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2부)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2부) 목차
8화 300
9화 이런 수사관은 처음이지? 놀랬다면 미안해.
10화 더 매뉴얼, 기억전달자.
11화 다키스트아워(Darkest hour)
한 경찰관이 공소시효가 지난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는 1990년대 초 순경으로 들어와 지구대 근무를 했다. 그곳에서 무전취식 상습범을 만난다. 업주들 피해액이 300만 원에 달했다. 신고를 받고 나가면 업주 대다수가 돈 받는 것은 포기한 채 제발 데려만 가달라고 사정했다.
출동한 경찰은 무전취식범에게 술 깨면 돈을 갚으라며 훈계하고 내보내는데, 그날 밤 같은 사람이 다른 식당에서 또 무전취식을 했다는 신고가 들어온다. 그렇게 춥지 않을 시기였다.
새벽 한 시쯤 함께 출동한 선임은 뭔가 뾰족한 수가 있는 듯했다. 그는 무전취식범을 순찰차에 태워 수 킬로미터 떨어진 불빛도 없는 공터로 갔다. 그에게 순찰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그 이후는 영화 <킬빌> 한 장면 같았다. 그는 무덤에서 기어 나와 흙먼지 날리며 돌아온 우마 서먼처럼 밤새 걸어 지구대를 찾아왔다. 무전취식 범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경찰관이 나를 아무도 없는 데 놔두고 갔다!”
이 순경은 지구대를 마치고 경제팀으로 들어갔다.
경제팀 당직 단골은 무전취식범이었다.
무전취식 중 지구대 훈방에서 끝나지 않고 조사가 필요한 때도 있다. 죄명이 ‘사기’이므로 경찰서 경제팀 당직 직원이 수사해야 한다.
야간에 무전취식이 한 명 들어오면 대부분 취한 상태라 술이 깰 때까지 사무실에 앉힌다. 시비를 걸거나 바지를 벗으려고 하는 것 같은 난동으로 사무실은 엉망이 됐다.
이 순경은 경제팀 근무가 끝나자 바로 지능수사로 넘어갔다.
그 후 실력을 인정받아 인천지방경찰청 수사2계로 들어왔다. 당시 수사2계장은 김헌기였다.
수사2계 직원들은 첩보수집 능력도 남달랐다.
그 때문에 수사2계 직원들은 김헌기 계장에게 동료 M을 내보내 달라고 하소연했다. M은 특이하게 직원들 행동을 살피고 일정을 본인 수첩에 일일이 적는 버릇이 있었다. 직원들은 불편해서 같이 근무를 못하겠다며 아우성이었다.
좋은 상사가 되고 싶었던 김헌기는 직원M을 불러 면담을 했다.
“나에게 약속을 해. 앞으로 선배들과 잘 화합하면서 수사를 잘할 것 같으면 그냥 있게 할 것이고.”
직원 M은 약속했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얼마 안가 김헌기 계장은 지역 언론에 대문짝만 하게 보도가 됐다. 직원 M이 제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김헌기는 이때부터 개혁에 대한 주관이 생긴다.
김헌기 개혁론 300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개혁에는 항상 저항세력이 생긴다. 개혁의 성패는 저항세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검토가 끝난 다음에 개혁해야지. 그걸 준비하지 않으면 개혁 실패뿐만 아니라 본인도 골로 간다.>
이러한 이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김헌기는 2008년 3월 서천경찰서장 시절에는 성공적인 개혁을 이끌어냈다.
2007년 12월 태안 기름유출사고는 그 피해가 서천을 거쳐 전라남도 신안까지 미쳤다. 정부는 당시 어업을 하는 주민에게 보상했다. 김헌기는 서천서장으로 부임하면서 사건 보고를 받았다.
다른 지역에 사는 노인을 그 동네에 사는 것처럼 꾸며 보상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허위 보상을 주도한 이는 마을 이장이었다. 이미 전임 서장 시절 진정서가 들어왔지만, 수사 진척이 없었다.
경찰서에서 노인들은 불러도 잘 못 듣는 척했다. 큰 소리로 할아버지를 부르면 강압수사를 했다고 민원을 넣었다. 그 배후 역시 이장이었다. 김헌기는 기록을 검토하고 나서 결심했다.
“서천 그 이장은 용납 못 하지. 불쌍한 노인들을 부추겨서 민원 일으키고 수사관 곤란하게 만들고. 법이 무섭다는 것을 보여줘야겠다.”
수사가 더딘 이유는 좁은 지역이다 보니 대부분 연결돼 있기 때문이었다. 조사받은 노인과 경찰서 직원이 친인척이기도 했다. 그 지역 출신 수사진은 대대적으로 물갈이했다. 서천 출신이 아닌 수사관에게 사건을 맡겼다. 그리고 김헌기 서장과 둘이서 수사를 진행했다.
본격적으로 수사하자 서천경찰서 정문 앞에서 할아버지들 수십 명이 집회를 시작했다. 집회주최측은 ‘300명 추산’으로 집계했다. 결국, 이장은 구속됐다. 그 후에 서천은 아주 조용해졌다고 한다.
김헌기는 당시 개혁 대상이 된 계장과 수사관들이 큰 불만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비결은 무엇일까? 김헌기는 자신은 행정을 공부했다고 강조했다.
