사람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강물은 어디에 있든 언제나 같은 물이다. 다만 어떤 곳은 좁고 물살이 빠르고 어떤 곳은 넓고 물살이 느리며 어떤 곳은 맑고 어떤 곳은 흐리며 어떤 곳은 차갑고 또 어떤 곳은 따듯하기도 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인간의 모든 특성을 맹아처럼 품고 있어서 어떤 때는 이런 특성이 어떤 때는 저런 특성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라도 본디 모습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고 몇몇 사람들은 이런 변화가 아주 급격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네흘류도프도 이런 유형이었다. 그의 급격한 변화는 육체적인 이유에서 비롯되기도 했고, 정신적인 이유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그러한 변화가 지금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레프 톨스토이 '부활' 중 


나는 걸으면서 오디오북이나 팟캐스트 듣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특히 제주에서 올레길을 걸으며 김영하작가의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이라는 팟캐스트를 자주 들었다. 그리고 문학동네 채널 1에서 만든 문학이야기라는 팟캐스트도 오디오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좋은 콘텐츠다.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는 아마 저작권 문제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그래서 이번 순례길을 준비하면서 문학이야기 팟캐스트와 오디오북 어플에서 오디오북 몇 권과 아이패드용 이북을 몇 권 정도 다운로드하여 두었다. 문학동네 팟캐스트는 그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안타깝다. 지금은 대중에게도 어느정도 잘 알려진 문학평론가가 된 신형철 씨와 권희철 씨가 연이어 진행한 이 팟캐스트는 문학평론에 대한 평론가들의 고찰이라던지 문학에 대한 재밌는 단상,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집 낭독 등 다양한 콘텐츠들이 담겨있다. 특히 권희철 평론가의 소년 같은 맑은 목소리로 침착하고 정성스레 읽어주는 낭독 콘텐츠는 이 팟캐스트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오디오북을 들으며 길을 걸으면 느끼게 되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첫 번째는 그 길의 이미지와 책의 내용이 겹쳐서 기억난다는 것이다. 올레길 10번 코스를 떠올리면 김영하 작가가 읽어준 소설의 내용과 풍경들이 함께 떠오르는 식이다. 그래서 걸었던 길에 스토리가 하나 더 덧입혀져 다층적인 기억으로 길을 떠올리게 된다. 또 다른 좋은 점으로는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오디오북은 잠시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귀에서 이야기들이 흩어져 버리기 일쑤다. 걸으면서 듣는 오디오북도 마찬가지다. 정신을 오디오에만 집중하긴 힘들다. 아름다운 풍경이 지나가기도 하고 자연의 소리들이 들려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낭독자의 목소리가 귀에 쑥 들어와 길 위에 다시 펼쳐질 때 나는 잠시 현실을 완전히 잊고 그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갖게 된다. 특히 김영하 작가가 낭독한 박완서 작가의 글과 작가의 목소리, 그날의 풍경, 내가 걸었던 길이 생생히 기억난다.

이날 나는 오디오북보다는 문학이야기 팟캐스트에서 신경 쓰지 못하고 들었던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다시 들으며 걸었다. 권희철 평론가가 해석해 주는 톨스토이의 부활의 내용 중 위의 저 한 단락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사람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는 것. 우리는 물 같은 존재로써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진 인간이 되기도 한다는 것. 


순례길을 걸으며 나는 어떤 특성을 가진 존재로 변해가고 있는 건가?  순례길의 환경이란 건 어떤 것인가? 나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어서 순례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길은 멀고 몸은 힘드니 순례길을 걸으면서 깊은 명상에 생각의 끈을 드리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길을 묵묵히 잘 걷고 있는 내 몸과 마음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긍정적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는 것.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인식하는 관점의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순례길 DAY 10.  Santo Domingo De La Calzada - Belorado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이 날 나는 걸으면서 문학이야기 팟캐스트 중 권희철 평론가가 소개하는 권여선 작가의 '봄밤' 편을 들었다.  

봄밤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중년연인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여자는 중증 알코올 중독자, 남자는 중증 류머티즘을 앓고 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병세에 둘은 요양원에 입원해 있다. 둘은 서로의 아픔에 공감해 사랑에 빠졌고, 서로 사랑하기에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인정했다. 이혼을 당하고 아들을 빼앗긴 여자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고 그저 먹고살기 위해 아픈 몸을 돌보지 못하고 살아온 남자가 우연히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지고, 요양원에서 서로를 끔찍이 위하다 남자는 죽고, 여자는 알콜성치매에 걸려 사랑했던 남자도 잊고 자기 자신마저 잊어버리게 되는 슬픈 이야기다. 

비극적이고 다소 처참하기까지 한 이 사랑 이야기가 길 위의 나를 잠시 한국으로, 과거로 데려다 놓았다. 그동안 꾸준히 실패해 온 내 사랑들의 역사들이 떠올랐다. 작년 이맘때 헤어졌던 그녀도 생각났다. 아마 난 그녀와의 작별로 인해 더더욱 이곳에 오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어느새 사랑이란 걸 믿지 않게 되어버린 나에게도 저 연인들처럼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찾아올까? 나의 장점이 나의 단점보다 더 크다고 생각해 줄 사람이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봄밤 같은 날이 찾아오면 난 서두르지 않고, 인생의 짐을 좀 내려놓고 이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다시 사랑을 조금씩 긍정하게 되었다. 실패의 역사들을 들춰보면 여전히 자괴감이 들고 힘들고 미안한 마음이지만 그런 나를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밤, 같이 걷던 동료 중 이태리 친구 마르코가 생일을 맞았다. 우리는 마르코를 위해 요리를 하고 롤링페이퍼를 준비했다. 나는 김수영작가의 봄밤을 이태리어로 번역해 롤링페이퍼에 적었다. 왠지 오늘밤의 우리 가봄밤의 주인공 같았다. 우리 모두 한동안은 효율과 속도의 삶에서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삶의 무게를 조금은 내려놓고, 절제된 하루의 단순한 일상에서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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