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도로를 두고 양쪽으로 있었던 가게들은 부산 광안리에 자리 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들이 경북보일러, 경주국밥, 대구보일러, 김해통닭등 타 지역 이름을 붙였다. 상대적으로 장사가 잘 되었던 만화가게는 ‘크로바’였다. 이 가운데 김해통닭은 아직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장사를 계속 하고 있다.
우리집은 이불가게를 했는데, 모친의 드넓은 성품을 느낄 수 있게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자신들의 출신 도시이름이나 유치한 이름 따위를 붙이지 않았다. 우리 가게 이름은 ‘동양 이불점’, 지구의 반이라도 접수할 포부가 있으셨나 보다.
나를 매번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려서 울음보를 터트리게 만든 경북보일러 아저씨는 동네에서 가장 좋은 오토바이를 가지고 계셨다. 좋은 오토바이 때문이었는지, 바람이 한번 나서 들켰고, 동네가 한번 시끄러워졌던 적이 있다.
고향이 평택임에도 대구보일러라는 가게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집은 우리집과 무척이나 친했는데, 지금까지도 왕래가 활발하다. 이런 이름들은 너무 오랫동안 불려서, **댁 이런 호칭들처럼 사용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지금도 김해통닭집에 닭튀김을 주문하면 ‘여기 이불집이데요.’라고 말하고, 세탁소에서 옷을 찾으면 옷에는 ‘동양이불’이라고 적혀있다. 어머니에게 ‘동양아~’라고 부르시는 분들도 있고.
가게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첫집이었던 우리집은 꽤 장사가 잘 된 편이었다. 일하는 사람이 4~5명 정도였고, 배달하는 사람도 두고 있었으니, 규모가 조금 있는 가게였다. 몇 십년 전이지만 혼수이불로 200만원어치를 하는 사람들이 이용했던 가게이기도 했으니 솜씨도 꽤 좋은 편이었고 ,어머니 의 장사수완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못번다는 이야기는 못하는데, 우리집은 자주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유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셨던, 기어이 무언가를 하고야 마셨던 부친이 적절한 타이밍에 터뜨려주었던 각종 ‘사고’들 때문이었다. 아파트로 이사갈 돈을 하루면 된다고 해서 남 빌려주었다가 떼여서 지금껏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게 만들었고, 부동산 투자를 하신다고 돈을 부었던 곳이 그린벨트에 묶인 돌산이어서 돈을 회수하지 못했고, 양식업에 야심차게 투자하셨다가 한동안은 매일 멍게만 주구장창 먹을 수밖에 없게 만드시기도 했다. 가죽가공공장을 하시다 망해서 나에게는 꽤 여러 개의 핸드백이 있었다. 그것 뿐 만이었겠는가? 본인은 더 답답했겠지만, 그 사고 처리는 항상 어머니의 몫으로 돌아왔고, 그렇게 힘들게 번 돈으로 메우며 사셨다.
조실부모한 7남매의 장녀가 물난리로 세간살이를 모두 잃어버리고, 남은 것이라고는 초등학교 졸업기념 사진 한 장 밖에 없는 거지가 되어 있었을 때, 멀리서 쌀 반가마니를 어깨에 메고 자신 앞에 등장한 훤칠한 남자에게 마음을 허락하지만 않았더라면, 성실한 공무원의 부인으로 큰 어려움 없이 살았을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아쉽게도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 다음으로 넘기도록 하겠다.
너를 이뻐해서 그런다
어느 동네가 그러했듯이 우리 동네에도 장애를 가진 ‘형’이 있었는데, 먹는 것을 조절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덩치는 컸고, 덩달아 힘도 세었다. 바보형은 나와는 별다른 에피소드가 없었다. 바보형이 살던 집은 지금 그 곳을 지나가면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이지만, 당시 꼬마였던 내가 느끼기에는 좀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바보형의 집도 상가들처럼 도로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골목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나에게 그 골목길은 미지의 세계 같은 곳이었다. 약간의 두려움과 이질감들이 존재하는. 그렇기 때문에 자주 갈 일이 없었고, 슬쩍 한 번씩 쳐다보게 되는 금기의 땅 같았다.
바보형은 밖에 자주 나오지 않았는데, 그런 형이 힘껏 뛰어다닐 때가 있었다. 나의 작은 언니가 밖에 나와서 놀 때였는데, 동네에서도 가장 이쁘다고 할 만한 미모였기 때문이었을까? 그 형은 작은 언니에게 자주 반응을 보였다. 행동제어가 안되었기 때문에 어디로 튈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우는 없었는데, 작은 언니에게 만은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인지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영화나 소설처럼 아름답게 우정을 나누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 형의 반응은 작은언니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쥐고는 놓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장면은 바보형이 양손으로 힘껏 작은 언니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있고, 작은 언니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는 모습이다. 그 순간 우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멀리서 그저 바라보고 있으면, 골목안 집에서 누군가가 나와서 바보형을 때리면서 떼어내곤 했다.
