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연 작가 날 3부작 시리즈 <구원의 날> 서평
부모에게 자식은 세상의 전부다. 그렇기에 자식의 실종은 부모에게 세상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정해연 작가의 날 3부작(<유괴의 날>, <구원의 날>, <선택의 날>)은 각기 다른 이유로 아이를 잃어 세상의 벼랑 끝에 선 부모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구원의 날>의 사건은 3년 전 영인강 불꽃놀이 축제에서 아들을 잃은 예원의 상실감으로부터 출발한다. 예원이 아들 선우를 잃었던 날, 대대적인 경찰 인원이 투입되어 수색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아무런 유괴나 범죄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예원은 그 날 찰나의 순간 아들의 손을 놓았던 자기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밀려오는 죄책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예원은 급기야 선우 실종 사건 담당 형사의 차를 고의로 부숴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런데 입원한 정신병원에서 예원은 익숙한 노랫소리를 듣는다. 믿을 수 없었지만, 선우가 실종 전에 부르던 노랫소리다. 예원은 자신도 모르게 선우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에게로 달려가고, 아이와 함께 병원을 탈출한다. 이렇게 유괴를 빙자한 예원과 로운의 기묘한 동행이 시작된다.
병원에서 조우한 사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예원과 로운의 관계는 가히 운명적이다. 예원은 생전 처음 만난 로운에게 ‘후천적 모성애’를 느낀다. 병원에서만 생활하던 로운이 예원의 낯선 집에 들어와 잠을 청하지 못하자, 예원은 로운을 부드럽게 당겨 안으며 뜨거울 정도로 뭉클한 감정을 느낀다. 로운 역시 선우를 찾아 떠도는 과정 내내 예원의 손을 절대 놓지 않는다. 예원이 병원 게시판에 선우의 실종 전단지를 붙이려다 거절당했을 때도, 로운은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예원의 손을 꼭 붙들며 안심시킨다. 로운이 예원에게 작고 여린 손을 내밀 때, 그리고 예원이 로운을 품속에 꼭 끌어안을 때, 이들 사이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온기가 흐른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사랑을 주고 받는 관계는 부모 자식과 다를 바 없다.
로운에게 예원은 태어나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모성을 경험하게 해준 존재다. 로운의 친모 주희는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로운을 출산했다. 불행히도 로운의 친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희는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갈등하다 중절 시기를 놓쳤고, 원치 않는 출산을 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의 미혼모가 아이를 낳고 처음 느낀 감정은 보편적인 사람들이 느끼는 생명의 축복보단 아이가 가져온 지난한 삶의 무게였다. 어릴 적부터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로운은 어그러진 방식으로 애정을 갈구한다. 의도적으로 몸에 상처를 내고, 계단에 굴러떨어지며, 자신의 목숨보다 깊은 사랑을 원한다. 로운이 우연히 마주한 예원을 믿고 따랐던 행동이 충분히 이해되는 지점이다. 예원이 로운을 선우라고 믿고 싶어 했듯, 어쩌면 로운은 잠시나마 환상에 빠져 자신을 아들로 착각하는 예원을 필사적으로 엄마라고 믿음으로서 숨을 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해연 작가의 날 3부작의 첫 시작을 알리는 <유괴의 날>에서도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부성애가 등장한다. 명준의 딸 희애는 소아백혈병으로 항암치료를 받다 혼수상태에 빠지는데, 명준은 밀린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부잣집 외동딸 로희를 유괴한다. 비록 유괴의 의도가 순수하진 않았으나, 명준은 이내 로희에게 정성스레 음식을 차려주고, 희애의 잠옷을 입은 로희를 보며 부성애를 느낀다. 로희는 친부 최진태에게 천재를 양성하기 위한 가혹한 생체실험을 당하며 혹사당한 아동학대 피해자다. 어리숙하지만 자신에게 헌신적인 명준에게 로희는 친부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부성을 느낀다. 종국에 명준은 로희를 가족으로 편입하여 구원한다.
