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기록물(사진, 영상)도 펜드로잉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다큐 드로잉 (docu-drawing; documentary + drawing)’이라는 이름을 붙이려 한다. 어떤 그림이든 이야기가 결부되어야 의미가 더 풍성해진다. 다큐 드로잉은 역사적 사건이나 배경과 어우러지며 그 의미가 더 풍성해질 것이다.
2. 포연이 허공을 떠돌던 1950년대, 끼니를 걱정하면서도 사람들은 책을 찾아 읽었다. 황석영 작가의 자전적 소설 <개밥라기별>을 보면, 전쟁 중에도 그의 어머니가 거리에서 파는 책을 사 오는 내용이 나온다. 그 아들은 그 책들을 읽으며 훗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이런 문화적 배경과 전통 속에서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3. 그림 속에는 책이 빼곡히 놓여있는 진열대와 서가가 보이고 그 앞에 두 남녀가 앉아있다. 일종의 노천서점 또는 야외책방인 듯하다. <문예춘추> 같은 일본의 고급 교양지도 보이고 <명랑(?)> 같은 대중잡지도 눈에 띈다. 서가에 꽂혀있는 책들은 제목이 잘 보이지 않아서 주제나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거기에는 일본 책을 중역한 철학책이나 세계명작 등 인문학 서적도 있을 것이고, 법전이나 회계/부기 등 실용 서적도 있을 것이다.
4. 두 남녀의 관계도 상상할 수밖에 없다. 책을 사러 간 걸까, 무언가를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책방 주인일까. 혹시 길 건너 카바레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춤바람족은 아닐까. 춤바람 난 교수 부인을 고발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베스트셀러가 된 때가 바로 그 무렵이어서 떠오른 생각이다.
5. 그때로부터 70년쯤 지났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책을 사이에 놓고 양극단으로 갈라졌다. ‘책에 의한 양극화’라고나 할까. 한편으로는 인문 교양서적을 읽으며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통해 공동선을 추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정점에 한강 작가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법전과 실용서를 읽으며 부와 권력을 거머쥔 현실의 승자들이 있다. 그 정점에 윤통이 있다.
6. 아무튼 분명한 건 그때도 사람이 있었고 책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도 사람이 있고 책이 있다. 그때도 지금도,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그런데 어떤 책을 읽었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이냐가 결정되는 건지, 아니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어떤 책을 읽느냐가 결정되는 건지는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