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의 나
25년간 옆방 어딘가선 부모님이 틀어놓은 TV 속 연예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5년간 분당과 서울을 오가는 9300번 버스에 서서 졸기 일쑤였던, 내가 드디어 입 밖으로 꺼낸 그 말. '나 ~할래.'라는, 의지에 가득 찬 표현도 평소에 영 하지 않던 터라 인상적이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독립'이라는 단어가 내 입에서 나오게 될 만큼, 나는 제법 어른이 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집에 있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아이였다. 학교가 끝나면 친한 친구와 오렌지 슬러시 한 잔 진득허니 하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고, 그 외에 웬만하면 집에서 혼자 놀았다. 지금 표현으로는 '자발적 아싸' 기질이 꽤나 있었던 것이다. 집에는 따뜻한 밥과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이 있고, 작은 내 방에는 어떤 게임이든 할 수 있는 데스크톱과 푹신한 이불이 놓인 침대가 있었다. 그것만으로 나는 족했다.
그러나 그 후로 10년이 흘러, 그것만으로 나는 족할 수가 없는 상황에 처했다.
중학생 시절 한 주도 빠짐없이 시청했던 TV 프로그램은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로 인해 어느덧 폐지 수순을 밟게 되었고, 고등학교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라디오를 들으며 '이 가수는 꼭 뜰 거야!'라고 확신했던 여자 솔로 가수는 어느덧 데뷔 10년을 앞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세상은 어제와 변함없이 똑같이 흘렀지만, 10년 전과는 분명 달랐다. 나 역시 10년 전의 꼬마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묻은 떼를 씻어내기 위해서는, 타인ㅡ설사 그것이 가족일지라도ㅡ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수 있는, 나만이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때로는 불쾌하고 좁아터진 방일 지라도, 온전히 나의 것이 나에게는 있어야 했다. 대학교 4학년의 '나'에게는 금융공기업에 앞서, 일단은 '나'의 집이 필요했다.
이런 연유로, 25년간 본가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나는 집에서 나와 내가 살 원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부모님께는 '금융공기업에 가기 위해서는 혼자 공부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설득했다. 아쉬움이 섞여 들었지만, 꽤나 흔쾌히 승낙을 받았다. 집안에서는 본래 로스쿨 진학을 제안했었다. 아무리 상황이 녹록지 않다 해도 어찌 됐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할 일도 다양해지고, 최소한 못 먹고 못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제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것에 찬성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끌리지 않았다.' 그것이 실로 어떤 길이든, 나의 소중한 20대 중 3년을 바칠 만큼 매력적인 길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주 강한 매력을 느껴도 공부하다 당면하게 되는 모종의 '현타'를 느껴 주저앉게 된다는 로스쿨 재학 중인 지인들의 만류도 이러한 판단에 한몫했다.
이에 반해 A매치 금융공기업은 그럴듯한 선택지였다. 내가 잘만 하면 수학 기간이 3년까지는 안 될 것이 분명했고, 어쨌든 단기적인 목표인 '합격'을 이루면 당분간은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매력적인 미래가 나를 끌어당겼다. 부모님에게 당장의 독립을 설득하기에도 좋은 이유가 되었으니, 이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어떤 나이 든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부동산의 도움으로 대학가의 원룸들을 전전해본 결과, 현실적인 벽에 부딪혔다. 경제학을 들이밀 필요도 없이 그냥 너무 단순하게도, '내가 원하는 조건에 비해 월세가 너무 비쌌다.' 사실상 몸만 뉘이면 장판이 대부분 뒤덮이는 방의 월세가 40을 훌쩍 넘기다니, 현실은 떼를 벗기기 위한 나의 의지보다도 훨씬 강력했던 것이다. 평생을 본가에서 살았으니, 이러한 물가의 흐름에 익숙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온실 속 화초, 그 자체였다.
온실 속 화초였기에, 더 열심히 돌아다녔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했다. 그동안 나의 눈높이는 많이 내려갔고, 생각보다 괜찮은 집들이 속출했다. 어느 정도 수요와 공급이 점점 교차하는 지점이 보일 때쯤 위 메모의 네 번째 선택지가 나에게 다가왔다. 세 번째 선택지와 큰 차이가 없는데 가격이 조금 더 저렴했다. 정확히 왜 저렴한지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저렴하다는 것은 무소득자인 내가 원룸을 고르는 데 있어서 무척이나 중요한 가치였기에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룸 주인과 부동산 할아버지가 가진 정보에 비해 바쁜 와중에 발품을 팔던 수도권 대학생의 정보는 볼품없었으니, 정보 열위자로서 역선택을 하지 않도록 이성의 끈을 놓지 않되, 최대한 가성비 좋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나였다,
소비자는 주어진 예산 제약 하에서 여러 가지 선택 가운데 총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선택을 한다.
결과적으로 그곳은 나의 첫 자취방이 되었고, 이후 소개할 다이내믹한 대학교 4학년의 나의 희로애락을 함께 해 준 고마운 공간으로 남았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