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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희 Nov 10. 2017

우리의 시대적 과업은 무엇일까?

좀 지난 이야기다.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갔다. 

여느때 처럼 신나게 운동장에서 뛰어 놀고 있겠다 싶어 학교 운동장으로 갔는데 아이가 영 보이지 않는 거다. 

이상하다 싶어 학교 건물쪽으로 가는데, 아이가 학교 입구 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혹시 친구들과 싸웠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걱정이 앞섰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자, 아이는 나를 발견하고 뛰어 온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표정이 안 좋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그런데 아이의 대답은 내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 엄마, 우리나라 대통령이 부패한 대통령이에요? 나쁜 대통령이에요?"


도대체 애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당시 한국은 대통령 측근의 비리와 부패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상태였다. 하지만 스웨덴에 있는 아이가 그 소식을 알리가 만무했다. 


아이의 말은 이러했다. 


당시 아이는 학교에서 국가의 성립과 다양한 국가 유형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배우고 있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 안에서 수업 시간에 민주주의로 대통령이 선출이 되었지만, 정부의 부패로 시민들이 시위 하고 있는 국가들을 보여 준 것 같다.  그 영상 안에는 여러 국가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 딸은 예상치도 못하게 거기서 대한민국을 보았던 것이다. 우리 아이는 왜 저런 나라들 틈에 우리 나라가 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우리 아이는 그 부분에 대해 항의하고 싶었지만, 언어 소통에 어려움이 많았던 우리 딸은 항의도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아이는 부끄럽기도 했지만, 뭔가 잘 못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억울함을 느꼈던거 같다. 그래서 방과 후 놀이 시간에 놀지도 않고, 엄마 아빠를 기다린 것이다. 어서 엄마와 아빠를 만나 이 부당함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 한 것 같았다. 딸 아이는 정부가 부패한 나라 중 하나로 우리나라가 소개된 것에 대해 잘못된 것이니 어서 학교측에 항의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에게 그것이 잘못된 이야기라는 것을 말해 줄 수 없었다. 


당시 우리 부부는 매일 뉴스와 기사를 통해 한국의 뉴스를 듣고 있었지만, 아이에게는 현재 한국에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물론 설명을 해줘야 했지만, 솔직히 우리 역시 그 상황을 어떻게 정리하고 받아들여야 할 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현직 대통령이 저렇게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를 했단 말인가. 하루에 하나씩 벗겨지는 비리의 형체를 듣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에 가까웠다. 


우리는 아이에게 그 동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되도록이면, 아이가 알아 듣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아이가 물었다. 


" 엄마, 그 박근혜 대통령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뽑은 거 잖아요?"

"응. 맞아. 선거를 통해 우리가 뽑았단다."

"왜 어른들은 그런 나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어요?"


현재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뽑지 않았다고 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른인 우리들이 뽑은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니...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복지국가 스웨덴을 칭하는 표현들은 많다. 이들이 보여주는 국가 운영 방식의 특징을 여러 학자들은 나름 스웨덴식 모델이라 부른다.  그리고 스웨덴 모델은 흔히들 사회민주주의 모델, 협치의 모델, 상생의 모델 혹은 타협의 모델이라고 이야기 한다. 

