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J Jul 07. 2020

말,말,말.

독일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며

나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남편과 나는 그 아이를 '예삐'라고 부른다. 

우리는 독일 베를린에 살고 있다. 


2020년 6월 24일 아침. 

예삐는 오늘 성적표(Zeugnis)를 받는 날이라며 아침부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특별한 날이니 예쁜 옷을 입고 학교에 가야 한다며 옷장에서 입학식 때 입었던 분홍색 원피스를 꺼내 입고는 거울 앞에서 한참을 단장한다. 

초등학교 1학년 마지막 날. 예삐의 말대로 오늘은 베를린의 전 학년 아이들이 Zeugnis(조이그니스) - 이른바 성적표를 받는 날이다. 오늘 들었던 흥겨운 콧노래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들을 수 없게 되겠지? 

혼자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약 한 시간 후 학교에서 나온 예삐의 얼굴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성적표는 받았어? 우리 예삐 1년 동안 정말 수고했어." 하며 안아주었지만 얼른 차로 가자며 손을 잡아끄는 딸. '성적이 어떻길래 저러지? 많이 실망했나?' 살짝 긴장한 채, 차에서 잠깐 본 독일 초등학교 1학년 성적표는 A4용지 4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금은 한국의 초등학교 성적표가 어떻게 나오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A4용지 반절 정도 크기의 카드 형식으로 된 '생활 기록표'를 나눠줬었다. 각 과목은 '수,우,미,양,가' 다섯 개의 등급으로 간단히 평가되었고, 아래에는 선생님의 짤막한 코멘트가 적혀있었다.

독일 성적표는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독일어, 수학, 사회-과학 상식(Sachunterricht), 미술, 체육, 음악 총 여섯 개의 과목별 세분화된 평가 항목들이 표로 쭉 나열되어 있었다. 특히 중요한 독일어와 수학은 평가 항목만 24개나 되었다. 선생님의 코멘트도 상당히 길었다. 


문득 학기 중 진행됐었던 '학부모 회의(Elternabend)'가 생각났다. 

선생님은 학년 말에 성적표를 받게 될 텐데, 자유롭게 길게 서술한 성적표(Berichtszeugnis)와 과목별 짧은 텍스트로 이루어진 표 형식의 성적표(Indikatorenzeugnis)중 어떤 것을 받길 원하는지 부모들에게 물었다. 

초,중,고 12년 동안 종이 크기만 달랐을 뿐, 틀에 박힌 수,우,미,양,가 성적표만 받아온 나로서는 색다른 형식의 성적표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자신 있게 서술식 성적표를 원한다고 의사를 표현했다. 안타깝게도 24명 중 4명에 해당되어 오늘 난 표 형식의 성적표를 손에 들게 되었다.  

아직 1학년이라 그런지 성취도를 표현하는 방식이 사뭇 귀여웠다. 이른바 '피자 조각 성적표'. 까맣게 색칠된 원, 그러니까 피자 한 판은 매우 잘한 것, 피자 3/4 조각은 잘한 것, 피자 반 판은 그다음, 1/4 조각은... 음...

매의 눈으로 재빠르게 훑어보았는데, 피자 반 판도 더러 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있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던 아이였는데, 낯선 환경과 자기주장이 강한 독일 아이들 사이에서 잘 버텨준 예삐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날 우리는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 아주 크고 둥근 피자 한 판을.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독일은 선행학습이라는 개념이 없다. 

선생님의 수업 시간을 침해하는 요소라고 여겨져 절대 금하고 있다. 걱정 많은 한국 엄마는 '그래도 독일식 알파벳과 숫자 연습은 해서 보내야 하지 않을까?'라고 수없이 고민했지만, 학교장에게 불려 가는 게 무서워 결국 우리 딸은 진짜 아.무.것.도 모른 채 학교에 입학했다. 


역시 '언어'가 문제였다. 

생후 120일 때 독일로 건너왔지만,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아이에게 아직은 모국어가 더 익숙했다. 

1학년 초반에 예삐가 정말 자주 했던 말이 "나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였다. 

다른 애들은 다 아는 '물고기 비늘'이라는 단어를 예삐는 모르는데, 어떻게 듣고, 읽고, 말하고, 쓰고, 일상을 표현하고, 다른 사물을 비교하고, 수업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독일 학교의 수업 시간에서는 과목을 막론하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려면 선생님의 지목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길이도 얼마 되지 않는 팔을 하늘 높이 추켜올린다. 그것도 모자란다 싶으면 검지 손가락마저 동원한다. 우리로 말하면 "아는 사람 손들어!"인데 독일 아이들은 멜덴(melden)이라고 부르는 이 행위에 매우 아주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멜덴을 많이 해야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예삐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 아이들은 이 과정에서 종종 지적을 받는다. 소극적이라고. 

여담이지만, 남편이 석사과정을 밟을 때 하루가 멀다 하고 수업 시간에 교수와 학생이 말싸움을 벌여 처음엔 많이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치열한 논쟁 후 쉬는 시간에 함께 맞담배를 피우며 웃는 모습은 더 적응이 안 됐다고...) 어디 수업뿐인가. 가끔 독일 국회의원들의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이처럼 자기 생각을 끊임없이 피력해야 하는 독일 수업 분위기에 예삐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쭈구리처럼 앉아만 있었고, 덕분에 남편과 나는 제일 첫 번째 순서로 학부모 개별 면담에 불려 가야 했다. 


독일어와 수학 선생님이 제일 궁금했던 건 예삐가 '말'을 할 줄 아느냐는 것이었다. 수업 시간에 예삐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깊은 한숨이 나왔다. 우리는 언제, 왜 독일에 왔으며 우리 딸은 말을 아주 잘하고, 활달하지만 그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시간이 다소 필요한 아이라고 설명했다. 유창한 독일어는 아니었지만, 우리의 진정성 있는 모습이 통했던 걸까. 걱정 가득했던 두 선생님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들은 예삐에게 필요한 것들을 차분히 조언해 주었다. 그리고 기대감을 표해주었다.

상담이 있고 얼마 후, 학교에서 돌아온 예삐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독일어 선생님에게 "로켓이 발사되는 것처럼 발전하고 있다."라고 칭찬을 들었다며 아주 행복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엄마, 나 나중에 선생님이 될 거야!" 


선생님들이 무엇을 조언해 줬는지, 부모와 예삐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짧고도 길었던 1년의 시간과 독일 교육에 대해 천천히 글로 써 내려가려고 한다. 

지극히 평범하게 독일에서 살아가는 우리 부부가 수줍음 많은 예삐를 학교에 보내며 함께 울며, 웃으며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