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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앳지 Jan 14. 2024

"니코복코의 돼지바는 맛있다."

짧은 소설



1991년 맴맴 울던 매미 소리마저 짜증스럽게 들리던 8월의 삼복더위


위로하는 방법을 몰라서


살면서 평생 제대로 된 위로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위로를 할 줄 몰랐던 할머니 한분이 계셨다.



그래서 할머니는 내가 울적해 보일 때마다


그리도 날 놀려댔나 보다.



아마도 할머니는 70 평생 가까이 살아가면서,


가장 좋았던 때가


사람들이 다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와서

짓궂은 관심의 표현으로

할머니를 놀렸을 때였을지도 모른다.



15살이 되던 무렵

김금복이 할머니는 11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유독 동생들 뒤치다꺼리로 힘든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농번기로 한창 바쁠 때는 광주리 한가득 손수 만든 새참을 나르기도 하고

빨래를 하다 말고, 젖먹이 동생들 마저 둘러업고

집안일을 해 대는 건 예삿일이었다.


항상 바빴던 탓에 학교 같은 곳은 애당초 다녀볼 엄두도 못 냈다


여느 날처럼 개울가에서 졸졸 흐르는 차가운 물로

가족들 산더미 빨래를 혼자 하고 있노라면


동네 방앗간집 훨칠한 아들놈이


한걸음에 곱디고운 할머니의 미색을 알아보고는 달려와


작은 조약돌을 몰래몰래 던져대며,

옥수수 알갱이처럼 가지런한 이로 '씩' 웃어 보이기 일쑤였다.


어여쁜 아가씨인 할머니는 홍조 띤 고운 얼굴로

부끄러워 귀까지 붉어진 채로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다.


잘생긴 사내는 당시에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훈남이었으며


방학 때가 되면 어김없이 고향에 내려와


마을 전경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포도밭에 높다랗게 세워져 있던


할머니 말에 의하면

90년대 초반 토큰 박스만 한 조그마한 원두막에

엉덩이를 붙이고선


한자로 범벅이 된 시커먼 고서들을 무더기처럼 쌓아놓고는

밤이 되건 낮이 되건 읽기에 바빴다.


할머니보다 무려 나이가 한 손을 다 채우고도

모자랄 만큼 많았던 총각은


마을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고 청년은

당시 마을행사를 직접 주도해서 기획하거나

산골 마을 아이들이 태어나면 문맹률이 높았던 시대 배경 탓에 동네 어르신들의 부탁으로

손수 이름을 지어주는 일도 흔쾌히 할 만큼 박학다식했다.


왕년에 커다란 쌍꺼풀 눈을 한 최은희를 닮아 인기가 최고였다는 할머니를


마을의 자랑이자 최고의 훈남 대학생인 총각마저 좋다고 쫓아왔을 정도였다.


짓궂게 강아지 풀로 어여쁜 아가씨 시절 할머니를


복숭아 빛 속살로 나와 있는 팔과 목덜미를 간질간질 간지럼 태우기도 하고


밤늦게 몰래 찾아와선 인절미 떡이 시었다며


맛이 없으니 금복이 너나 다 쳐 먹으라며,

무심하게 툭 던져놓고 가버렸다.


어느 날은 몰래 또 찾아와 방앗간 뒤편에 묶어놓은

우리 집 소보다 금복이 네 눈이 더 크다며

실없이 놀리는 일이 허다했다고 전하는


할머니의 리즈시절 이야기 속엔 풀내 진동하는 소박함과  순수함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그런 할머니의 젊은 날들을 마음껏 상상해 볼 수 있는 그 시간들이

어렸던 내게도  나름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이듬해

겨울 방학에 맞춰 시골에 내려온 청년을 만나러

야밤중 하필이면 빈 방앗간으로 따라갔다가


그곳에서 숙명적인 첫날밤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후에 첫째 딸 민숙이를 임신하게 되었다며

수줍은 표정으로 할머니는 콩나물 대가리를 거침없이 똑똑 따면서 이야기를 해주셨다.


한 시간이나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읍내까지도 소문이 자자할 만큼 일파만파 퍼져 나갔고


이웃 마을까지 뒤집어 놓을 정도로 큰 이슈 거리의 주인공이 된 할머니였다.


어쩔 수 없이 임신한 채로 큰 홍역을 여러 번 치러야 했고


쉽사리 승낙하지 않았던 방앗간 집 시부모님은

불러오는 배를 보며 망연자실하다

출산이 임박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읍내 제일가는 점쟁이 할머니의 금복이는 이름 그대로 복댕이란 말 한마디에 툭 튀어나온 입을

간신히 밀어 넣은 후


그제야 그 잘난 대학생 아들 베필로 마지못해

인정하셨다.


이후 민숙이 아줌마를 낳고 또다시 연달아 쌍둥이 아들들을 임신한 그 해 여름 6.25 전쟁이 반발하였고


온 동네는 대포소리에 놀라 칭얼대는 아이들로 울음소리반 폭탄 소리반 그렇게 아우성이 된 채로 살아갔다.


