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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니 Nov 02. 2020

결혼, 청춘의 장례식



살다가 문득, 내가 왜 이런 걸 떠안았을까 싶은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억울하기도 하고 나만 희생하는 것 같고. 내가 이런 걸 왜 했을까 복잡하게 생각하다 보면 결국 답도 없는 갑갑한 나를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결혼은 역시 아주 어마어마한 일이었다며 내 청춘의 끝자락을 떠올리겠지. 복잡한 양면성을 가져 나를 이도 저도 못하게 한다 탓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꾸역꾸역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잠시 무게들 옆으로 치워두고 가볍게 다시 길을 나설 거다.






좋으면 계속 만나는 거고 아니면 헤어지는 거야.

25년간의 끈질긴 인연과 7년여의 연애를 끝으로 서른여섯, 청춘을 훨씬 넘어선 한 트럭 나이에 새하얀 신부가 되었다.


나는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그렇다고 현실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런 말들에 어느 쪽이든 무감했다. 결혼은 때가 되었을 때 조금만 힘을 주면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했고, 미래에 거쳐가야 하는 일 중 그저 하나라고 생각했다.


설득할 수만 있다면 나는 결혼식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요즘은 스몰 웨딩으로 하기도 하지만 그것조차도 안 하면 안 될까 싶었다. 한다면 둘이 서약하고 반지 나눠갖고 끝. 아니면 가족들과 상견례보다 더 거한 집에서 식사하고 사진 박고 끝. 그랬으면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좀 불가능하다는 걸 납득한다. 의견 낼 엄두조차 안 났다. 스쳐갔던 봉투와 축하 속에 꼬리 자르기가 되지 않는 개미지옥, 나도 남들 다 하듯 있는 그대로 절차를 진행했다.


우리 결혼식이 뭐라고 500명 넘는 사람들이 움직인다. 고작 두 몸뚱이 같이 살자고 큰 자본이 나갔다 들어왔다. 송구하고 무거운 마음이 불편했다.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한 번의 결혼식을 위해 온 세상이 움직이는 듯했다. 나에게는 딱 그만큼의 무게였다.


내게 이런 잔치가 꼭 필요하지 않던 이유는, 누군가에게 '우리 잘 살게요'보다 '우리 잘 살자'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왕 하는 거 즐겁게 하자 해서 부르고 싶던 사람들 죄다 불렀다. 작게 켜 둔 송구한 불 탁 꺼버리고, 대놓고 식을 즐겼다. 조금만 더 신났으면 춤까지 췄을지도 모르겠다. 거짓말로 조신한 척, 나는 그런 거 못 한다. 민망함 꾸깃꾸깃 넣어두고 그냥 나답게, 씩씩하고 웃음 헤픈 천방지축 신부로 끝이 났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 결혼식과 나 사이에 괴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화려함과 축하 속에서 무엇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은 30분이면 끝난다는 걸 바로 실감했다. 분명 내 인생에 엄청나게 큰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나의 일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그대로였다. 더 이상은 그때의 내가 내가 아닌 기분. 아주 높은 하이힐을 오랫동안 신고 있다 벗었더니, 그렇게도 평범한 본래의 내가 보이는 당황스러운 현실감. 12시가 되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처럼, 나도 모르게 구두 한 짝 잃어버리고 어느새 방구석으로 돌아와 있었다.


화려한 축하 속에 정신없이 놓고 왔던 구두는 내게 있어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맹세하던 순간 작별한 나의 청춘이라 말할 수 있겠다. 대학원 강의에서 들었던 청춘의 장례식이라는 말이 나를 쓱 잡아두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더욱 나를 일렁이게 만드는 말이다. 대략적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까지를 청춘이라고 부르지만, 사람마다 각자가 생각하는 청춘의 나이가 있다. 아마 나의 청춘이 끝나던 시점은 결혼식을 하던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이후 나의 상태는 변했다. 삶도 변해가는 중이다. 그리고 예전과 같이 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예전이라는 것을 정의하기는 어렵겠지만, 나는 그것을 청춘이라고 불러야겠다.


모든 것이 새롭고 처음인 채로 어서 빨리 어른이 되려 애썼던 나의 청춘.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따뜻했지만 치열했고, 자유롭지만 상처투성이였던 나의 청춘. 다시는 오지 않을 그리고 다시는 마음껏 무모하고 철없이 살아가지는 못할 그런 나의 푸르르고 푸르렀던 봄. 가시적으로는 화려한 결혼식으로 여름의 시작을 알렸고, 비가시적으로는 나의 봄과 작별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막 여름이 시작된 찰나에 서 있다.


부모님의 그늘 속에서 몇 발짝 걸어 나오니, 아주 뜨거운 뙤약볕이 내 머리를 익히는 중이다. 나의 뿌리가 그대로인 채로 그 뿌리가 옮겨진 기묘한 현상과 마주했고, 이제는 나만의 것이 아닌 나의 시간을 조절하게 됐다. 사랑하는 한 사람과 결혼을 했지만,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나에게 온 어마 무시한 무게를 받아들이며 탁탁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런 것이 서럽거나 억울하지는 않다. 내가 선택했고 결국 신랑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결혼을 하면서 나에게 찾아온 것이 보이지 않는 이동의 변화라면, 신랑에게 찾아간 것은 보이지 않는 무게라고 생각한다. 무거울 것이고 이동이 쉽지는 않을 거다. 우리는 이제 불같은 태양과 쏟아지는 장마를 지나 사막과도 같은 대지를 걸어 나가야 한다. 다행히 여름에 태어난 신랑과 겨울에 태어난 내가 서로를 식혀주고 녹여줄 수 있다 작게나마 안도하며, 여름 안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만의 유일한, 청춘의 다른 말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언젠가 다가올 가을도 겨울도 모두 건강하게 맞이하기를.


나의 청춘은 끝났지만 다시, 끝나지 않았다.


살다가 문득, 내가 왜 이런 걸 떠안았을까 싶은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억울하기도 하고 나만 희생하는 것 같고. 내가 이런 걸 왜 했을까 복잡하게 생각하다 보면 결국 답도 없는 갑갑한 나를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결혼은 역시 아주 어마어마한 일이었다며 내 청춘의 끝자락을 떠올리겠지. 복잡한 양면성을 가져 나를 이도 저도 못하게 한다 탓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꾸역꾸역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잠시 무게들 옆으로 치워두고 가볍게 다시 길을 나설 거다. 돌아보지 않기로 했고, 끝없이 가야 하는 길에 무게를 옮겨 두기로 했다. 조금 더 단단한 마음을 잡아, 더없이 평범하게 내가 살아갈 계절을 향해가야지. 그러다 마주하게 되는 청춘을 보더라도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한다. 나에게 아마도 그런 것이니까 결혼은.






이 글을 다시 발행한 사연)


흔히들 결혼 전과 후로 삶이 바뀐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에게만 평범했던 제 삶이, 버진 로드 끝에 달랑달랑 매달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에 안착했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됐어요.


이제 겨우 결혼을 하고 2년이 되어갑니다. 너무나 많은 일이 한꺼번에 스쳐갔고, 그 시기를 잘 보내왔지만,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무게감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어쩌면 결혼식을 올렸던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변곡점에 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의 변곡점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몰라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요. 그런 지금을 단단하게 또 고스란히 남기고 싶어 결혼에 대한 글을 재발행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선두에 두고, 이후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내 보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이 글들을 눈으로 담게 될 어느 날, 지금의 기록들이 그때의 삶에 맑은 정화수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혼이 어느 곳에 정착하게 될지 무척 궁금한 어느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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