현재 복지국가 스웨덴에 되기까지 이들이 보여준 타협과 상생의 모습 그리고 이들이 갖고 있는 사회민주주의라는 독특한 특성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모델이라 불리우든 상생 혹은 타협의 모델이라 불리우든 현재의 스웨덴은 다른 유럽 국가들이 갖고 있는 복지 모델과 상이한 본인들 만의 독특한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스웨덴은 언제부터 복지국가가 시작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스웨덴 복지국가의 시작은 사민당의 정권을 잡았던 1932년부터 이야기 한다. 물론 그 이전으로 보기도 하고 더 이후로 보기도 하는 시각도 있지만, 현재 스웨덴 복지국가의 초석이 사민당과 같이 시작되었다는 것에는 별반 다른 이견이 없는 듯하다. 물론 사민당의 혼자만의 힘으로 복지국가가 이루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스웨덴 정책 역사를 보면, 보편적인 정책 예를 들어 아동수당 혹은 양성 평등 정책의 대명사인 부모휴가 정책등은 보수정권 하에 도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의 장기 집권(40여년간) 속에서 현재 스웨덴식 복지국가의 초석이 다져지고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것 역시 이견이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1889년 만들어진 사민당은 노동계급의 정치 실현을 과제로 삼은 노동자들의 정당이었다. 물론 지금은 집권당이고 가장 지지층이 많은 정당이지만, 처음 사민당은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소수 정당이었다.  당시 스웨덴은 20세기 중엽까지도 농업이 주요한 사업이었고, 1940년대에 이르러서야 1차 산업 종사자와 2차 산업 종사자의 수가 동일하게 된다. 스웨덴은 19세기 이미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던 영국이나 독일에 비해 거의 1세기 가량 늦게 산업화가 이루어진 국가였다. 물론 산업화가 다른 나라에 비해 늦게 이루어지 지고 노동자 계급의 수의 증가 역시 느렸던 스웨덴에서 노동자 정당인 사민당의 창설(1889년)은 영국과 다른 국가들에 비해 빨랐다는 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요 지지 계급인 노동자는 20세기 중엽까지 느리게 성장하게 되고, 이때까지 스웨덴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자는 노동자라기 보다 농민들이었다(앞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스웨덴 산업 주고자 19세기 후반까지 1차 산업이 주요 산업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사민당은 창당 이후 꾸준히 성장한다. 하지만 노동자들만의 지지만으로 정당의 외연을 넓힐 수 없었다. 사민당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당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당이라는 색깔을 강하게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 계급을 포함한 대중을 위한 정당으로 자신들의 정책 색깔을 넓힐 것인가.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것이 바로 '국민의 집(Folkhemmet)'이다.


1928년 사민당 당수였던 페르 알빈 한손(Per Allbin Hansson)은 노동자 계급 뿐 아니라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한 정당으로 발 돋움 하기 위한 포석으로 새로운 정책 모델을 제시한다. 

사실 '국민의 집'은 1890년대 우파가 빈민 구제를 위한 목적으로 내세운 정치적 아젠다였다.  하지만 사민당은 우파가 사용한 '인민의 집'을 계급간 갈등으로 치닫고 있던 스웨덴 사회를 통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 좋은 사회란 좋은 가정과 같은 기능을 하는 사회이다. 좋은 가정에는 평등, 배려, 협동, 도움이 넘친다."


한손은 당시 스웨덴 사회가 여러가지 사회, 경제적 장애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장애는 시민들을 기득권을 갖고 있는 자와 착취 당하는 자, 부자와 빈자, 자산가와 무자산가, 약탈자와 피약탈자로 나누고 있다고 진단하며, 이러한 생계의 불안정과 양극화 그리고 실업의 위험은 비단 노동자 계급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간계급 역시 같은 위험에 노출 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좋은 가정 안에서는 우애와 평등이 넘치듯, 좋은 가정과 같은 사회 역시 우애와 평등이 기본이 되는 사회라는 것을 강조한다. 가정 안에서 가족원 중 누가 아프거나, 다치면 다른 가족들은 다치거나 아픈 가족 구성원을 보살피고, 그가 다시 건강하지도록 돕는다. 좋은 사회 역시 이러한 기능을 해야 한다. 가진자와 못가진자, 빼앗는 자와 박탈당한 자로 나뉘며, 차별과 갈등이 증폭 되는 사회는 더 이상 좋은 사회라 할 수 없으며, 국가는 이러한 부정의와 차별 그리고 착취로 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라 한손은 주장한다. 


