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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희 Jul 22. 2020

희옥의 이야기 #과외로 27살에 집을 산 여자


#대학을 못 간 여자에 이어지는 희옥의 이야기다.

집안 형편으로 대학을 포기한 똑똑한 소녀는 이제는 열심히  이유가 사라진 고등학교 3학년 9월에 마침 집을 나가 입주가정교사를  기회를 얻었다.
사연인즉 평소에 집에 놀러 오던 셋째 동생의 친구, 중학교 3학년 주리와 주리의 오빠인 찬호를 가르치기 위해 찬호 엄마가 아예 자신의 집에 딸린 방에 살지 않겠냐고  것이다.
 당시 학력고사가 남아 있었고, 엄마들의 교육열은 지금 못지않았고, 넓은 별채 딸린 집에 살던 찬호 엄마는 부유했고,  친구의 언니인 희옥은 똑똑했다.
방황하던 희옥에게는 좋은 이야기였다.

고등학교 1학년인 찬호와 희옥은 사실 동갑이었다. 몸이 약한 찬호는 1 꿇고 학교를 다녔고, 희옥은 6살에 학교를 들어가는 바람에 1 언니들과 학교를 다녔으므로 3 희옥이 동갑내기 찬호를 가르치게 생긴 것이다.  희옥은 어렸을 때부터 동생 이수학 문제를 이해 못하면 이해할 때까지 붙잡고 가르쳤다. ‘ 이해를 못할까?’ ‘이렇게 설명해보면 어떨까?’ 생각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한다.

찬호네 별채에서 살면서 입주 과외했던 기간은 기실  4개월이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희옥은 자신의 적성과  맞는 뜻밖의 직업을 발견한 셈이다.  동갑내기 입주과외 후에 이번엔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 자기 형의 아들들, 중학교 3학년 남자아이들을 과외해달라고 했더란다.

 얘기를 하면서 희옥은 웃었다. ‘  선생님이  똑똑하셨던 거지, 나는 대학생이 아니니 과외비도 저렴하고, 사실 배운 지 얼마 안 된 3 나이 많은 선생님보다  생생하게 가르칠  있다는  아신 거지. 가성비 좋은 과외선생으로.’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고등학교 시절부터 과외 경력을 쌓아버린(?) 희옥은 스무 살에 공부방 보조교사로 취직했다.
전 학년을 가르친 공부방이었는데 ‘엄마 선생님이라고 불린 사장님과 함께 아이들 가르치는 것에 본격적인 재미를 붙인 것이다.

그렇게 배우고 나서 독립한 거야?’ 호기심에 보채 묻는 내게 엄마가  웃는다.
그런 셈이지.’
 아이의 이름이 이상하게 안 잊히네. 이름은 병수인데,  애의 집이 한의원을 하는데 지역에서 손꼽히는 부자였거든. 병수 엄마가 월세방을  굉장히 많이 갖고 계셨는데 그중 하나를 내주셨지.’

사연인즉 이랬다. 수원에서 유명한 부자였던 강병수의 어머니는 웬일인지 아들의 공부방 선생님인 희옥을 좋게 봤다.  - 학창 시절 그녀의 공부 습관과 가르치는 기술, 온화한 말투를 생각해봤을  십분 이해가 된다. - 병수네 집은 다달이 월세를 걷는 셋방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를 공부하라고 그냥 내준 것이다.  집에서 희옥은 월세도 안 내고(!) 병수를 가르치는 비용도 받고 다른 아이들도 가르쳤다고 한다. 순진한 희옥은 월세  생각도 못했단다. 그저 학부모의 호의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무튼 온화한 성격과 아이들의 성적으로 말해주는 좋은 실적으로 학부모들과의 사이도 좋았던 희옥은 결국 사업 수완도 있는 셈이  것이다.
나중에 병수 어머니는 택지에 아파트를 지었는데 마침 비어 있는 경비원 자리에 정년퇴직한 희옥의 아버지를 앉혀주었다. -온갖 인문학 서적과 경영학 서적의 살아있는 예가 바로  옆에 있었다!!  필요가 아닌, 고객의 필요를 제대로 만족시키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으로 고객이  편이 되게 만드는, 고객이 알아서 새로운 고객을 데려오는 진정한 마케팅의 정수 아닌가! - 그렇게 20 초반과 중반에 걸쳐서 그녀는 과외교사로서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그래서 얼마를 벌었냐는 질문에 희옥은 고개를 갸웃했다.
‘20 내내  벌어서   할머니 가져다 드렸지. 아이들이 50~60명이었는데, 초등학교 전 학년을  가르치고, 중학생도 가르쳤어. 한 달에 저학년 아이들은 만 이천 원, 고학년은 만 오천 원을 받았으니 못해도 50만 원에서 70만 원  셈이야.’

희옥의 공부방은 그룹 과외였기 때문에 한 달에 50~60명을 희옥 혼자 가르치는  가능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왔는데 나중에 월말고사  바빠지면 아직 고등학생인 셋째 동생도 아르바이트로 고용했다고 한다. 희옥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월말고사에서 아이들의 점수가 떨어지면  집에서 자면서 아예 완벽히 이해할 때까지 가르쳐줬다. 엄마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선생님인 것이다.
 당시 대학교수 혹은 국회의원이 월급을 50만 원 정도 받았다고 한다. 경찰로 정년퇴직한 할아버지의 마지막 월급이 5만 원이고, 고졸 경리가 3만 5천 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희옥이 받은 50만 원은 대략 오늘날의 700~800만 원의 가치가 아닐까?
그러나 좋은 시절도 잠깐, 대학 못 간 설움이  희옥의 발목을 잡았다.
1981년쯤, 희옥이 24살일  전두환 대통령이 모든 일반인 과외를 없앴다. 등록된  학원은 괜찮고,  대학생 과외는   있지만, 일반 과외를 없앤 것이다. 희옥은  당시 방송통신대학이라도 다니면 ‘대학생이라는 것을 몰랐다. 정보를 모르면 똑똑함도, 열정도 소용이 없나 보다. 안타깝게도  시기에 엄마는 과외를 그냥 그만두었다.

그리고 23, 25살에 두 번의 연애를 거쳐 27살에 결혼을 했는데 결혼   해에 
외할머니가 받아서 그동안 모아준  450만 원으로 13 주공아파트를 샀다고 한다.  엄마의 과외 한 달 벌이 50만 원으로 가정할   9개월의 월급으로 아파트를   있었다니! 아파트 가격도 낮았지만 희옥의 연봉도 대단했다. 땡전 한 푼 없이 친구들 곗돈으로 결혼한 시골 남자, 아빠에게 복덩이가 굴러왔다고(?)   있겠다

동갑내기 과외학생이었던 찬호 삼촌은  년 전 엄마가 친구들과 함께  찬호 삼촌의 별장으로 놀러 갔을 정도로 아직도 연락하는 사이다.


다음 이야기는 (3) 첫 번째, 두 번째 남자 친구 그리고 결혼. 이어지는 희옥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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