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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Mar 14. 2022

참을 수 없는
열등감이 느껴질 때

열등감을 대하는 철학자의 자세

"일이 힘드냐? 인간이 힘들지"


김대리의 한숨이 깊습니다. 험난한 회사생활, 산전수전 다 겪어온 그도 도저히 참기 힘든 일이 하나 있대요. 바로 열등감입니다. 

동기의 승진, 은근하게 벌어지는 격차, 오랜만에 만난 동창에게 느껴지는 거리감-.


남들이 나보다 앞서가는 것 같을 때, 우리는 참을 수 없는 불안과 분노를 느껴요. 특히 비교 상대가 나와 가까울수록 그 골도 깊습니다.


열등감은 정말 위험한 감정입니다. 미국의 유명 정신의학자인 제롬 프랭크는 "모든 정신장애는 기가 죽어서 생기는 병이며, 기를 살리는 것이 모든 치료 방법의 공통적인 요인"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을 정도죠.




그런데 최근 들어 이 위험한 감정이 우리 사회 전체에 유행처럼 번지는 것 같아요.


'열폭(열등감 폭발)'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각종 정신건강 지표에 빨간 불이 켜지며 '자존감'이라는 키워드가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죠. 이는 한계를 모르고 팽창하는 각종 미디어와 SNS 기술에서 기인한 면이 커요.


각자의 삶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전시(展示) 사회에서 나와 남을 비교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거든요.


어찌 됐든 생겨날 수밖에 없는 감정이라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같아지기 위해 인생의 3/4을 허비하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한 말입니다. 그가 1800년대에 활동했던 사람인 것을 염두하면, 그 시절에도 사람들의 비교의식과 열등감은 여전했나 봐요.


철학자의 일침, 참 멋있죠? 그런데 아마 쇼펜하우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이 조금 의아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쇼펜하우어야 말로 비교의식과 열등감으로 상처가 깊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릴 적에 생긴 어머니에 관한 트라우마로 평생 여성에 대한 혐오감에 시달렸으며, 비교적 주목받지 못했던 본인과는 달리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철학자 헤겔에게 심한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기회가 될 때마다 인신공격성 발언을 쏟아내면서 말이죠.


그 비난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냐면,  "그는 종이를 허비하게 하고, 시간을 낭비하게 하며, 역겹고 우둔한 협잡꾼이자 전례 없는 망나니"라고 말했던 적도 있었죠.


헤겔에 대한 그의 공격적인 반응은 단순히 말에서 끝나지 않았어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쇼펜하우어와 헤겔이 한솥밥을 먹(을뻔 했) 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헤겔이 교수직을 맡고 있던 베를린 대학교에서 쇼펜하우어도 교편을 잡게 됐던 것이죠.


당시 헤겔은 학교에서도 인기 만점인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일부러 그의 강의시간에 딱 맞춰서 자신의 강의를 개설했어요.


그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다 빼오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죠. 물론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쇼펜하우어의 수업에는 학생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게 됐어요. 


자존심이 (과할 정도로) 강했던 쇼펜하우어는 이후 깊은 상처를 입고 직장생활을 접고 은둔자가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쇼펜하우어에게 열등감이 오직 상처일 뿐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주류 철학계와 학계 파벌에 대한 혐오는 자연스럽게 그를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창조적인 사유로 이끌었어요.


당시 철학계의 일반적인 흐름이던 이성주의에서 벗어나 '의지의 철학'을 제창했고, 서방세계에게 미지의 영역이던 인도철학을 소개했죠.


후대의 영국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그가 학계 파벌과 무관했기에 민족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평하기도 했어요. 


쇼펜하우어의 고집이 처음에는 콤플렉스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르나, 결국에는 성취에 대한 의지로 변모했던 것이죠.




이처럼 열등감이 공격(생산)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것을 현대 심리학에서는 '보상'의 개념으로 설명해요. 목이 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이, 결핍이 동기가 되는 것이죠.


나의 콤플렉스가 오히려 특정 성취에 대한 매우 공격적인 의지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상황에서 독기를 품고 살아서 결국 백만장자가 된 무수한 사례들처럼요.


무언가를 크게 성취한 사람들의 이면에는 결핍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노는 힘이 세거든요. 따라서 참을 수 없는 열등감이 느껴질 땐 외면하고 억압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열등감, 결핍,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없앨 수 없다면, 차라리 변화와 행동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죠. 


그런데 이와 같은 심리적 전략에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종의 성취와는 상관없이 인간 쇼펜하우어는 과연 행복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강의 사건이 있은 후 오랜 시간이 지나 헤겔이 죽고 나서야 쇼펜하우어는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어요.


말년이 되었을 때쯤 그토록 고대하던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되자 그는 매우 기뻐했다고 해요. 매일 아침 자신의 명성을 보도한 신문기사들을 곱씹어서 읽으며 말이죠.


늦게 얻은 명예를 잃는 게 두려웠는지, 혹시라도 자신이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매장될 수도 있다는 망상(?)에 시달려 장례식도 평균보다 며칠 늦게 치러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죽음을 병적으로 두려워했던 그에게도 마지막은 다가왔습니다. 끝끝내 말년에 다다른 그는 나지막하게 시 한 편을 남깁니다.


"나는 이제 여정의 목적지에 지친 채 서있다 / 지친 머리에는 월계관조차 쓰고 있기 힘들구나"





어떤가요? 그가 남긴 마지막 시, 무언가 쓸쓸하고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물론 당사자가 아니라면 모를 일이지만, 제 생각에는 쇼펜하우어의 마지막 날, 점차 가빠오는 숨 속에서 그는 허무를 느꼈을 것 같습니다. 평생 증오해 마지않으며 칼을 갈던 헤겔이 죽고 모든 명예를 쟁취한 그 순간, 그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요?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욕망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열등감과 결핍도 마친가지죠. 열등감의 진짜 정체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 속의 상처입니다.


때문에 극복의 대상도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타인과 나는 애초에 비교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이 아니라 타인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닿을 수 없는 오아시스를 갈망하는 사람처럼, 영원히 뛰어야만 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 참을 수 없는 열등감이 치밀어 오를 때, 잠시 숨을 고르고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보도록 해요.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니?"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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