 1920~30년대 까지 스웨덴 노동자의 삶은 노예와 다름이 없었다. 아무리 오래 일한다 한들 그들의 살림살이는 절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스웨덴은 노동파업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노조와 사측의 대립이 극에 치달았던 시기였다. 경제 대공항의 여파로 국가의 경제사정은 나빴으며, 노동자들의 근무 여건은 거의 노예 계약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위협은 비단 노동자 계급만의 것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경기 침체와 사회적 갈등 안에서 중산층의 삶 역시 불안정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정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민주주의 그리고 평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가족적인 우애를 강조하는 한손의 '인민의 집'은 불안정한 삶을 하루하루 지탱하고 있었던 스웨덴 시민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1928년 당시 한손의 '인민의 집'이 구체적인 정책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인민의 집'은 사민당이 지향하고자 하는 정치적 아젠다에 불과 했다. 당시 스웨덴 집권 정당은 중도 보수 성향이었고, 한손의 '인민의 집'은 1928년 선거의 패배 이후 사민당의 변화를 위한 하나의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1930년대 스웨덴 시민들의 삶은 불안정하기만 했다. 실업율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으며,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의 파업은 줄을 이었으며, 기업들은 이러한 파업을 막기 위해 아예 작업장을 폐쇄하기 일쑤였다. 사회의 갈등 증폭되는 삶의 불안정은 노동자 뿐만 아니라 중산층의 삶에도 어둡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던 1931년 5월 14일 스웨덴 북부의 작은 마을 오달렌에서 파업 행진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군대가 총을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당시 마을 제재소에서 일하던 노동자는 노예 계약과 다름 없는 근로 계약과 낮은 임금으로 파업 시위를 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막기 위해 사측은 제재소를 폐쇄하며, 노동자와 극한 대립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깃발을 들고 트럼펫과 북을 치며 행진하던 시위대를 향해, 말을 탄 경찰들이 군인들에게 발포 병력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당시 총격으로 5명의  무고한 시민이 죽게 된다. 오달렌 사건의 비극을 영화로 만든 영화 '오달렌 31'(1969)를 보면, 오달렌이라는 작은 마을에 드리워졌던 실업이라는 생활고와 미래에 대한 암울함 그리고 총격으로 인한 시민들의 공포와 비극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 비극적인 사건은 스웨덴 전역에 충격을 주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 사건 이후였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의 시각은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좌파를 지지하는 신문과 정당은 오달렌 총격사건을 '살인'으로 규정하고, 당시 발포를 명령한 경찰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반면 당시 우파 정부와 우파 지지 신문들은 이들의 발포가 시위대의 분노로부터 무고한 시민과 본이들을 방어하기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하게 된다. 사건의 처리 역시 시위대 그러니까 노동자측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발포를 명령한 대위는 법정에서 1심에서는 유죄를 선고 받았지만 이후 항소심과 대법원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되었으며, 당시 오달렌 지역 주지사 역시 무죄를 선고 받는다. 반면 시위에 참석한 노동자들의 경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는데, 당시 시위대 지도자로 주목된 노동자는 2년 반동안 강제 노동을 선고 받았고, 부상을 당하거나 군대의 총격으로 사망한 노동자 5명의 노동자에게도 어떤한 손해 배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작은 마을 오달렌에서 일어난 사건은 경찰의 과잉 진압과 시위대의 사망이라는 비극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사건을 수습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스웨덴은 당시 사회가 갖고 있는 극명한 대립의 지점(좌파와 우파, 자본가와 노동자)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달렌 사건은 극명하게 갈라지는 이념의 전쟁으로 치닫 았으며, 이러한 갈등의 간격은 좀처럼 좁아질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노동자들의 희생은 정치적 이념의 싸움 속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갈등과 대립이 반복되었던 스웨덴은 그렇게 침몰하지 않았다. 


오달렌 사건은 사민당에게도 충격이었고, 당시 보수정당의 대응을 사민당을 강하게 비판하게 된다. 하지만 사민당은 양분되어 서로를 향해 끝없는 바판과 증오를 보이는 사회를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 앞에서 더 이상의 스웨덴은 존재 할 수 없다고 사민당 생각한다. 오달렌 사건으로 사민당 역시 당내 갈등이 있었지만, 사민당은 당내 강경파를 설득하고 결속력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된다.  또한 오달렌 이듬해 선거에서 좌파 정당인 사민당은 전통적으로 우파 성향이 강한 농민당(지금의 중앙당)과 정책 연대를 함으로써 1932년 총선에서 승리를 한다. 계급 정당에서 국민의 정당으로 사민당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한손이 제시한 '국민의 집'이 스웨덴 사회의 갈등과 모순을 해결 하는 방법으로 그 구체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1932년 선거를 시작으로 사민당은 1974년까지 40여년간 장기 집권하며, 그들이 내세운 '국민의 집'은 현재의 스웨덴식 복지국가로 실현되게 된다. 


사민당의 선거 승리는 예측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오달렌 사건으로 촉발된 사회 갈등의 모습은 당시 스웨덴 시민들에게 갈등만으로 이 사회가 더 이상 유지 될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당시 시민들의 선택은 갈등의 양극단에 서 있는 정당이 아니라 시민들의 삶의 위해서는 좌우 연정할 수 있는 정당 그리고 정의와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의 집'을 만들우 줄 사민당을 선택하게 된다. 


당시 노동자와 시민들은 그들의 선택이 지금의 복지국가의 초석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을까? 또한 사민당 역시 본인들이 40여년 넘게 장기 집권을 하게 될 것이라 예상이라도 했을까?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스웨덴 사람들은 본인들의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한 바램과 소망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스웨덴에 있는 동안 한국에서는 참 여러 일들이 있었다. 