“반드시 반대세력이 나온다. 반대세력에 대한 대안과 처리, 보완 없이 행정개혁 못 한다. 이걸 제대로 못 하면 본인이 골로 간다.”
조직 변화 방식에 대한 주관이 뚜렷했던 김헌기는 개혁 대상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나는 본인 희망 보직을 쓰라고 했어요. 가고 싶은 데 90%는 가게 해줬지. 그러니 말이 없어.”
당시 직원들에게 분위기를 물었다. 뒤에서 서장 욕을 많이 했다고 한다.
행정에 자신 있던 김헌기는 2015년 12월 경찰청 수사기획관이 된다.
김헌기는 오랫동안 수사를 하면서 검사실 모델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수사는 집단지성이다. 여러 사람이 협의해서 가장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게 수사며 지금 경찰처럼 혼자 수사하면 수사력과 전문성 두 가지 다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헌기는 소팀제 운영방식을 도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현장 직원들 반대가 거셌다.
팀장을 늘리면 수사는 안 하고 결재하는 팀장이 늘어나 결국 수사관에게 배당되는 사건만 늘어난다고 우려했다. 현실적으로 그만큼 지휘할 만한 역량을 가진 팀장이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누구보다 김헌기가 잘 알았다. 김헌기는 계장, 과장 시절부터 큰 사건을 맡으면 피의자 신문조서를 모조리 검토했다. 300건은 족히 넘을 것이다. 실력은 천차만별이었다.
2014년 경찰청 강력범죄 수사과장(현재 형사과장) 시절, 안산 아내 암매장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남편이 아내를 살인하고 암매장 한 사건이다. 당시 뉴스에서는 남편이 가정폭력으로 불구속 수사를 받는 중에 아내를 살해한 것으로 보도했다.
김헌기는 경찰이 어떻게 조사했는지 궁금했다. 김헌기는 기록부터 확인했다. 경찰청 내부망에서 수사 기록이나 피해자, 피의자 신문조서를 받아볼 수 있었다. 피해자 신문조서를 보자 의문이 바로 해결됐다.
-어디 맞았나요?
-◯월 ◯일 ◯◯에서 핸드폰으로 한 대 맞았습니다. 끝.
가정폭력은 대체로 반복적이고 상습적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피해자에게 과거 피해 경험과 남편 성향 등을 확인해야 한다. 입체적, 종합적으로 수사했다면 피의자는 분명히 구속감이었다. 그랬다면 피해자 신변도 보호됐을 것이다.
김헌기는 2016년 경찰청 수사기획관 시절 전국에서 벌어지는 큰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특히 피의자 신문조서는 빠짐없이 검토했다. 한 수사관은 김헌기 손을 거치면 기존 수사기록은 '쑥식이 판'이 된다고 했다. 난장판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다.
2016년 1월 부천 초등생 토막 유기사건이 벌어졌다. 목사 부부가 입양한 아이를 살해하고 토막 내서 냉장고에 수년간 보관한 사건이다. 김헌기는 지방청 형사과장에게 전화로 지시했다.
“가장 우수한 조사원을 투입해라.”
범인을 잡는 형사들은 보통 실력이 출중하다. 하지만 당사자 조사는 또 다른 재능이 필요하다. 아동학대에서 쟁점은 ‘폭행치사’로 보느냐 고의성 있는 ‘살인’으로 보느냐이다.
즉, 학대 과정에서 이런다고 죽기까지 하겠느냐고 생각했다면 폭행치사가 된다.
이렇게 때리면 아이가 죽을 수도 있지만 너무 속을 썩이니 죽어도 할 수 없다는 마음이 있었다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에 해당한다.
가해자는 대부분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살인 의혹이 짙다면 경찰도 그쪽에 맞춰 수사하게 된다.
수사기록에서 미필적 고의에 대한 정황과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평소 피해자 이야기, 컴퓨터 검색, 주고받은 문자 등 정황을 보고 그 사람 의사를 경찰이 밝혀내는 것이다.
김헌기는 수사기록을 보고 미필적 고의에 의한 구속요건을 충족했는지 살피면서 미심쩍은 부분을 지적했다.
이렇게 수사를 모두 끝내면 수사결과에 대한 수사관 판단과 의견이 나올 것이다. 수사에 대한 종합작품으로 이게 바로 수사결과보고서다. 사실관계를 설명하며 법률적 판단이라는 핵심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작성된다.
수사가 미진하거나 법률적 지식이 부족하면 수사결과보고서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김헌기는 한 시국사건 수사결과보고서를 검토하게 됐다. 작성자는 ◯◯경찰서 지능수사과 K경감이었다.
시국사건은 공안사건처럼 수사보고서나 수사서류를 작성하는 게 일반 사건과 다르다. 적용 법률도 특별법이고 필체나 용어 사용이 녹록지 않다.
김헌기 수사기획관은 당시 K경감 실력을 '손댈 곳이 없다'고 평가했다. 김헌기가 경험한 수사관 300명 중 최고였다.
(계속해서 제2화. 이런 수사관은 처음이지? 놀랬다면 미안해)
김헌기의 수사인생매뉴얼 (1부)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