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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니 Nov 05. 2020

목에 탁 걸린 상실의 시대

그녀를 애도하며



햇살 따듯한 평범한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차를 몰았고, 여느 때처럼 수업이 끝난 직후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었다. 자동세차를 한 찰나에 줄기차게 번쩍이는 핸드폰이 나를 흔들어 놓는 줄도 모르고, 반갑게 화면을 마주 보았다. 전화 온 제자에게서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흐느끼는 소리에 세상이 흔들렸고, 귀에서는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나의 분신들. 중학교 2학년 아직 앳된, 그러나 성숙하려 애쓰던 파릇파릇한 아이들이 나에게 첫 제자라는 기쁨과 특별한 향수를 안겨주었다. 나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해준 아이들. 나의 결혼식을 위해 3시간 반을 달려 공연을 준비해와 준 7명의 아이들. 꼬깃꼬깃한 3만 원을 축의금이라며 금손으로 넣어준 아이들. 나를 위해 장미 한 송이 한 송이에 예쁜 말을 담아 손글씨를 전해주던 아이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아이를 낳아본 적은 없지만, 내 아이가 있다면 이렇게 소중하겠다 싶었다. 내게 그런 아이들이었다. 21살 성인이 된 나의 제자들은.



결혼을 하고 두 달쯤 지났을 때였다. 엄마에게서 들려온 소식은 정말 믿기 어려웠다. 나의 결혼식을 건강하게 바라보시던 큰 이모부님의 부고. 누구도 알 수 없던 마지막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통 속에서 힘겨워할 가족들에게 그런 모습을 최대한 보이지 않고, 편안하게 주무셨다는 것 정도. 행복한 결혼식 뒤로 신랑과 나에게 찾아온 첫 큰일이었다. 그리고 시작에 불과했다.



나의 결혼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러니했던 시간들. 그로부터 한 달 뒤 나는 다시 한번 우걱우걱 검은 옷을 찾아 몸을 구겨 넣었다. 이번에는 좀 더 많이 견디기 힘들었다. 나에게 다시없을 제자의 소식을 받아들이기에 내가 아직 준비 안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아픔이었다. 슬픔을 넘어선 감정들이 흘러넘치고 넘쳐, 내 감정을 어찌하지 못해 허우적거렸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한지, 한동안 정신없이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날의 감정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요 며칠, 연일 터지는 기사들에 혹여나 나처럼 동요하고 있지는 않을지. 그렇다고 이런 때에 아이들에게 잘 지내느냐 묻지도 못하는 나는 아직 겁쟁이 선생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또 몇 달이 지났다. 개천절의 평범한 아침. 나는 아직 침대에 누워있다. 무음인 내 휴대전화 대신에 신랑 핸드폰으로 외할머니의 부고가 들려왔다. 우리 할머니의 취미는 자식들을 걱정하는 것이고, 특기는 자식들 걱정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을까. 나는 장례식을 마치고서도 할머니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도 서랍 속 보물처럼 잘 간직해두었다. 갈 때마다 잘 살라던 할머니의 염원이 내 결혼생활을 단단하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내 걱정에 말씀을 이어가시던 할머니의 영상이 고스란히 친척동생에게 남아 있었다. 영상 속 할머니를 보고 하염없이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죽음 앞에서 나는 철저하게 무력했다.



엄마의 엄마. 나의 엄마와 같은 엄마. 할머니는 내게 어린 시절,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한 사람이었고, 평생 내게 나무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할머니를 다시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다는 생각에 공연 연습 중에도 왈칵 터지는 울음을 참아내기 어려웠다. 어떻게 마무리하며 공연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그저 알아서 지나가 주었다.



그래도 건강했다. 우리 할머니는 오래 사셨으니까. 그것이 나의 아프고 슬픈 마음을 뚝 하고 그치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위로는 됐다. 그저 나에게 죽음은 아주 먼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내가 평생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면, 소중한 사람들의 부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무서웠던 것 같다. 실감할 수 없는 실감이었다.



다시, 전화를 받은 그 주유소에서 제자의 울음 뒤로 나의 울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제자와 이렇게 터놓고 울어도 되는지, 부끄럽지 않은지, 어른인 나까지 이래도 되는지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터지는 울음을 막을 방법 같은 건 내게는 없었다. 그날 나는 주유소 그 자리에 잠시 나를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더 살아보지. 죽을힘으로 살지.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제자를 보낼 때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남은 자들의 바람이라는 걸. 이제 막 봄이었던 아이가 계절을 다 살아내 보지도 못하고 그 봄을 마무리했다. 그것으로 나는 할머니 때와는 또 다른 아이의 흔적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보면 분명 길을 만나고 빛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건 나의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그 말만 되뇌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었을까, 알아차릴 수는 없었던 걸까 자책도 해봤다. 오히려 햇살이 따뜻한 날이면 눈물이 더 쏟아졌고, 횡단보도에 서있는 눈부신 아이들을 보면 가슴을 쥐고 펑펑 울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왜 그랬을까. 그러지 말지. 이후로는 원망할 자격도 안되면서 원망도 해봤다. 왜 이런 아픔을 주는지, 왜 이런 슬픔을 우리들에게 남겼는지.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처음부터 제자를 이해해야 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정처 없이 떠돌다 우연히 글 하나를 보게 됐다.