촛불 시위, 대통령 탄핵, 새로운 대통령...


상식 밖의 일들을 목도하면서 나는 화도 내보고 절망스런 한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광화문에 모인 그들을 보면서, 희망을 품었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지 못하는 처지가 부끄럽기도 했다.  


촛불의 힘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한 대통령을 몰아 내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다. 

그랬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다. 


하지만, 이것이 촛불 운동의 성과는 될 수 있어도 최종 목표는 아니다. 

그 당시 우리가 진정으로 바랬던 것은 부패하고 무능하기 그지 없는 대통령을 탄핵 시키는 것도, 새로운 대통령도 아니었다. 물론 원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의 시작은 무능한 대통령의 측근 비리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버드 대학교수의 강의를 담아 만든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그때, 

마이클 샌델 본인 조차 한국에서 본인의 책이 무슨 연유로 베스터 셀러가 되었는지 놀라워했다던 '정의'에 대한 열풍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책이 가진 장점도 많지만, 그 책이 가진 제목의 힘이 아니었을까?

어느 순간 부터 이 사회에 정의(正義, justice)가 부재(不在)하고 있다고 우리 모두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부재한 정의를 찾고자 우리는 미국의 어느 대학교 교수의 책에 그렇게 열광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부재한 정의를 단 한 권의 책에서 찾을 수는 없었다. 


세월호가 그렇게 비참하고 허무하게 가라 앉던 모습을 보면서, 

정의와 가치가 사라진 땅에 사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나만 잘 살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처절한 결과를 가져 왔는지 우리는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촛불을 만들기 위해 그 추운 겨울 그렇게 광장에 하나 둘 모여 시대의 과업을 시작하기로 했던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국가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에 옮겼던 것은 아닐까?


나의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삼촌의 시대적 과업은 해방, 발전, 민주화로 명명 할 수 있지만, 이들의 깊숙한  본질은 바로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것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사람답게 살고자 한다. 하지만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닌 우리는 이제 이 국가와 사회 그리고 시대의 가치와 정의를 새롭게 혹은 바꾸기를 원한다. 


촛불 시위, 탄핵 그리고 새로운 대통령의 선출로 이어지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나는 지금 우리는 우리 역사 안에서 풀리지 않았던 매듭을 풀어야 하는 그 마지막 세대이자 그 시간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새 정부가 들어선지 일년이 지났다. 혹자는 적폐청산을 이야기 하고 혹자는 이것이 정치보복이라 이야기 한다.

동일한 행위를 두고 정치적 프레임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의 시대적 과업은 이제 해방 후 70여년이라는 우리의 역사에 대해 객관적이고 주체적인 시각을 갖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동안 역사의 한켠에 묻어 두었던 많은 사건과 아픔을 이제는 풀어 놓고 역사로 기록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아니하는가? 더 이상 좌와 우로 나뉜 이데올로기의 편 가름 안에서 헤매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기득권의 오만과 부패에 대해 우리는 냉정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이다. 


1932년 스웨덴 시민들이 한 선택처럼 우리도 그렇게 선택을 하였다. 

우리의 힘으로 부패한 정부를 탄핵 했으며, 그리고 새로운 정부를 선출하였다. 

우리가 한 선택이 과연 어떠한 결과로 되돌아 올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후에 역사는 기록해 줄 것이다. 그리고 후손들은 우리의 선택을 판단해 줄 것이다. 

1932년 스웨덴 시민들의 선택은 현재 복지국가 스웨덴을 만들었다. 

2017년 우리의 선택은 과연 어떠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낼 것인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한가지는.

선택만으로 모든 것이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1932년 이후 스웨덴으 어떠한 길을 걸와 왔는가? 선택을 지키기 위한 일이 어쩌면 선택하는 순간보다 더 길고 어려운 과정이며 힘든 일일 수 있다. 


2017년 우리에게 정의로운 국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을 했다. 

이것이 끝은 아니다. 

우리는 무엇이 국가이고, 

어떤 시민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시대의 가치와 정의를 세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세월호를 그렇게 보냈지만,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갖고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던,

우리의 시대적 과업이다.



4년만에 바로 세워진 세월호 뉴스를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지 1년이 된 날이기도 하다. 


촛불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만약 우리가 지난 그 추운 겨울 광장에서 들고 있었던 촛불을 잊는다면, 

우리는 다시 어리석은 투표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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