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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점 만점에 80점입니다만

80점짜리 평범한 사람이기에 더 행복합니다.

"선생님, 오늘 당직인데 노트북 수령 안 하세요?"     


"아! 정말요? 저 오늘 당직인가요?"     


"네, 선생님. 혹시 오늘 출근 안 하셨나요?"     


"아.. 오늘은 제가 출근을 안 했거든요. 정말 죄송해요! 지금 바로 갈게요!"     


"혹시 대직자 구하셨나요?"     


"아.. 대직자가 있는지 그럼 바로 알아볼게요.! 죄송합니다!"          




오늘도 깜박했다며 머리를 숙이는 나는 매번 죄송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는 아이였다.


학교가 아닌 교육청에서 복직을 하다 보니 나의 실수는 더 자주 드러났다. 순회교사인 나는 거의 매일 출장을 가기 때문에 항상 보고해야 한다. 검토, 결재자를 선택하고 출장을 올리는 간단한 시스템을 이용하는데도 나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날짜 또는 시간을 수시로 잘못 올리곤 했다.

내 시스템에는 온통 기결취소(기존에 올린 문서를 취소하는 것)된 목록이 빼곡하다.


직장 내 동료들은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실수하는 나를 보면서 "메모를 좀 해봐요", "긴장이 풀어져서 그래. 긴장 좀 해요"라며 말해주었다. 


메모를 열심히 해보고자 노트를 샀다. 결국 노트 개수만 늘어났다. ‘실수하지 말아야지’라며 다짐을 하면 할수록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마냥 지속적인 실수를 쏟아내는 내 모습에 실망스러웠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라는 노랫말처럼 '정말 내가 왜 이럴까?'라는 의문을 멈추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좀 모자란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했다. 아이를 낳으면 정신이 없어진다는 핑계를 대고 싶었다.

하지만 난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어휴, 넌 예전에 내가 돈을 주면 받아서 그대로 바닥에 두고 갔던 게 한두 번이 아니야'


'집 키는 얼마나 많이 잃어버렸는지, 나중에는 비싼 번호키를 어쩔 수 없이 했어야 했다니까'


은 엄마가 10대 때부터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려준 이야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친구들에게서도  ‘OO 이는 참 특이해’란 말도 자주 들었다.

유난히 대화의 상대가 많아지고 말이 길어지면 나는 전체 대화의 흐름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특이하다는 말을 넘어  날카롭게 자존감을 긁기도 하는 사건들도 생겼다. 복직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동료 선생님과의  티타임 자리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선생님은 나누는 것도 좋아하고 재미있는 사람인데, 왜 매번 같은 실수를 해요?’


‘그러니까요.. 나도 노력하고 있는데 진짜 잘 안되네요. '


'긴장을 덜해서 그래요. 나도  옛날에 선생님처럼 자주 실수하고 이해도 잘 못하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그러게.. 나도 안 그러고 싶은데 워낙 어릴 적부터 자주 그랬던 터라 나는 타고났을 때부터 좀 부주의한 사람이 구나하고 받아들이게  되더라고요.’


원래 그런 게 어딨어요? 그건 핑계인 것 같은데. 나도 군대 다녀오고 나서는 정신이 바짝 들어서 실수 안 하게 되던데’


‘그러게요..(하하) 그럼 나도 군대에 가야 되나?’


‘자꾸 실수하고 그러면 경력 낮은 선생님도 있는데 너무 신경 안 쓰면 좀 그렇지 않나?

좀 더 노력해 봐요’


'(어색한 웃음......)'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하긴 했지만 대화를 끝내고 나에게 남은 메시지는 '원래부터 그런 게 어딨냐'라고 말하며 내 말이 핑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었다. 


‘이것만 빼면 더 좋은 사람이 될 텐데’라고 날 생각하며 말해주던 그 동료는 언제부터인가 동료가 아니라 선생님이 학생에게 충고하듯 느껴져 관계가 불편해졌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조언은 듣기 싫은 잔소리가 될 뿐.  나를 생각해 주는 동료의 말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난 정말 노력하고 있는데...’ 나도 더 이상 밑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실수하지 않고 뇌섹녀로 보이고 싶어 더욱 발버둥 쳤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일뿐이었다.  

     

어쩌면 정말 스스로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닐까? 란 생각에 매일 다이어리를 빼곡하게 적고 필기도 열심히 했다.

다른 사람들도 나의 잦은 실수가 내가 노력하지 않고 핑계만 대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란 생각에 의기소침해졌다.


 답답한 마음에 남편과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나 요즘 정말 ADHD 증상이 심한 것 같은데.. 병원 가서 진찰하고 약 먹어볼까?'


 '네가 꽤 부주의하긴 하지. 그래도 일상생활은 잘하잖아. 우리가 특수교사인데... 일상생활에 심하게 지장이 있어?’

(남편도 특수교사다)


 ‘음.. 그냥 내가 계속 반복된 실수를 하니까 스스로 자존감도 낮아지고 나도 노력하고 있는데 개선이 잘 되네.’


