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발걸음을 돌렸다. '덥다'는 말을 달고 살았지만 막상 떠나려는 기운이 느껴지자 마음은 헛헛했다. 돌아보니 여름은 여기저기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하얗던 팔에 햇살의 그림자가 새겨졌고, 새로 샀던 옷들은 생기를 잃고 작은 보풀들이 일었다. 길가엔 힘을 다한 매미가 쓰러져 있었고, 메마른 꽃잎들은 움츠린 채 작별을 고했다.
올여름 내내 나를 붙든 건 배롱나무였다. 여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백일 가까이 꽃을 피우는 나무. 가까이서 보면 주름진 꽃잎들이 작은 카네이션 같아 더욱 친근했다. 멀리서도, 곁에서도 늘 눈인사를 건네는 나무였다.
꽃잎이 주름진 건 햇살 속에서 오래 머물기 위한 지혜일지도 모른다. 반듯한 꽃잎은 쉽게 시들어버리지만, 배롱나무는 주름진 꽃잎 안에 인내를 품어 끝내 화사하게 피어난다. 그 모습에서 나는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운다.
모두가 지쳐 녹아내리는 여름 한가운데, 가장 찬란하게 꽃을 피우는 나무. 그래서 이 계절을 떠올릴 때면, 나는 오래도록 배롱나무를 기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