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필라테스 강사, 해고당하다
토요일 오전, 센터 매니저에게 장문의 카톡이 왔다.
그 어떤 예상도 없이, 갑자기 나는 해고당했다.
회사의 경영악화로 인한 구조조정, 다음 주까지만 일해달라고 한다.
나는 물리치료사로서 병원에서 약 7년을 일했었고, 워라밸을 찾기 위해 출근을 주 2~3일 할 수 있는 필라테스 강사로 2년 전 전직했다.
단순히 직업을 바꾼 게 아닌 직장인에서 프리랜서로의 전직이다. 4대 보험 대신, 퇴직금 대신,
권고사직일 때 받을 수 있는 실업급여 대신,
달랑 3.3% 원천징수한 부분을 매 해 아주 조금 돌려받게 된 프리랜서.
‘해고.’ 내 인생에 없어본 단어였다. 이젠 과거형이다. 인생에 알록달록한 색깔을 입혀줄 새로운 단어가 늘었다.
처음 그 카톡을 본 순간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냉정을 찾고 보니 회사 입장에서는 정직원이 아닌 존재를 입맛대로 쉽게 내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과를 내거나, 팀장의 눈치를 보는 것과 거리가 먼 병원 일을 하다가 (자기가 맡은 환자만 잘 보면 된다.) 회원들에게 외적 모습으로 로망이 되는 강사가 되기 위해 외모도 더 꾸며야 하고, 센터 매니저, 대표에게 능력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직업이어서 그랬을까.
그저 내 실력을 키우고 회원들에게 최선을 다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사회생활은 입체적으로 잘해야 함을 서른이 넘은 나이에 깨닫다니. 나도 참 어리다.
센터의 강사 중, 나를 우선순위 해고 대상자로 삼았다는 건 내가 실력이 없거나, 내 진심과는 다른 무언가의 오해를 샀다는 거겠지.
또한 내가 아무리 잘 한들, 내게 맞지 않는 자리가 있는 법이다.
하나 그렇게 위안하기엔, 또 내가 스스로에게 완벽주의자이기에 더 충격을 받았다.
어쨌든 이미 벌어진 일. 또한 부당해고로 신고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나는 프리랜 서니까. 노동청도
근로기준법도 나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 실업급여조차 없다.
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말하듯,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좋은 경험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더니 한없이 생각이 뻗어나간다.
브런치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존재인 엄마의 글을 쓰는 것은 나의 버킷리스트.
결혼, 새 직업 등으로 오랫동안 놓아둔 글쓰기를 다시 시작할 기회다.
버킷리스트를 적어놓은 메모장을 연다.
‘모녀해외여행’
모차르트의 고향에서 함께 음악회를 듣는 것,
알프스 산맥의 끝자락에서 케이블카를 타는 것,
예쁜 카페테리아에 앉아 크림이 잔뜩 올라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엄마의 인생을 인터뷰하고
같이 시집을 읽는 것.
지금이 실현할 기회다.
코로나로 인하여 3년이 미뤄지고, 엄마는 그 사이에 중환자실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셨고,
나는 결혼을 했다.
모녀 해외여행을 갈 돈은 결혼 자금으로 흘러들어가 버렸다. 그래서일까, 괜히 미안한 마음에
결혼을 하기 전부터 남편에게 미리 했던 예고. ‘코로나 때문에 못 갔는데, 나는 모녀여행을 꼭 가고 싶어. 적금을 따로 부었으니 이건 꼭 여행을 다녀올게.’
한국 나이로 66세. 중환자실에서 나온 지 1년 하고도 반이 흐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건강상태가 좋아지신 엄마를 모시고 갈 동유럽 여행을 알아보고,
패키지여행티켓을 끊는 것까지,
해고부터 이 모든 일이 주말부터 72시간 내에 다 이루어졌다.
다행히 나는 재테크 카페에서 재테크강사로도 일하고 있고, 블로그를 운영해 수입을 내고 있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배당금도 - 비록 몇십만 원이지만 - 받을 것이다.
그러면 대충 내 생활비와, 적금 하나정도는 충당할 수 있다. 적금 두 개는 부을 수 없겠지만…!
애써 무시하고 싶은 내 가계부에 써져 있는 CMA계좌 비상금은 달랑 200만 원. 곧 들어올 마지막 월급도 그다지 않지는 않다.
적금 만기는 7월. 여행은 4월, 아니 카드값은 3월에 값아야 하지만,
한 살이라도 나와 엄마가 젊을 때 가야 하는 여행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희옥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맛있는 걸 잔뜩 사줘야지. 그러고 나선 그녀의 인생을 인터뷰해야지. 같이 시집을 읽어야지….
유튜브에서 자수성가한 누군가가 젊은이들에게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1억을 모을 때마다 여행을 가고, 그전엔 가지 말라고 했다.
아니다. 1억을 모으고 난 다음엔 나는 더 늙을 것이고, 희옥은 더 쉽게 지칠 것이고, 더 떠나기 어려울 것이다.
당장 눈앞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에 급급해 내 몸과 시간으로 돈을 번다면,
통장잔고는 조금 더 늘겠지만 브런치 에세이는 쓸 수 없다.
나는 지금, 엄마와 여행을 가야겠다.
어느 필라테스 강사의 슬픈 날은, 그렇게 에세이 작가로 다시 복귀하는 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