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일기 중에서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 "예, 그런데 왜요?" "응, 매운탕 먹으러 가자고!" 올봄에 그 형님 댁에 있는 과수나무 전지를 해 드렸더니만, 언제 밥 한번 사 주어야겠다고 벼르고 계셨던 모양이다. 지난번에도 물어보셨는데 그때는 과수원 일로 바빠서 미루어야 했다. 이제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 되어가니 다시 가자고 하시는 것 같다.
그 형님은 은퇴할 나이가 훨씬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직장에 다니신다. "이제는 쉬려고 하는데 회사에서는 자꾸 나오라고 하네!" 농담 섞인 엄살에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한다. "그래도 나와서 일하라고 할 때가 좋은 거죠!" "아직 힘도 있고 기술도 있으니까 회사에서 계속 나오라는 거지!"
그래도 우리 중에서 아직 직장도 다니시고 벌이도 제일 좋은 분이시니 매운탕을 얻어먹어도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굳이 아내까지 불러 함께 점심을 사주겠다고 하시는 데는 분명히 또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그 형님은 회사일 말고도 틈틈이 밭농사도 지으시고 과수도 키우신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밭농사는 잘 하시는데 과수는 방치해 놓고 사신다. 내가 그 형님 댁에 가서 과수나무 전지를 해 드린 것이 벌써 3년째이다. 해마다 전지를 해 드리면서 전지 법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건만, 배우려는 생각이 영 없으신 것 같다. ‘귀찮게 머리를 쓰느니 차라리 저 녀석 불러다 해 달라고 해야지'라고 생각하시는 게 틀림없다. 그러자면 점심 한 끼라도 사줘야 내년에도 또 부탁하기 쉬울 테니까.
그 형님 집에는 온갖 종류의 나무들이 다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병에 약한 나무들은 저절로 정리가 되었다. 방제를 거의 하지 못하는데 맛있는 복숭아나 자두나무가 집에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차피 해마다 벌레들이 다 먹고, 집주인에게는 반쪽자리만 남겨주니까 말이다. 결국 많은 유실수들을 뽑혀버렸고, 지금 남아 있는 나무들은 매실, 체리, 대추, 포도와 같이 병충해에 강한 나무들뿐이다.
그러나 과수 말고 밭농사는 규모가 우리 집의 몇 배는 되신다. 올해도 고구마를 20단이나 심었다고 하시니까. 작년에 이어 올해도 노랑고구마를 심었는데 (품종이 무엇인지는 모르시고)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고 자랑을 하신다.
매운탕을 먹으러 가기로 한 주말에 비가 왔다. "내가 알아 둔 집이 있어. 좀 멀기는 한데 매운탕 맛은 끝내주거든! 갈 때는 내가 운전할 테니 집에 올 때는 내 차를 좀 운전해 줄래?" 아무리 점심을 사주는 자리라지만 매운탕에 소주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그냥 제 차로 가요. 제가 모시고 갔다 올게요."
그렇게 비 오는 날 한 시간은 족히 달려서 맛이 끝내 준다는 매운탕 집을 찾아갔다. 허름한 시골집에 (원래 이런 집이 맛 집인 경우가 많기는 하다) 주방장 겸 사장인 장년의 남자 한 분과 오늘 처음 일하신다는 아르바이트생 아주머니 한 분만 계셨다.
매운탕 맛은 몰라도 서비스는 엉망이었다. 비 오는 날이라 얼큰한 매운탕 생각이 간절한 분들이 많았나 보다. 먼저오신 손님 몇 팀이 계셨는데, 우리 음식이 나오기까지 한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했다. 또 준비해 놓은 밥이 없다고 반쯤 채워진 공깃밥 하나로 끝이었다. 더구나 그 밥마저도 늦게 나왔으니 찌개가 졸아 육수를 두 번이나 부어야 했다. 매운탕이 너무 짜져서 물만 몇 컵을 들이켰더니 배가 불러졌다.
그런데 그 형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끝내주는 맛'이라며 좋아하셨다. 찌개가? 아니면 소주가? 물론 비 오는 날씨에 둘 다 당기기는 한다. 하지만 그동안 그 형님이 맛없다고 하시는 음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원래 공짜로 얻어먹으면 다 맛있는 법인데 이번에는 잘 모르겠다. 더구나 밥도 없이 짜디짠 매운탕을 먹어야 했으니 정확하게 맛을 판단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공짜로 얻어먹었으니 나도 맛있는 체를 해야 했다. "맛있네요. 멀리까지 온 보람이 있네요!" 산전수전 다 겪은 지금은, 나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거짓말도 잘한다.
아무튼 맛은 그렇다 치고, 맛있는 매운탕을 사 주겠다고 일부러 이곳까지 우리 부부를 데려오신 형님의 마음이 고맙다. 아내는 식사 준비하지 않고 또 한 끼를 때웠다고 더 좋아한다.
그까짓 전지 내년에도 또 해드리지 뭐! 그리고 내년에도 이곳으로 매운탕 먹으러 다시 오자고 해야겠다. 정말로 맛있는 매운탕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생각이다. 단 공깃밥 두 그릇을 먹으면서.
매운탕에는 공깃밥 두 그릇이 필수다. 더구나 나처럼 밥 힘으로 일하는 농사꾼에게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