 ‘하긴.. 아침마다 안경 찾느라 힘들어하고 매일 리모컨 어디 있냐며 물어볼 때 나도 네가 좀 심각한 것 같기도 하고.. 힘들면 병원에 가 봐’

     

남편과 대화하면서 내가 느꼈던 건  내 모습을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네가 힘들면 병원에 가보라고' 덤덤하게 말해주어서 고마웠다. 



내 힘듦을 알아주는 남편인 것 같아서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어쩌면 '에이, 무슨.. 절대 아니야'라는 말을 원했던 건지도 몰라 마음이 뒤숭숭했다.


 당장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나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에게 핸드폰을 들고 카톡창에 대뜸 질문했다.      


‘친구야, 바쁘니?'


'아니??, 갑자기 왜?'


'네가 보기에 나 어때?, 혹시 나 ADHD인 것 같아?’


‘왜? 너 누가 ADHD래?’


‘그건 아닌데.. 궁금해서. 맨날 네가 나 손 많이 가는 여자라고 했잖아’


‘글세.. 네가 특이하긴 하지. 맨날 옷도 앞뒤 바꿔 입고.. 원피스에 지퍼  열린 줄도 모르고 출근해서 내가 급하게 닫아준 게 몇 번이니?..’


‘그래? 그럼 나 진짜 이거 병일까? 요즘은 성인 ADHD도 많다던데 검사받아볼까?’


‘글세.. 근데 그건 일상생활이나 직업생활에 큰 영향을 줘야 하는데 너는 부주의할 뿐 자신이 맡은 일은 잘하니까, 그냥 평범한 것 같은데?’

          

순간 친구의  답변에  ‘아차, 그렇지. 나는 내가 맡은 일 열심히 하고 있지. 지각도 안 하고 나 참 성실한데. 나 참 잘해오고 있는데. 내가 왜 나를 몰아붙인 거지?’




친구와 남편의 대답을 되짚으며  나는  스스로 만들어낸 ADHD 약물 소동을 끝냈다.



‘약물이 고려되는 사람’에서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아온 나는 혼잣말을 했다. '나는 나에게 100점이 아니라서 실망했구나'라고 말하며 나를 위로했다.            


누구나 뇌섹녀를 꿈꾼다. 하지만 뇌섹녀와 뇌섹남도 완벽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비록  부주의하고 실수가 많은 나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진심으로 노력한다.


내 단점을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부족한 모습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이 실수를 하더라도 '대체 왜 저래?'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몰라서 그러는 거야', '자신은 스스로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어'라며 한 번 더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보려 한다.



 나도 부주의하거나 상황에 맞게 행동하지 못하는 나 스스로를 답답해하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가 특이해서 특수교사냐며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부주의했고 어쩌면 자존감이 낮았던 나였기에 특수교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나는 특수교육대상유아들(장애가 없어도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행동들도 수십 번을 반복해서 말해 주어야 했다.



 그래서 특수교사인 나에게 통합반 선생님(일반학급에서 특수교육대상아이들이 포함된 학급의 담임)들은 이렇게 질문하곤 했다.


 ‘선생님, 제가 말했는데 도저히 제 말을 듣지 않네요.. 몇 번을 말해야 좀 나아질까요?', '혹시 일부러 제 말을 안 듣는 걸까요?’, ‘왜 저런 행동을 계속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때마다 나는 늘 해왔던 대답이 있었다.  '아이들도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이 아이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그럴 텐데..', '느리지만 제 속도대로 배울 거예요.

저도 다시 한번 이야기해 주고 배울 때까지 다양한 방법들로 가르쳐 볼게요.'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왜 그럴까'가 아닌 '어떻게 해야 더 쉽게 이해하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라고 같이 고민해 보자고 말이다.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내가 만약 정석대로만 자라났던 100점짜리 모범생이었다면 내가 만나는 아이들을 더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쉽게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다.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심으로 그 사람의 입장이 될 수 없기에 공감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는 상대방을 만날 때  '네 마음을 이해해. 나도 공감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괜찮아, 실수할 수도 있지. 누구나 다 실수해', '너도 그렇게 살아오느라 힘들었겠다.'라고 말해준다.


나는 나 자신에게도 '괜찮다고. 실수해도 괜찮다고. 난 점수로 따지면 100점은 아니지만 80점이기에 앞으로 20점이나 더 상승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려 한다.

 

오늘도  '어쩌면 내가 ADHD일지도 몰라'라며 자책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에 우리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부족하기에 나는 끊임없이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을 알아주는 건 타인이 아니라  노력하고 있는 나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한 발짝 전진하면 된다고 말이다.


부디 주변의 ADHD 성향의 사람들이 있다면 이 글을 보는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다.  



나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기보다는  노력하고 있는 상대방의 모습을 격려해 주는 따뜻한 당신이  되어주길.


그럼 우리 사회가 좀 더 따뜻하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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