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 년 간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건,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과 남의 인생을 사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남과는 다른 자신만의 인생에 대해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듯하다.
주어진 거의 모든 시간을, 책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느라 보내는나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단칼에 정리한 지인이 있었다. 동남아에서 선교사를 하는 나의 한 친구에게, 넌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물은 그의 지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황당한 발언의 배경에는, 누구든 비즈니스를 해서 돈을 벌어야 하며 그것만이 자신의 일이고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 같다. 이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돈으로 즉 교환가치로 환산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걸 일단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표적 상징물인 스마트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느라 자신의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라고 했다니 좀 헷갈린다. 어떻게 보면 잡스야말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느라 자신의 시간을 낭비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물론 잡스는 다른 사람의 삶을 편리하게 개선하는 일이 자신의 일이고, 그런 노력이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소명의식의 발로일 수도 있고 상황에 종속된 노예근성의 소치일 수도 있다. 잡스가 강조하며 추천한 건 전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만 볼 수 없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바로, 잡스가 사망하기 얼마 전에 병실에서 썼다는 <스티브 잡스의 마지막 편지>라는 글이다. 이 글에서 잡스는 타인의 눈에 자신의 인생은 성공의 상징이지만, 일터를 떠나면 자신의 삶에 즐거움은 많지 않다고 자조하면서, “결국 부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하나의 익숙한 ‘사실’일 뿐이었다.”라고 비관적으로 회고한다.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정말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 (...)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그 이후 우리는 부와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 내 인생을 통해 얻는 부를 나는 가져갈 수 없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들뿐이다. 그 기억들이야 말로 너를 따라다니고, 너와 함께하고, 지속할 힘과 빛을 주는 진정한 부이다. 사랑은 수천 마일을 넘어설 수 있다. 생에 한계는 없다.”
잡스는 자신이 평생 쌓은 사회적 인정과 부는 죽음 앞에서 무의미하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들이야말로 진정한 부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가고 싶은 곳을 가라. 성취하고 싶은 높이를 성취해라. 이 모든 것이 너의 심장과 손에 달려있다.”
스티브 잡스와 그 가족들
이렇게 보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느라 자신의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라는 말은 결국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한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문명의 물줄기를 바꾼(혹은 급격하게 앞당긴) 잡스의 역사적 역할과는 별개로, 자연인으로서의 잡스는 스스로를 불행한 인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행하더라도 역사적 업적을 남길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 행복을 위해 역사적 업적을 포기할 것인가. 이렇게 차원 높은 실존적 고민 앞에서 갈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범부라면 대부분 후자, 즉 한 인간으로서 개인적인 행복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고백하거니와 나는 주제 넘게 전자를 꿈꾼 적도 있지만, 이젠 분수를 아는 나이가 되었다. 물론그렇다고 해서 나의 행복만이 소중한 건 아닐 테고,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와 공동선에 그 답이 있을 듯하다. 더 고민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