덩치가 꽤 컸기 때문에 떼어내는 게 쉽지 않았는데,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작은언니는 고통 속에 있었고 눈물은 많아져만 갔다. 그렇게 머리카락이 한 주먹 빠지고 나서야 풀려난 언니는 울며불며 엄마에게로 달려갔지만, 나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께서 그 어떤 항의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작은 언니에게 ‘너를 이뻐해서 그런다’고만 하셨는데, 그 말을 슬쩍 옆에서 들으면서 나는 내가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컸지만, 내심 어머니에게 인정받는 작은 언니의 미모가 부럽기도 했다.
바보형의 어머니는 자주 우리집에 왔다. 얼굴에 점이 있었던 아주머니 얼굴은 지금도 기억나는데 항상 피곤하고 힘들어보였다. 당시에는 시설로 보내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바보형이 돌아다니고, 아이들은 도망다니고 하는 풍경이 꽤 자주 연출되었다. 나는 금기의 땅 같았던 골목으로 안 가는 방식으로 바보형과 거리를 두었고,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동네에서 뛰어다니고 놀 시간이 줄어들게 되면서 점점 더 기억에서 사라졌다.
너를 좋아해서 그렇단다
그 바보형이 내 인생에서 사라져갈 즈음, 또 다른 바보가 내 인생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같은 반에 있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입학식 날 나는 바로 반이 바뀌었는데, 바뀐 반으로 가방을 챙겨서 가니 이미 자리 배치가 다 되어 있었다.
잔뜩 주눅이 들었고 뻘줌 함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던 나에게 선생님은 빈자리로 가라고 했다. 옆에 앉아 있는 나의 짝지는 인물이 아주 좋은 남자아이였다. 머리카락은 힘이 있어 붕붕 떠 있었고, 얼굴을 하얬고,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지금 쓰는 표현을 빌리면, 그야말로 훈남.
그 훈남은 항상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는데, 짝지인 나와 교류하는 방식은 나를 울게 만드는 거였다.
나는 위축감과 더불어 짝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학교를 다녔다. 동네 바보형은 작은 언니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지만, 이 아이는 달랐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나를 때렸다. 학교에서 한마디도 안했던 내가 유일하게 표현한 방식은 울음이었고, 선생님은 항상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 아이는 항상 어머니와 등하교를 함께 했는데, 그 어머니는 우리 가게에 자주 오셨다.
사과를 하셔야 했고, 미안함의 표현으로 이불을 자주 사가셨다. 강 같이 넓은 마음을 가졌던 어머니는 그럴 수 있다며, 너그럽게 받아들이셨는데, 나는 약간 섭섭함도 있었지만, ‘너를 좋아해서 그렇단다’라는 말을 믿으며 참았다. 어머니는 작은 언니에게 했던 것처럼 ‘너가 이뻐서 그렇단다’'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이 아이에게 잘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동네 바보형에게 느꼈던 두려움과는 다른 알 수 없는 연민과 애틋함 그리고 책임감이 생겼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아이와 친해지려고 다가갔는데, 결과는 영 좋지 못했다. 그냥 무사히 아무 일이 없이 지나가는 날 보다 나를 울리는 날이 더 많았고, 그 아이의 어머니가 우리 가게에 오는 횟수는 늘어났다. 선생님은 결단을 내리셔야 했다.
중간 과정은 잘 모르겠다. 생불(生佛)에 가까운 어머니께서 전학을 시켜달라고 했을 리는 없고, 나 역시 직접적으로 선생님에게 나의 고통을 호소하거나 요구사항을 말한 적은 없었다. 아니, 없었을 것이다. 얼마 뒤 그 아이는 우리와 같은 학교를 다니지 않게 되었고, 특수학교로 보내졌다.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다. 나 때문에 그 아이가 다른 학교로 가게 된 것처럼 느껴졌다. 고자질을 한 것 같은 마음이 계속 남아 있었는데, 그 마음이 잘 지워지지 않았다. 동네에서 그 아이와 어머니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자주는 아니었지만, 몇 번 봤다.
내가 중학생 정도였을 즈음에 봤을 때는 어머니의 키보다 훨씬 커있었고, 여전히 훈남포스를 풍기고 해맑게 웃으며 머리카락은 방방 뜨고 즐겁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때는 그냥 반가움이 컸지만, 아는 척을 하진 못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바람이 참 좋았던 어느 날, 내가 화장을 하고 다녔던 나이가 되었을 때 만나게 되었는데, 멀리서 봐도 그 아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멋진 미소는 여전했다. 힘이 좋은 머리카락도 여전했고, 세상 모두가 즐거워 보이는 걸음걸이도 좋아보였다.
하지만, 그 옆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작아진 듯 하고, 얼굴에는 피곤함과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난 어머니가 함께 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모습은 반가웠지만,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그날따라 찬란했던 햇살과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좋아서였을까? 정성스럽게 하고 나온 화장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얼굴은 엉망이 되었고, 다시 집으로 가서 씻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다른 장애를 가진 자식을 가진 부모님들과 마찬가지로 자식보다 딱 하루 더 살다 죽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고 계시겠지. 나와 같이 늙어가고 있을 그 아이를 다시 만난다면, 다음에는 꼭 인사를 하고 싶다.
“짝지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