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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Nov 18. 2024

문제는 여전히 ‘지상의 방 한 칸’

이야기가 있는 다큐 드로잉 2

1.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가 저물 때까지 농촌에 살던 많은 사람이 서울 등 대도시로 건너가 노동자가 되었다. 역사는 그때를 산업화 시기라고 부른다. 산업화를 나더러 정의하라면, 한 마디로 농부가 노동자로 변신한 사건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해 농부가 삽이나 괭이 대신 망치나 스패너를 든 일이라는 얘기다. 신경림 시인이 <농무>에서 그렸듯이 농부들은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하랴”라고 신세를 한탄하면서,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를 눈물로 접은 다음 방 한 칸 마련할 돈도 없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그들은 노동자가 되었거나 도시빈민이 되어 도시의 외진 곳을 떠돌았다.


2. “눈 주면 언제나 눈에 익어 거기 정답게 있던, 우리들이 자라며 나무하고 고기 잡고 놀아주었던 몸에 익은 정든 이름들이 구로동 성남 신길동 명동, 이런 낯선 서울 이름들과 엇갈리며 우리 머릿속을 쓸쓸하게 지나갔다.” 김용택 시인은 산문시 <섬진강 16>에서, 기대와 두려움을 모두 안고 서울로 떠나오던 그들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그들은 당장 아쉬운 대로 청계천 등지에 무허가 판잣집을 지어 거처로 삼았다. 하지만 무허가라는 제도적 불안 요인 말고도,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데다가 수재나 화재 등 각종 자연재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그 판잣집이 김용택 시인 말마따나 ‘피와 땀과 살을 섞었던 땅, 버림받고 무시당하면서도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던 땅, 그래도 정 붙여 살았던 땅’과 비교될 수는 없었다.


3. 문제는 자기 소유의 안전한 ‘지상의 방 한 칸’이었다. 소설가 박영한은 <지상의 방 한 칸>이라는 중편소설에서,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가난한 소설가가 안정된 환경에서 집필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벌인 악전고투를 생생하게 증언하면서, “어찌하여 하나님은 소설가에게 조용한 방 한 칸 선처해 주는 일에 그토록 인색하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시인 김사인도 같은 제목의 시에서,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라며 비통해했다. 시나 소설 등 자신을 표현할 도구를 가진 문인의 말을 통해, 그런 도구조차 없는 민초들의 심정이 어땠는지 추측해 볼 수 있을 듯하다.



4. 그림에는 청계천 위에 판자(일부는 슬레이트)로 얼기설기 엮은 3층짜리 판잣집이 위태롭게 서 있다. 주로 흰색으로 보이는 빨래가 주렁주렁 내걸려 있고 화분이나 대야 같은 가재도구도 나와 있다. 3층에는 성인 남자가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고, 1층 난간에는 어린아이 둘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3층의 성인 남자는 일터에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노동자일까, 아니면 맘 편하게 집필할 장소를 찾지 못한 가난한 글쟁이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박태원의 장편소설 <천변풍경>(1938년)에 등장하는 창수와 재봉이를 생각나게 한다. <천변풍경>은 1930년대 청계천변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서민들의 모습을 그린 세태소설이다. 창수는 한약방의 사환이었고 재봉이는 이발소의 사환이었는데, 소설에서 창수는 나중에 큰돈을 벌어 성공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재봉이는 현실에 만족하는 성격으로 보아 평범한 서민의 삶을 살았을 것 같다. 40년을 훌쩍 뛰어넘은 상상이지만, 과연 그림 속 두 아이는 나중에 창수처럼 되었을까 재봉이처럼 되었을까? (그림은 1968년 일본인 목사이자 기독교 사회운동가인 노무라 모토유키의 사진을 저본으로 그린 것임.)


5. 경제학자 우석훈에 따르면, 1975년 자기 집에 사는 비율은 63%였는데 1980년에는 58%로 내려갔으며, 외환위기 때에는 이 비율이 54% 정도 되었고 2017년에는 조금 높아져 57.7% 정도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 이후로 한국의 자가 주택 보급률은 53~56% 사이에서 변한 적이 없다. 집을 많이 공급하든 덜 공급하든, 임대주택 제도를 어떻게 바꾸든, 이 비율은 유신 경제 이후로 변한 적이 없다.” 우석훈의 결론이다. 우리는 지난 60~70년 동안 인구의 절반에게 ‘지상의 방 한 칸’도 제대로 마련해주지 못했으면서, 그때를 ‘한강의 기적’이라 뿌듯해하고 세계에서 유례없는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며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 기적과 그 성장과 그 진입은 대체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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