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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아 Apr 18. 2024

모순의 덫_안진진. 너 왜 그래.

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양귀자님의 모순을 읽었다. 독서모임을 하기 위해 내가 큐레이션을 한 책인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아.. 괜히 골랐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도 큐레이션을 하고 독서모임의 책으로 선정하기엔 후회가 되는 책들이 몇 있는데 이 책은 좀 다른 의미로 후회가 된다. 이모의 삶과 닮아있는 우리의 삶. 그리고 안진진의 선택이 옹호될까 봐 그게 걱정이다. 왜냐하면 나는 타인을 말릴 단 한 톨의 힘도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 들어 더욱 그렇다. 사람은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최근 몇 년 간 내가 제일 경계하며 죽기 살기로 지켜낸 것이 힘들 때 익숙한 공간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내게 익숙한 곳은 나만의 동굴이었다. 나의 동굴은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데, 나는 나의 동굴의 좌표를 들키지 않기 위해 사람들에게 부단히 애써 보였다. 물론 정말 행복해서 웃을 때도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나의 동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더 밝고 과장되게 웃고 말을 건넸다.


1998년에 쓰인 소설이라 그때의 시대상을 반영했기 때문에 이모는 이모부를 골랐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아니 인류는 평생 외로움과 고독의 문제를 놓고 그리고 내면에 해결되지 않는 잡히지도 않는 공허와 싸운다. 거기서 살아남은 인류, 자기가 만족할 만한 수용을 이뤄내는 생존자는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잠식되지 않을 수 있는가. 작가가 되고 싶어 세상을 관찰하는 눈빛을 예리하게 다듬은 내가 본 세상엔 여전히 수많은 이모의 선택이 난무한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이모부도 존재한다.


근데 작가가 이모의 속마음을 드러내 버렸다. 그리고 이모가 유일하게 진정 원했던 자유는 죽음이란 도구를 통해 이뤄진다. 길들여진 것이다. 이모는 자녀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존재, 자신이 공격당할지 모르는 넓고도 광활한 들판에서 쫓기는지 뛰는지 모르는 삶보다 아늑한 온실에서 사는 삶에 길들여진 것이다. 이것은 잘못되었는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면 많은 생들이 무너질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이 이모의 삶에 투사가 된다면 위험하다.


"이모, 소설을 읽다가 이모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 울음이 덜컥 나올 것만 같았다. 지난여름 나는 고통의 한복판에 있었고 마침 친한 친구 아파트 옆에 사는 이모집에 들렀을 때 이모는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을 '미친 것들'이라고 표현을 했다. 그렇게 나 대신 펄펄 뛰던 이모는 굳이 혼자 갈 수 있다는 나를 위험하다며 바래다준다고 나왔다. 본인의 핸드폰도 챙기지 않은 채.


이만 들어가라는 나의 말에도 “저 교차로까지만…”하던 이모는 내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를 지켜보고 서있었다. 나는 자꾸 뒤돌아보면 눈물이 주르륵 날 것만 같아서 이내 앞만 보고 걸어갔다. 지금의 이모는 각박해졌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공부 잘하는 조카 돈 없어서 학원 못 다닐까 봐 엄마한테 일 년 치 학원비를 몰래 송금했던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엄마는 이 돈을 내 학원비 대신 생계비로 썼다고 했다. 우리 엄마가 안진진의 엄마와 닮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이모는 지금도 엄마와 투닥거리지만 통화를 할때면 엄마를 잘 챙기라고 한마디 거든다. (아빠를 소개시켜준 게 이모라는 사실은 비밀아닌 비밀이다!)


"못 가" 친척 오빠들 집에도 놀러 가고 기분전환도 하냐는 나의 물음에 이모가 한 말이었다. 이모의 답변 뒤에 흐르는 침묵에 난 더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이모부하고 건강히 행복하시라고 했다.


안진진의 이모는 왜 안진진이 걸렸을까? 가족을 위해 어느 정도 참고 사는 안진진의 모습이 자신과 닮아있어서 그럼에도 솔직하고 주체적 생각을 지닌 조카 안진진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서 그랬던 것 아닐까?


안진진의 마음의 한편에도 이모가 있었다. 가족이라 해도 쉽게 들추기 어려운 이모의 마음을 읽어내던 안진진. 모든 것을 숨기고 감추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하는 이모가 진실할 수 있었던 것은 안진진을 대할 때였다는 것을 알아서였을까. 미리 알았다면 너무나 말리고 싶었을 이모의 죽음에 한 번의 손길조차 내밀지 못한 안진진은 미쳐버렸다.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미친 선택을 했다.


나영규에 대한 보고서를 써 내려가던 안진진의 관찰은 틀리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눈을 가리기로 한다. 마치 이모가 끝마치지 못한 삶을 연기하는 대역처럼 말이다. 안진진은 이모가 되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모순의 덫에 걸렸다. 나는 안진진과 다른가? 고통의 순간을 지나온 나는 다시는 노력하지 않고 피해 가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래서 내 삶의 안온함이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그래서 나는 최근 고통의 서막과 닮아있던 상황을 마주하자 더 은밀히 위장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나의 깊은 동굴이 어딘지 찾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적이 노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관심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인생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과 열망과 선택의 실수의 연속이라면 내가 경험한 불행이 반복될 것만 같은 상황이 오는 것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직감. 나는 안진진과 다른가?


"안진진 안돼... 그러지 마."


그러나 내가 책을 덮고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 드는 이유는 안진진의 삶에 소소한 불행이 켜켜이 쌓여 임계점에 도달한 순간 안진진은 그 누구보다 더 강렬하게 부서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산에 오르지 않고 산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 자는 전혀 슬프지 않다.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을 보는 자, 산에 오르던 자가 포기를 하면 그 실패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안진진이었다.


안진진 안돼... 그러지 마는 거대한 불행에 무릎 꿇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는 소소한 불행을 겪은 안진진이 거대한 불행까지 미치자 슬픔과 함께 자신마저 지워버린 안진진이 될 수 있는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우리는 언제든 안진진과 이모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나 외에 다른 안진진과 이모에게 말을 건네는 것 외에 아무런 선택도 말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타자와 나에게 두 번의 대화를 건네길 바라본다.


"이제부터 잘하면 돼. 실수해도 괜찮아. 그러지 마. 죽지 마 이모."


"안진진, 그러지 마. 네가 가슴 뛰게 살아갈 기회를 놓치지 마. 거대한 슬픔의 쓰나미가 덮친 너를 재건해. 파도에 쓸려가지마.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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