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독서모임 선정도서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었다. <변신>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한 출판사는 다양했지만 그중 '민음사'에서 출판된 <변신>을 읽었다. 나는 고전문학을 읽을 때, 대부분 민음사에서 출판된 책으로 읽고 있다. <변신>은 이번까지 세 번째 읽는 것 같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소설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MBTI 성격유행검사가 한참 유행하던 때, 아이들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적 있다.
'엄마, 내가 만약에 갑자기 바퀴벌레로 변하면 엄마는 어떻게 할 거야?'
'네가 바퀴벌레로 변하지 않을 건데 왜 쓸데없는 질문을 하니?'
말간 얼굴로 시답지 않은 질문을 한다며 타박하니 아이들은 나에게 '엄마 진짜 너무한다. 엄마 T 지?'라고 말했다. <변신>은 아이들이 나에게 했던 질문처럼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던 주인공 '그레고르'가 자고 일어났더니 '벌레'로 변해버린 이야기다. 소설에서는 벌레로 변해버린 뒤 더 이상 가족에게 도움도 주지 못하고 아무 쓸모가 없어진 '그레고르'와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를 더 이상 가족이 아닌 것처럼 대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독서모임에 참여한 한 회원은 작가 프란츠 카푸카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문학으로 풀어낸 작품이 <변신>이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 대강 스토리를 알고 읽었지만, 너무나도 열심히 살던 사람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불합리한 일을 겪었지만,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하는데 주위사람들은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그레고르를 괴물 취급하는 소설 내용이 자신은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잘 읽히지 않았고 읽기 힘들었다고 한다.
또 한 회원은 그레고르는 사람으로 살다가 갑자기 벌레가 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자신은 그레고르와는 반대로 '어린 시절,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벌레처럼 여겨졌던 내가, 현재는 사회에 나와서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 같다'라고 생각을 나눠주었다.
또 다른 한 회원은 '그때는 좋은 시절이었지만, 그와 같은 화려한 시절은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의 헌신을 당연하게 생각하였으며..', '봐요 죽었어요. 완전히 죽었어요'라는 문장에서 가족에게 도움이 될 때는 가족이지만 능력이 없으면 가족이 아닌 것처럼 취급되는 그레고르의 처지를 보며, 본인도 자신의 원가족 안에서 그레고르처럼 존재했던 것 같다고 말하며 감정이입이 되었다고 하였다.
회원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며 내가 밑줄 그은 문장을 살펴봤다.
28p 자기가 다시 인간의 테두리 안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느꼈으며..
49p 누이동생은 참으로 그 모든 것의 거북함을 최대한 씻어 없애려 했으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물론 그만큼 더 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레고르 또한 훨씬 더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누이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부터가 그는 끔찍했다. 들어오자마자 누이는 한시도 허비하지 않고, 출입문들을 닫았다. 누구도 그레고르의 방을 보지 않아도 되도록 신경을 쓰면서 곧장 창가로 달려가 질식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창문을 급한 손길로 홱 열어젖히고는 추운 날에도 잠깐 창가에 머물며 깊이 숨을 쉬었다.
67p 이따금씩 그는 다음번에 문이 열리면 가족의 문제를 전과 똑같이 자기가 떠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79p 만약 이게 오빠였더라면, 사람이 이런 동물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아차리고 자기 발로 떠났을 거예요. 그랬더라면 오빠가 없더라도 살아가면서 명예롭게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었을 거예요.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다시 인간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고자 노력했지만 가족 중 누구도 그를 인간의 테두리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벌레로 변해버린 뒤 가족 중 누구도 자신의 방에 들어오지 않지만, 오직 여동생만은 그레고르가 머무는 방에 들어와 청소를 하고 그레고르의 동태를 살피며 음식을 준다.
그레고르는 이런 동생의 모습에 '오직' 여동생만은 나를 '인간'으로 대한다는 '희망'을 갖지만, 여동생은 지금까지 집안에서 '쓸모없는 존재'였다가 괴물로 변해버린 오빠를 돌봐주면서 '쓸모 있는 존재'가 되었다. 여동생은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선 '오직' 자신만이 오빠를 돌봐야 한다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과 여동생의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레고르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배신감'
믿었던 자에게 대한 배신, 꾸역꾸역 붙잡고 있는 희망을 끈을 끊어버린 자에 대한 '배신'
이 소설은 나에게 배신감을 투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족에게 끊임없이 배신당하지만 또다시 그 가족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한 사람의 사투가 보였다.
책은 이래서 재밌다. 똑같은 책을 읽었지만 책 속에 투사되는 모습이 이렇게 제각각이다. 책 속에 내 모습이 녹아들었을 때, 이제껏 보지 못한 내 모습을 보게 된다. 투사된 내 모습을 외면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 모습을 온전히 바라볼 때, 진정한 나에게 다가갈 수 있다. 책은 그래서 성찰과 통찰이며, 위로이자 치유이다.
감사랑합니다. 글로 상담하는 상담사 아가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