할아버지는 굳이 입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으나

하필이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진해서 곧장 육군 장교로 복무를 시작했으며


긴 전쟁기간 동안 지도부에서 진두지휘하며 부대원들을 이끌고 1.4 후퇴 때 남하하며

하필이면 전차 지뢰를 밟는 바람에

그대로 왼쪽 몸체로 향해있던 한쪽다리와 팔을  잃게 되었고,


제대 후 희망을 안고 갖은 일을 전전하며

활기를 되찾고자 열심히 노력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 남매의 생계는 오롯이 할머니 몫이 될 수밖에 없었고


동네 방앗간 일을 도와주는 일꾼마저 내보내고

억척스레 혼자 일을 해대며

몸부림치듯 열심히 살아가며

할머니는 나름 애를 쓰셨지만,


수시로 처지를 비관하던 할아버지는

끝내 도박과 사기로 갖고 있던 논과 밭떼기마저 다 잃으신 후


알코올 중독증세를 심하게 앓게 되었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생긴 절단된 신체 부위의 손상과 후유증마저 겹쳐

조막만 한 아이들이 새근새근 자는 모습

그 옆에서 밤새 안녕하지 못한 채

머나먼 길로 황망히 떠나시게 되었다.


졸지에 젊은 과부가 된 할머니는 4남매를 먹이고 입히느라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똑똑한 외아들의 애달픈 죽음에 충격을 받으신 시아버지는 그 길로 농약을 마시고

비명횡사 아들을 따라가셨고


시어머니는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키며

한평생 할머니를 힘들게 하시다 60 평생도 못살아 보시고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빼곡한 일생을 손수 홀로 채우듯 살아오신 할머니의 애정표현은

늘 무어라 친근한 욕을 섞어 놀려대는 거였다...


늘 나만 보면, "니코복코... 우리 소띠 소눈이 학교 다녀오냐..." 며 놀리시기 일쑤였고


할머니가 하도 많이 나를 놀려 되는 통에

나는 한동안 코에 힘을 주고 다니기도 했으며.


빨래집계로 잠깐씩 코를 세우기도 했다.


내가 하도 속상해하는 바람에

엄마는 웃으며 동네 할머니께 좋은 말로

만류도 해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하도 울컥하며 서운해하는 통에

더는 뭐라 하지 못하셨단다.


훗날 엄마가 할머니의 자세한 사연들을 모두 듣게 된 건

갑작스레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례식장에서 만난  할머니의 막내 여동생을

통해서였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손주보다 더 다정한

여자아기 재롱 보는 재미에 즐겁게 사신다고 하셨단다.


할머니는 나를 보며

예쁘고 사랑스럽단 표현을 모두 내 신체 특징 한 곳을 보고 놀리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에게 유독 자주 꼬집히던

내 코 하나에 그 모든 게 축약되어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가 보시기에 가장 귀엽고 사랑스러웠을 내 코는

할머니와 이별하기 전날 그 순간에 아직도 머물러 있다.


할머니가 나를 가슴팍에 묻으며 꽉 껴안을 때마다

내 옷에 짙게 베이던 깻잎 반찬 양념 냄새와 할머니 특유의 달달했던 박하사탕 냄새를 간직한 채로

할머니의 동네 손녀로 아직도 난 자라나고 있다.


우리 동네 삼거리 슈퍼 바로 옆 툇마루에는

유독 비슷한 헤어 스타일을 한 할머니들의 우렁찬 목소리와


먹거리가 즐비한 채로 사람 냄새 풍기며

똘똘 뭉친 오총사 할머니들로

언제나 인사 인해를 이루곤 했었다


담배를 태우기도 십 원짜리 화투장을 돌리기도 하시며

언제나 쭉쭉 찢은 맛깔스러운 김치에 점심식사를

즐기시던 온 동네 할머니들의 집합소


그중에서도 목청이 유난히 큰 인싸 할머니이자

누구 놀리기에 달인이셨던 동네대장 할머니는


그렇게 세상을 열정적으로 재미있게 사셨다


어느 날 군에서 휴가 온 손주를 보러 가기 위해

시집간 딸내미 집에 정성스레 만든

인절미 떡을 이고 버스를 타러 가시는 길에


그만 그 자리에서...

천국으로 직행하는 급행버스를 타고

떠나셨다고 한다



지금도 쨍한 여름이 오면,


맞벌이를 하시던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큼직한 집 열쇠 목걸이를 매달고


내 몸통만 한 가방을 짊어지고

학원으로 집으로 오가던 8살 된 내 곁으로


다가오는 할머니의 장난스러운 그 눈빛이

늘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리도 날 반기며 장난치던 할머니의 숱한 위로가 사랑으로 남아 아직도 내 가슴을 채우고 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안다.


왈칵 나를 끌어안은 할머니 가슴속에 묻어있던  

그 따뜻했던 날들의 냄새를....


종종 할머니 얼굴을 내 얼굴처럼 비벼대며

할머니께 자주 요구하던 것들까지도...


"할머니 돼지바 하나만 사줘. 응?! "


말코 소영, 니코복코 서양코 하시며

한없이 날 어루만지며 놀리시던

그 손길 그 어딘가에 나는 할머니와 아직까지도

맞닿아 있다.


여전히 돼지바는 어느 슈퍼에 가도 팔겠지만


할머니의 유쾌한 품속에서 먹었던

돼지바에 비할바는 아니다.


그 이후 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돼지바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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