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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몽 Jan 12. 2021

오늘 당신은 안녕한가요?

안녕하지 못하다

흰 눈이 펑펑 내렸다. 올 겨울 집 안에 콕 박혀 있는 우리들이 가여운 건지 한 순간에 세상은 겨울왕국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창 밖을 보며 마냥 좋아하다가 문득 오늘 출장 간다던 신랑이 생각나 걱정스러워진다. 그러면서도 아이들과 하염없이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창문을 닫았다 열었다 창틀에 앉은 눈을 만졌다 녹였다를 반복한다. 그리고는 역시 눈 오는 날엔 군고구마지! 라는 생각에 고구마를 깨끗이 씻어 에어 프라이기에 돌렸다.


우선 15분을 세팅하고 딱 그 시간만큼만 눈 좀 감아야지 생각했다. 큰 아이는 학습지 숙제를 시키고 둘째는 침대에 눕혀 재우고자 했다. 보일러를 1도 올리고 온수매트도 켜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며 잠이 들었다. 낮에 잠깐 눈을 붙이는 쪽잠이 얼마나 달콤한지 불러도 불러도 헤어 나오고 싶지가 않다. 얼마나 지났을까. 둘째 아이가 나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는 요구사항이 있을 때마다 엄마엄마~를 끝없이 부른다. 하루 종일 그 소리에 지쳐 귀에 딱지가 얹을 지경인데 달콤한 잠에 빠져든 나에게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달갑지만은 않다. 게다가 나는 아이들처럼 잠투정이 심하다. 몇 번을 잡고 뒤흔드는 통에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어 일어났다. 나는 이미 개운한 잠에서 깨어난 상태가 아니기에 몹시 예민하다.


거실에 나와 앉아있으려니 뭔가 싸한 게 자기 전의 모습과는 분위기가 다름이 느껴졌다. 레이더를 총동원하여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거실을 빙 둘러보았다. 딱 걸렸다 이놈! 아이의 책상에 형광 핑크색의 크레파스 같은 것이 뭉친 듯 파헤친 듯 군데군데 묻어있는 것이 보였다. 아뿔싸! 내 립스틱이다. 주변엔 내 화장품들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다. 화장하는 거에 관심 많은 7살 큰 아이에게 가끔 엄마의 립스틱을 바르는 정도는 허용을 해준 터이다. 그래도 한 번도 립스틱을 부러트리거나 뭉갠 적이 없던 아이였다. 그런데 뭉개졌다니? 둘째는 내 곁에서 쭈욱 있었기에 범인은 큰 아이밖에 없다. 큰 아이를 불러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아이는 슬라임에 엄마의 모든 립스틱을 뚝뚝 끊어 넣었다고 했다. 아끼고 아껴 가장 잘 사용할 것 같은 화장품을 남겨놓긴 했지만 사실 그마저도 사용한 지가 오래되어 실사용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속상함이 밀려왔다. 왜 아이는 엄마가 하지 말라는 것만 하고 있는지, 엄마의 말을 제대로 들어먹지도 않는지, 생각은 멀리 나가 앞으로 학교 생활은 어찌할 거며 선생님한테 혼나는 상황까지 상상의 날개는 펼쳐지고 있었다. 아이는 남처럼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라고 연거푸 말하고 있다. 이것 또한 유튜브에서 배운 말투다. 엄마 아빠는 단 한 번도 이런 사과를 가르친 적이 없다. 넌 이제 슬라임이고 유튜브고 18살이 될 때까지는 절대 보지도 할 수도 없다고 내뱉고서야 아이를 야단치는 행위는 끝이 났다. 그리고 나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몰아세운 것이 미안했다. 요즘 미디어에서 나오는 아동학대가 지금의 나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거기다가 지금은 이렇게 화장 한 번 하지 않고 집구석에 있지만 언젠가 나갈 날을 기다리며 간직해왔던 나의 꽃분홍색의 화장품들이 사라짐에 나의 꿈마저 산산조각이 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혼날 건 다 혼났다고 생각했는지 TV를 보며 키득거리는 아이를 붙잡고 마지막 한 숨을 내뱉고야 만다. 엄마는 이제 나갈 때 뭘 하고 가냐며 아이 마냥 우는 내가 처량했는지 아이 또한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서는 아빠가 퇴근하자마자 모아두었던 용돈을 가지고 와서 아빠에게 엄마 화장품을 사주자고 말한다.






이런 망할, 나는 아이보다도 못한 철부지 엄마의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그깟 화장품이 뭐라고. 당장 쓰지도 못하고 쓰기에도 오래된 화장품들은 꽃다운 나의 상징과도 같았다. 젊었던 시절, 한없이 고왔던 시절,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내 모습이 저 화장품 속에 있었다. 그것을 보내지 못하고 붙들고만 있던 것을 어쩌면 아이의 손으로 털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눈은 점점 쏟아져 하늘이 뚫린 것처럼 내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멈춰버렸다. 출장 다녀온 탓에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신랑 덕에 우리는 이른 저녁을 먹고 8시가 되기도 전에 무장한 채 밖으로 나섰다. 썰매를 타고 눈에 뒹굴면서 한없이 웃고 한없이 털어버렸다. 그렇게 다시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마치 오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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