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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니 Jul 19. 2020

낯가리는 주인공

관객이 무서운 무용수



마침 클라이맥스로 가는 찰나였다. 관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장면. 약 10초 정도의 시간이었을까. 누가 갑자기 불을 탁 켠 것 같았다. 내가 만들어 둔 거대하고 투명한 막이 사라졌다. 관객들 얼굴이 하나하나 잡히면서 나를 보고 있는 눈들에 순간, 이겨내지 못할 낯가림을 느꼈다. 관객들 눈이 독수리, 부엉이, 고양이, 호랑이쯤으로 보였다. 솔로였으니 도와줄 동료 무용수도 없었다. 그런데 딱 현실로 돌아와 버린 거다.






똑똑, 훅 하고 준비 없이 사춘기 낯가림이 시작됐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생각처럼 몸이 움직여주지 않고 마음처럼 살가워지지가 않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누군가의 뒤로 슬쩍 한발 물러섰다. 남자 친구가 있어도 손도 못 잡았다. 친해지고 편해져야 하는데 낯가리느라 눈 마주치고 있는 것도 어려웠다. 지금 생각하면 좀 아쉽다.


낯가리는 사춘기는 음식에도 적용됐다. 기름 냄새. 귀하던 올리브유 냄새가 유독 싫어 내 음식에만 식용유를 사용했다. 지금은 면치기 하며 대접에 먹는 잡채도 한동안 보기 싫었고, 없어서 못 먹던 짜장면이 역하게 올라와 중국집은 쳐다도 안 봤다. 아마 중국집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겠지만.  


가장 큰 낯가림은 아마도 '아빠'였을 거란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때까지 편하고 좋기만 하던 아빠 품이 낯설었다. 있는 소리 없는 소리 쥐어짜 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아빠가 많이 상처 받았겠지. 크고 나니 좀 미안하다. 그래도 곰 보다 더 무디신 아빠가 내 아빠라 이럴 땐 참 다행이다.  


낯가림이란 게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왔다가 훅 가버렸다. 사람들을 가르치며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오지랖 넓은 아줌마 선생이 되었다. 먼저 말도 걸고 참견도 하고. 사춘기 때를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때의 내가 놀란 게 느껴진다.


그런 내가 딱 한 군데 낯가리는 곳이 남았다


참 아이러니하지만, 그 한 곳이 무대다.

연극이나 뮤지컬에는 배우마다 배역이 있다. 그러나 현대무용(컨템러리 댄스) 작품에서는 드라마 같은 스토리가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굳이 배역으로 역할을 설명하지 않는다. 안무자들 마음속에는 점찍어둔 주인공이 암암리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무용수 하나하나가 춤으로써, 장면으로써 존재감이 설명된다. 누구나 존재감을 움직임으로 말하는 주인공이 되는 거다. 그리고 자신만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꼭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나도 매번 작품 속에서 어엿한 주인공이었다.


그런 역할을 부여받고 선 무대는 참 이상한 곳이다. 공연이 시작되면,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무대와 관객 사이에 생긴다. 물론 나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지금까지 연습해온 것들에 집중해 춤을 춘다. 같이 추는 무용수가 있다면 서로의 에너지를 느끼고, 무대에 대한 부담감을 나눠 갖는다. 솔로라면 오로지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이 되는 거다.


무대에서 딱 한 번 나는 관객들에게 내가 낯을 가린다고 느꼈다. 이 낯가림은 매우 어이없고 신기했던 경험으로 남았다.


마침 클라이맥스로 가는 찰나였다. 관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장면. 약 10초 정도의 시간이었을까. 누가 갑자기 불을 탁 켠 것 같았다. 내가 만들어 둔 거대하고 투명한 막이 사라졌다. 관객들 얼굴이 하나하나 잡히면서 나를 보고 있는 눈들에 순간, 이겨내지 못할 낯가림을 느꼈다. 관객들 눈이 독수리, 부엉이, 고양이, 호랑이쯤으로 보였다. 솔로였으니 도와줄 동료 무용수도 없었다. 그런데 딱 현실로 돌아와 버린 거다.


