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청의 실제 관측이 어땠었는지, 내 허약한 신체의 건강상태가 어땠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것들은 각각 기상청, 그리고 판교 어느 후미진 골목에 위치해 있던 이비인후과의 의사 선생님이 기억할 '그것들'이다. 오롯이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나의 기억 속 2017년 12월의 신촌은 분명, 추웠던 것이 맞다.
스무 살 어린 날에 첫 소개팅을 했던 팀 노리타는 상호명을 팀 1994로 바꾸더니 어느 순간 폐업을 했고, 특이한 이름의 돈까스를 팔던 하루는 어느 순간 위치를 옮겼으며, 입김을 후-후 불어대며 부글부글 끓어대던 떡볶이를 한입에 넣곤 했던 먹쉬돈나 역시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던, 나는 어느새 졸업을 1년 앞두었던, 2017년 12월이었다.
그 당시 나는 보잘것 없던 대학교 3학년을 후련하게 떠나보내고자 했고, 어쩐지 숫자 하나 바뀌는 것뿐인 대학교 '4'학년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저 2017년이 2018년이 되는 것이었고, 3학년이 4학년이 되는 것이었는데, 무엇이 그리 두려웠던 것인가. 단순히 숫자 1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더욱 무거워지는 것이 겁났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이어트로 시선들의 무게를 감량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미안, 우스갯소리다.
그런데 정말로, 살을 빼듯 그 시선들을 내려놓고 '야호'를 외친다고 해서 해결될 두려움은 아니었다. 시선들은 외부에서 왔지만, 두려움은 내부에서 피어났다. '야호'를 외쳐봤자 나의 오늘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소득분배론의 기말고사를 치르기 전의 '나'와, 소득분배론의 기말고사를 치르고 난 '나'의 차이는, 시험을 망쳐 더러워진 기분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대학교 4학년의 1년을 앞둔 대학교 3학년이었고, 그 사실이 두려웠던 대학생이었다.
바야흐로 대학교 3학년 2학기 겨울방학을 앞둔 나는 여타 대학생들처럼 진로에 있어 갈림길에 서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때가 묻는다.
이는 내가 2년 하고도 6개월 전을 반추하며 떠올린 잔상들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문장이다. 실제로 내가 '네이버 메모'에 2017년 말 써놓았던 것으로, 그 당시 내가 살아가며 느꼈던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하려고 움직일 때마다 때가 묻는 기분을 느꼈다. 흔히들 흰색 옷 입으면 옷에 때 탄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아무 경력/경험 없는 흰색 옷 같은 내가 무언가를 해본답시고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때가 타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한편으로 유약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수룩했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세상에 태어나,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펜을 잡고 공부를 했던 삶을 살아왔으므로, 유약했고 어수룩했다. 때가 묻는 것이 뭐가 그리 무섭다고, 가만히 있으려 했었을까.
대학교 4학년이 되는 것도 두렵고, 대학교 3학년으로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두려우면 대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딜레마였다.
결국에는 내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달리 말하면, 내가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생각, 나의 주변, 나의 학교, 나의 전공 등에서 모두 벗어나 제3자의 시선에서 나를 관조해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의사결정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 나는 경제학을 공부했다. 미시경제학에서 다른 건 몰라도 꼭 기억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교수님이 강조했던 그것이 떠올랐다.
합리적 경제주체는 주어진 예산제약 하에서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의사결정을 한다.
어릴 때부터 나는 나 스스로가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해왔다. 남들보다 조금은 공감 능력이 떨어질 지는 몰라도, '기다 아니다'를 명백하게 판가름하는 데 있어서는 능숙했던 어린 아이였다. 이제는 나 자신에 대해서 '기다 아니다'를 명백하게 판가름하고, 내가 가진 것들을 고려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의사결정을 할 때가 된 것이었다. 더 이상 움직일 때마다 몸에 타는 때를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의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선택을 과감히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