날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선택의 날>은 <유괴의 날>, <구원의 날>과 대조적으로 뱃속에 있는 자신의 아기에게도, 자신이 납치한 아이에게도 아무런 모정을 느끼지 못하는 납치범 차현아를 조명한다. 차현아의 본명은 김실자로, 영화 <화차>의 주인공처럼 신분을 위장하고 남편마저 속인 냉혈한이다. 차현아가 내연남인 고구남에게 바다 부둣가의 배 위에서 붙잡히자, 그는 진통이 와서 하혈하는 도중에도 뱃속의 아이는 전혀 고려치 않고 자신의 앞날만을 생각한다. 고구남은 이런 차현아를 보며 모든 어머니에게 모정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처럼 날 3부작은 3차례의 서사를 통해 후천적인 모성·부성을 긍정하고, 선천적인 모성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모성 신화’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일침을 가한다. 우리 사회에는 여성이 임신하면 태아를 향한 무한한 희생정신과 사랑이 저절로 생긴다는 모성 신화가 존재한다. 그러나 <구원의 날>과 <유괴의 날>에서는 혈연으로 얽히지 않은 예원과 로운, 명준과 로희가 만나서 실제 모자지간, 부녀지간과 유사한 연대와 애정을 경험한다. 후천적으로 모성이 생길 수 있다는 방증이다. 다르게 말하면,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곧바로 모성이 자연스레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는 <선택의 날>에서 자신의 아이에게 아무런 모성애도 느끼지 못했던 차현아의 사례로 증명된다.
통상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 가족은 부모와 자식으로 이뤄진 핵가족의 형태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는 혈연으로 이어진 사랑만이 정상이라는 착각 하에 다른 형태의 가족을 소외하는 관념이다. 한부모 가정, 조손 가정 혹은 입양 가정과 같이 양육자와 아이가 비혈연 관계일시, 이들은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경계에서 밀려난다. 그런데 <구원의 날>을 읽으면서 가족 관계를 지엽적으로 정의한 기존의 사회 통념에 반기를 드는 상상을 해봤다. 만약 가족의 조건을 ‘상대를 가족이라고 인지하며,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설정하면 어떨까?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국가의 허락 없이도 서로 사랑한다는 조건 아래 가족이 될 수 있는 사회가 있다면, 서로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누군가에게는 유토피아가 아닐까.
<구원의 날>에서 로운의 친모 주희 또한 정상 가족과 비정상 가족의 경계에 놓여 고통받는 대상이다. 로운이 울림기도원에서 선우를 본 기억이 있다고 증언하자, 선우의 부모인 선준과 예원은 로운의 기억을 바탕으로 선우를 찾기 위해 로운과 함께 병원을 떠난다. 정신병원 원장 민서진은 며칠 후 로운의 부재를 알게 되지만, 미혼모인 주희보다는 정상 가족에 속하는 선준을 훨씬 신뢰했기 때문에 로운의 실종을 신고하지 않는다. 선우의 실종은 중대한 범죄 사건으로 인식되지만, 미혼모 가정의 자녀인 로운의 실종은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로운의 납치는 미혼모 가정이 평범하다고 여겨졌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사건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르는 폭력을 무력화하고, 로운과 주희, 선우와 예원을 구원한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내민 손이었다. 정해연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언급했듯, <구원의 날>은 ‘손’에 관한 서사다. 선우의 실종은 불꽃 축제에서 예원이 선우의 손을 놓았기 때문에 야기된 결과다. 남편의 음주운전 탓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예원은 육아에도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고, 불꽃놀이 축제 당일에도 선우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이로 인해 예원은 선우가 사라지자 심정적으로는 자신이 선우를 유기했다는 죄책감을 겪는다. 병원에서 마주한 로운이 예원의 손을 잡자, 마음속 깊게 파인 예원의 상처는 치유된다. 로운은 울림기도원에 갇혀 사이비 교주들에게 자신이 악귀라고 세뇌당한 선우에게 손을 뻗어 안심시킨다. 그러자 예원에게 받은 안정과 사랑은 곧바로 선우에게로 전이된다. 주희는 교도소에서 로운을 납치한 죄로 구속된 예원을 접견한다. 미혼모 가정과 양부모 가정으로 입장은 다르지만, 두 사람은 사회로부터 강요되는 완벽한 모성의 조건을 갖추지 못해 한때 아이를 포기했다는 부채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담담하게 과거의 아픔을 고백하는 주희를 보며, 예원은 순간 그의 손을 잡아주고 싶은 충동이 든다. 이렇듯 ‘손’은 타자에게 건네는 공감과 이해를 상징한다.
소설의 제목인 ‘구원의 날’은 피상적으로 보면 선우가 울림기도원에서 탈출한 날을 뜻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로운이 예원을 만나 자해를 멈추게 된 날, 예원과 주희가 자식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부채감을 덜고 스스로를 구원한 날이라고 해석된다. 이들이 서로에게 내민 손이 타자의 영혼을 치유할 때, 손은 구원이자 사랑이다. 그러니 구원의 자격은 보통으로 규정된 정상가정도, 만들어진 모성도 아닌 사랑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