가끔 노래방에서 신나게 춤추고 노래 부르는데 누군가 실수로 음악을 탁 꺼버린 순간이라거나, 어두운 분위기에 도취돼 목 터져라 열창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마이크가 안 나오고 있었다거나. 뭔가 창피한 일을 혼자 했는데 사실은 모두가 보고 있었단 느낌, 그런 눈동자들과 마주한 순간. 그때의 화끈거림. 나에서 갑자기 우리가 되는 묘한 광경. 관객들과의 눈싸움에서 진 듯 꼬리 내린 것 같은 얼추 비슷한 분위기.


연습실에서 수없이 연습했지만 한 번도 이런 순간을 마주할 거라고 예상해본 적 없었다. 상상도 못 해봤다. 그러니 더 당황스러웠다.


당황에 빠진 내 몸이  슬금슬금 움직였다. 원래 움직였어야 하는 것처럼 관객들을 속이고, 모르는 척 고요하게 움직였다. 쿵쾅대던 가슴을 애써 무시하고 나도 모르게 춤으로 내 낯가림을 덮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참 아찔하고 웃프다. 실수 아닌 실수를 했지만, 관객들이 잠시나마 무서웠다.      


관객들은 내 적이 아닌데. 


어쩌면 너무 많은 생각을 가지고 무대에 올라갔던 게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내 작품을 어떻게 생각할지, 내가 추는 춤을 보고 어떤 반응을 할지. 저거 저거 무용돼지 아닌가 흉보진 않을지. 내 작품이 누군가에게 흥미를 주기는 할지, 그런 나를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처음 보는 이 사람들이 나를 꿰뚫어 보면 어쩌나. 분명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그보다 더 나를 봐버리면 어쩌지. 그런 겁을 집어 먹고 무대에 올랐던 것 같다.


사춘기를 맞이했을 때에도 신체적 변화가 컸겠지만, 나에게는 신체만큼 생각의 변화도 컸다고 본다.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또 그것들이 어우러질 수 있는가에 대한 불안감. 내가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의식할 때도, 의식을 못하고도 계속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스트레스로 한동안 지끈거리는 머리가 오래가서 MRI를 찍어보기도 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찍힌 뇌를 보여주시며 매우 인자하게 웃으셨다. 뇌에는 문제가 없다며.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아직도 친구들 사이에서 듣는 말이다. 낯가리는 것은 멈추었지만 여전히 생각이 많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게 다른 점이랄까.


사춘기의 낯가림이 생리적인 것으로부터의 낯가림이었다면,  무대에서의 낯가림은 결국 불안과 욕심이 만든 낯가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너무 나에 대해, 나 이외의 것들에 시선과 욕심을 두고 남들이 할 생각에 쓸데없이 집중하니 무엇이든 두려울 수밖에. 그것들은 내 몫이 아니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들을 모두 읽으며 살아갈  수는 없는 거다. 그것들이 불안감으로 시야를 가리고, 나를 세상과의 사이에서 낯을 가리게 만들었다.


머리 아팠던 사춘기 시절, 고민해서 나온 결과물이 하나 있다. 예전 홈페이지들에서는 비번을 잃어버렸을 때 비번을 찾는 질문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항상 인생의 좌우명을 선택해서 적어 넣었다. '내 인생은 내 거다' 민망하고 낯간지럽게 어린 게 뭔 생각을 그리 했는지. 그래도 맞는 말이다. 가끔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지만, 다시 한번 상기시키자면 나는 내 인생에서 주인공이다. 그러니 조금 더 자신을 가져도 된다.


내가 무엇을 끌어안고 살아갈지 선택할 권리는 나에게 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거나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다만 그 무대 이후로 이제는 그런 시선들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줄 안다. 나를 흔들 정도의 시선을 더 이상 내 안으로 가져오지 않는다. 더러는 달 뱉고 쓰면 삼키는 순간들도 있지만, 삼켜보고 아니라면 다시 뱉으면 된다. 이렇게 가지치기를 하면서 사는 게 마음 편하다. 이렇게 산다고 욕할 사람도 없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오롯 내 삶에 집중하면 그게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니 사춘기 어린 소녀가 머리 꽁꽁 싸매고 만든 좌우명이 꽤 괜찮았다는 생각과 함께, 잊지 않고 살아가 봐야겠다 살짝 다짐한다.




그나저나, 무대 관람 중 갑자기 관객을 빤히 쳐다보는 무용수 때문에 무서웠던 건 사실, 내가 아니라 관객들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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