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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 Sep 21. 2020

신입 기획자에게 추천하는 첫 업무

어느 직무에 있건 기본을 아는 일은 중요하니까요

현장 OJT를 끝내고 처음 본사로 출근하던 날이 생각난다. 월급을 탈탈 털어 장만한 몇 벌의 정장, 오랜만에 꺼내 신어 어색한 구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을 설치던 출근 전날 밤. 같은 부문에 발령받은 동기들과 잠깐 대기하다가 부문장님, 본부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의 팀으로 향했다. 팀에서도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빈자리를 안내받아 잠깐 앉았다. 일주일 정도는 그렇게 앉아만 있었다. 잠깐 팀장님, 매니저님과 면담을 하긴 했는데 신변잡기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주어진 일은 없고, 딴짓을 할 생각은 감히 엄두도 내지를 못했고, 접근 권한이 있는 폴더 내의 문서도 거의 다 읽어서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모를 때쯤 드디어 첫 임무가 주어졌다.



우리 사이트의 개선점을 도출해와라



EC건 MC건 관계없이 어떤 의견이라도 있으면 도출해보라는 거였다. 기한은 하루. 엑셀과 워드에 개선점을 정리하고 있는데 당시 같은 팀에 발령받았던 동기가 개인 노트북을 들고 와서 작업하겠다고 했다. 나름 디자인 직무로 입사한 사람들인데 질 수 없는 마음에 나도 들고 와서 템플릿 만들고 휘황찬란하게... 그때는 몰랐는데 당시 팀원들이 뭘 이렇게까지 하냐며 구경하고 웃고 가셨던 게 이해가 간다. (신입의 패기니까 나름 귀엽게 봐주지 않으셨을까 하는 마음도 있지만.. 부디 그렇게 생각하셨길) 오후 4시에 팀장님, 매니저님을 모시고 회의실에 자료를 띄워놓고 발표를 시작했다. 면접 볼 때처럼 떨렸던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보는 대학교 발표 자료st에 정신이 아득하다



평소 사이트를 보며 불편했던 점들을 다른 사이트나 앱과 비교하거나, 자체적으로 화면을 새로 구성해서 발표를 진행했다. 다행히도 좋게 봐주셨다... 고 생각하는데 대장들 속마음은 여전히 알 길이 없으나. 동기는 제출 기한까지 완벽한 퀄리티를 내지 못했다며 발표를 포기하고 보완해서 내겠다고 한 통에, 사이트 개선안 제출 관련 업무는 내게 맡겨졌다. 다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회사 기본 양식에 맞춰서 간소하게 만들어보라는 말과 함께.




두 달 정도는 집중적으로 EC, MC로 구분해 FO 개선안만 찾았다. 관련된 아티클을 읽어보기도 하고, 매일 들르는 사이트나 앱들, 요즘 핫한 서비스들을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업무를 진행할수록 회사의 구조를 모를 때는 그냥 단순히 불편하거나 이상했던 것들이 업무에 어떻게 연관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 오타나 검색 결과 → 검색 업무 (SEO 키워드 세팅, 검색 정책)

주문서 및 결제 관련 → 마케팅, PG사, API, 셀러툴 정책

상품명, 썸네일 오류 → 전시 기준 혹은 디자인 가이드


일단 리스트업을 해서 매일 보고를 하면 쓸만한 것들은 더 디벨롭해서 깊게 파고 들어가는 일을 반복했다. 그새 나도 모르게 업무도 이해하게 되고, 담당자와 관련 업무도 파악하게 되고, 사이트가 어떻게 구성되어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지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사이트의 구성 요소는 모두 유기성을 가진다. 전혀 다른 구조란 없고, 한 영역에 대한 이해도는 다른 영역에도 비슷하게 적용되거나 참고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 중 일부


100개가 넘는 개선안을 냈고, 당시에는 1/10 정도 반영됐었다. 그때는 기껏 낸 개선안 대부분이 채택되지 않아서 슬펐지만, 지금 보니 그 정도라도 반영해준 게 감사하다. 현재 기준으로는 프로젝트나 운영 개선을 통해서 대부분의 개선안이 반영되었거나, 더 좋은 방향으로 변경되었다. 매일 살아가는 중에는 몰랐는데 새삼 이렇게 돌아보니 벅차기도 하다. 우리 앱, 우리 사이트 이렇게 좋아졌어...


왠지 모르게 뭉클

 



직무가 직무다 보니 평소에 우리 앱뿐만 아니라 다른 앱을 쓸 때도 신기하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QC하듯이 사용해보곤 한다. 올 초, 스타벅스 사이렌 오더에 기프티콘 연동 방법이 3개 생겼을 때는 점심시간에 스타벅스에 앉아서 팀 사람들과 각 방법으로 주문을 해보고 비교해보기도 했다. 팀원들마다 소감도 다르고, 쓰다가 오류가 있으면 그걸 또 공유하고, 우리는 이 방법을 쓰는데 얘네는 이렇게 구현했네, 무슨 이유가 있나- 하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 너무 재밌다. 어느 앱이나 사이트를 들어가도 사용해보고 공유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대리님 이거 보셨어요? 대박이지 않아요? 이거 어떻게 만들었을지 완전 궁금한데. 처음 업무였던 사이트 전반의 개선 방안을 도출했던 일이 두고두고 큰 자양분이 되었다.


이거 없을 때 기프티콘 쓰려면 무조건 카운터 가야해서 너무 불편했단 말이에요


그동안 우리 사이트는 전면 리뉴얼 등을 통해 EC, MC 모두 많은 변화를 거쳤다. 그 과정에서 내가 낸 개선 방향이 채택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UX, 서비스 기획을 한다면 현재 우리 사이트의 구조를 뜯어보고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궁금해하고 질문하기를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사용성이 구린 걸 알지만 개발적인 이슈 혹은 정책 사항 때문에 유지하고 있는 부분일 수도 있다. 이런 히스토리는 직접 세세하게 뜯어보고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어느 직무든 마찬가지지만 기본이 중요하다. 특히 서비스 기획자라면 FO, 시간이 된다면 BO까지 뜯어보는 시간을 반드시 갖기를 추천한다. 관련 업무를 맡아서 기능을 알게 되는 것과는 다른 관점으로 서비스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거라고, 그게 업무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단언한다. 아침에 출근해서 매일 10분이라도 우리의 서비스를 살펴보자. 우리가 가져야만 하는 통찰력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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