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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Jan 01. 2022

당신은 평화를 찾았나요?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지금 보다 어렸던 시절, 나는 삶의 목적이 행복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행복하지 못해서 힘들었고, 지금은 행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가고 있고, 언젠가는 행복해지겠다고 생각했다.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헤르만 헤세의「싯다르타」를 읽던 때였다. 소설 속 카밀라는 뱀에 물려 죽음의 목전에 이르렀고, 싯다르타의 앞에 누웠다. 죽어가던 카밀라는 싯다르타를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도달했나요? 당신은 평화를 찾았나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문득 카밀라의 질문이 나를 향한 것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정말 불현듯 찾아오는 별똥별 같은, 일종의 감각이었다. 


내가 갖고 싶던 것, 찾고 있던 것, 그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삶의 목적- 그것은 평화였다. 




인생에 대한 가장 흔한 비유가 '여행'이다. 우리가 모두 여행자라면 인류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죽음이다. 이것은 엄중한 물리적 사실이고,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궁극적인 미스터리라면 미스터리라 하겠다. 그러나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 자명한 그 최종적 사건, 죽음의 성격은 대단히 오묘하다.


그것은 물질적 종말인 동시에 정신적 종말이고, 이성적이면서도 경험적인 사건인 것이다. 결국 죽음은 우리를 구성하는, 혹은 구성한다고 여겨지는 이원론적인 요소가 하나로 통합하는 최종국면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어찌 됐든 때가 될 때까지 인간은 항상 의식과 체험이라는 모종의 불협화음을 지니고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헤세의「싯다르타」에는 두 명의 싯다르타가 등장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싯다르타', 즉 부처님과 주인공 싯다르타이며, 둘은 동명이인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성격적으로는 딱히 이인(異人)이라고 할 수도 없겠다. 


주인공 싯다르타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곧 세상과의 이질감에 친구 고빈다와 함께 구도의 길에 오른다. 여러 사문(沙門, 출가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을 통틀어 부르는 말)들의 길을 따라 열심히 수행하던 두 청년은 고타마(부처님 싯다르타)가 근처에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를 만나고자 하게된다.


말하자면 여기까지가 소설의 1부라고 하겠다. 헤세의 글은 언제나 그렇듯이 쉬운 듯 심오하고, 재밌는지 지루한지 긴가민가하나 어찌 됐든 내면의 이야기를 다루며, 지극히 체험적이다. 소설이지만 일종의 수기(手)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까. 따라서 헤세의 작품들은 자신이 체험한 모종의 깨달음을 여러 가지 국면으로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형태인 것이다.


「싯다르타」를 읽고 불만에 가득 찼던 독자는 아마 헤세 유니버스에 익숙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싯다르타」보다는 「데미안」을, 「유리알 유희」보다는 「싯다르타」를 먼저 읽는 것이 헤세 유니버스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소소한 꿀팁이랄까.


여하튼 길을 떠났던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완성자 고타마를 대면하게 되는데, 고빈다는 그만(?) 경지에 오른 고타마의 풍모에 흠뻑 빠지고 만다. 부처님을 따르는 수행자 무리의 일원이 되고자 굳게 마음먹으며, 자신과 같이 그곳에 남기를 싯다르타에게 권하지만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작별을 고하고 길을 떠난다.


홀로 남은 싯다르타, 그는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여인(카밀라)과 사랑을 하고, 장사꾼 밑에서 큰돈을 벌으며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룬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싯다르타는 조용히 흐르는 강 옆에서 고요하게 완성에 다다르게 된다.


「싯다르타」 속에 등장하는 두 명의 동명이인은 각각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평화에 다다른 인물들이면서, 최종적 국면에서 하나로 합일된 완성자이다. 동시에 부처님이 붓다에 이르기 전 겪었던 생애의 표상이기도 했다. 붓다 역시 경지에 오르기 전에 기존의 수행자들의 혹독한 고행법을 따르다 깨달음은커녕 죽음을 얻을 뻔했던 적이 있다.


붓다의 본명 고타마 싯다르타를 뚝 잘라 둘로 나눠놓은 두 명의 소설 속 인물은 결국은 완성자 싯다르타와 구도자 싯다르타, 즉 과거와 붓다와 현재의 붓다를 그린 것이라고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싯다르타」가 붓다의 길을 단순히 재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은 것은 바로 싯다르타(주인공)의 친구, 고빈다의 존재 덕분이다. 


고빈다는 고타마를 만난 후 깊이 감복해서 그를 따르는 사문의 무리와 생활한다. 자신의 친구가 여자를 만나고 가정을 이루며 큰돈을 벌었다가 또 떠났다가 뱃사공 일을 하다가 깨달음을 얻게 될 때까지도 그는 계속 붓다의 제자로써 수행 중이었다.


고빈다는 끝끝내 완성에 다다른 옛 친구를 강가에서 우연히 만나는데, 고빈다는 경지에 오른 싯다르타를 인정하지 못한다. 뒤돌아보니 가장 중요했던 건 '사랑'이었다는 옛 친구의 말에 고빈다는 '부처님은 사랑을 버려야 할 집착이라고 말했다' 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붓다가 말하셨던 '사랑'과 싯다르타가 말했던 '사랑'은 아마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언어는 결국 잘해봐야 인식의 열화 복제일 뿐이다. 집착을 버리라는 붓다의 말에 도리어 집착을 해버린 고빈다는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손톱에만 골몰하는 모습이 되어버리고 만다.


고빈다의 존재는 말하자면 '옛' 붓다, 즉 자아의 외부에서 답을 찾아내려고 했던, 극단의 고행을 행하던 고타마 싯다르타의 연장선상에 있고, 일면「데미안」의 피스토리우스이자,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글을 통해 성장하길 바랬던 세상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완성으로 이르는 길은 자기 체험, 즉 자기 내면의 경험으로 쓰일 수밖에 없다는 「싯다르타」의 주제의식은 헤세의 거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헤세 유니버스의 캐치프라이즈이다.


결국 한 문장으로 수렴하는 주제를 평생 몇 권의 책으로 써 내려갔던 것은, 실은 정말이지 단순한 그 길을 그저 아는 것과 실제로 걷는 것은 전혀 다른 깊이의 문제라는 걸 보여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평화를 찾았냐는 카밀라의 질문에 조용히 미소 짓는 싯다르타. 


그러자 카밀라는 "알겠어요. 나도 평화를 찾을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싯다르타는 죽어가는 카밀라에게 고요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당신은 이미 그것을 찾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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