아주 높은 빌딩에 큰 불이 났다. 꼭대기에 갇힌 한 사람이 구조되지 못한 채, 숨을 막는 연기와 덮치는 불길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시뻘건 화염 속에서 떨어지면 죽을지도 모르는 창문을 깨고 결국 뛰어내린다. 그런 심정인 거라고 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은. 괴로움에 발버둥 치다 결국 맑은 숨 한 번을 위해, 그 괴로움을 벗어날 선택을 한다. 쾅하는 굉음이 머리와 심장을 울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제자가 그 순간의 기로에서 갈망했던 것은, 사실 숨 한 번의 삶이었다는 것을. 더 이상 이 아이의 봄을 나무랄 수 없었다. 안타까움을 넘어선 슬픔과 아픔이, 뒤틀린 감정으로 붙잡고 있던 아이를 더 이상 붙잡고 있지 말자고 했다. 널 잊지 않겠다는 국화도, 편히 쉬길 바란다는 인사도 그제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내 손을 붙잡고 한참을 눈물 흘리시던 이모님의 뜨겁던 손이 아직도 생생하다. 언니와 조카를 한 번에 잃은 슬픔을 감히, 잠시 알아차렸다.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을 만큼 호수같이 깊고 처연한 눈이었다.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아이들을 다독이는 건 내 몫이라고. 내가 그 역할을 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거라 이유를 들여 책임감을 단단히 세웠다.



장례식장에서도 웃다 울다 수다를 떨던 우리들. 우리가 너무 울면 좋아하지 않을 거라 다독이며 일상으로 잘 돌아가자고 말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어른스러웠다. 대견했고, 감사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일상으로 잘 돌아가라 말해놓고, 정작 떨리는 다리로 쭈뼛거리며 돌아가지 못하고 있던 것은 나였다. 멈춰버린 시간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다시 재깍재깍 돌아가게 만든 것은 신랑이었다.



결혼을 하자마자 너무 짧은 기간에 마음 추스르기 바빴던 한 해를 보냈다. 결혼을 하며 깨 볶는 신혼을 기대했고, 미래를 기약하며 개인이던 삶을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이어놓았다. 그렇게 시작한 결혼이 내게는 죽음을 더 가까이에 둔 첫 해가 되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한 채로 무겁고 딱딱해 가지 않을 것만 같던 한 해가, 불빛 하나 없이 저물었다. 그곳에 우리가 함께 했다. 가끔은 마음에 차지 않는 차갑고 냉정한 방법이더라도 결국 나를 꺼내어 준다. 좀 더 따뜻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결국 내 옆에서 나를 기다려준 것도, 나를 다독여준 것도, 다그치며 현재로 보내준 것도, 장례식장에서 많은 일들을 고생스럽게 자처하며 해낸 것도 모두 신랑이었다. 마음은 힘들었지만 결혼이 나에게 가져다준 의리이자 선물이었다.



장례를 치르는 유족들은 기운 하나 없는 장례식장에서 음식을 먹고 이야기하는 조문객들을 보며 에너지를 얻는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시끌벅적한 그들의 에너지에 스며 자연스레 다시 살아가게 되는 거라고. 우리가 조문을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을 살자고. 우리가 같이 가는 곳에 미래가 있으니,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현재를 살자고. 그렇게 신랑에게 받은 위로로 아이들과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직도 삶과 죽음을 떠올리면 스무 살 어느쯤, 나를 장악하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떠오른다. 모두는 사실, 죽음을 향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했고, 마지막 장을 넘기며 처절하게 묻어있던 공허함과 고독이, 공터 같던 페이지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던 책이었다. 죽음에 대해 진실되게 생각했고, 실체 없는 실체를 들여다봤다. 그런 책이 이런 순간들에 문득문득 떠오른다. 외롭고 쓸쓸해도 살아가 보자고.



더 나은 방법은 모르겠다. 나는 겪을 때마다 이렇게 온 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많이 울고, 많이 슬퍼할 것이다. 그만큼 더없을 마음을 다해 보내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니 내게는 이게 최선이다.



극과 극, 우리 삶의 반대편에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일부로 살아가고 있다는 상실의 시대 끝에서, 또다시 나의 바람들을 차곡히 쌓아본다.



오늘도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나를 스쳐간 많은 사람들이 안녕했으면 한다. 이런 나의 시간은 지나왔지만, 현재 나보다 더 무너져 내리고 있을 많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곧, 안녕하기를 바란다. 오늘 또 내일 또 오는 오늘을 매일 주문처럼, 잊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기를 온 마음으로 바라본다.




이 글과 함께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누군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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