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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브랜드

이야기가 있는 다큐드로잉 16

by 까칠한 서생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1970년대는 나의 10대와 온전히 겹친다. 그때 내가 살던 소도시에는 ‘서울 양화점’이라는 유명한 맞춤 구두 가게가 있었다. 짚신 대신 오랫동안 한국인의 발을 책임져온 고무신이 점점 사라지고 학생들에게 운동화가 보편화하고 있는 가운데, 성인들에게는 구두가 신발의 대세로 자리 잡아가던 시절이었다. 막 성인이 되는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고무신이나 운동화를 신던 중장년들도 구두 한 켤레쯤 갖고 싶은 욕망을 키워갔다. 이에 따라 맞춤 구두 시장도 점점 커졌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당시 시내 한복판에 있던 ‘서울 양화점’은 맞춤 구두의 명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나는 운동화로 만족해야 하는 처지여서 구두의 소비자가 될 수 없었음에도, 언제부터인가 ‘서울 양화점’이라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맞춤 구두 가게가 그 소도시에서는 매우 드물게 극장 광고와 라디오 광고를 집행한 이유가 컸다. 극장 광고는 좀 어설픈 애니메이션에 성우의 목소리가 입혀진 형태였고, 라디오 광고는 거기서 소리만을 따와 편집한 것이었다. 극장광고는 세 군데 극장에서 어김없이 등장했고, 라디오 광고는 지역방송 시간에 수시로 노출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그 광고의 내용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문안은 물론이고 성우의 목소리 톤과 애니메이션 속 인물의 손짓까지도 고스란히 재연할 수 있을 정도다.


여: 어머 저 구두!

남: 멋있지 이 구두, 서울 양화점에서 맞춘 거야.

여: 유행의 샘터, 서울 양화점~

남: 전화는 000번, 성남동 로터리에 있습니다.


내용과 형식은 닭살 돋을 만큼 전형적인 1970년대 풍이다. 그런데 여기서 “서울 양화점에서 맞춘 거야”라는 대사는 내 또래 사이에서도 유행어가 되었을 만큼 유명했다. 가령 옆 짝이 좋은 연필이나 노트를 가진 것을 보고 내가 “그거 어디서 샀어?”라고 물으면 그가 웃으며 “서울 양화점에서 맞춘 거야”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브랜드명이 유행어가 된다는 건 마케팅 이론상으로도 대성공의 증거였다. 이는 마치 “일요일은 오뚜기 카레”, “나는 짜파게티 요리사”와 같은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입주해 있던 건물을 사서 더 높이 올렸을 만큼 대박이 났다는 얘기도 나중에 들었다. 유명해진 다음에 그 광고들을 내보냈는지 아니면 그 광고들 때문에 유명해졌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아무래도 후자일 것이다.


2.

나의 근대는 브랜드와 함께 찾아왔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만난 최초의 브랜드는 ‘미원’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다니기 이전부터 ‘미원’을 넣으면 맛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음식에 꼭 넣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있다. 농촌 마을에서 그 소도시로 이사 온 직후 어느 날 밤, 시내에서 가장 높은 3층 건물 옥상에서 여러 원색의 조각들로 구성된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며 ‘신선로 표 미원’이라는 글자와 신선로 그림을 만들어내던 장면을 넋이 나간 듯 지켜보았었다. 당시 ‘미원’은 하나의 브랜드이기 이전에 설탕이나 밀가루와 같이 새로운 유형의 제품 카테고리로 소통되었다.



‘왕자 표’라는 운동화 브랜드도 내 기억 상자 속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 고무신을 신고 생활했던 나는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운동화를 사러 시장에 갔다. 친구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왕자 표’ 운동화를 원했으나 브랜드도 없는 싸구려 운동화로 낙착을 보았다. 나는 고무신에서 운동화로 바꿔 신은 데 만족하며 당대의 슈퍼 브랜드를 신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었다.


‘금성 라듸오’도 내 마음속에서 빛이 바래지 않은 브랜드로 남아있다. 근대문명은 곧 기계문명일진대, 라디오는 내가 직접 사용한 첫 ‘문명의 이기’였다. 우리 집에 라디오(곧 ‘금성라듸오’)가 들어온 다음 얼마 동안 그 라디오 속에 사람들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석구석을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기도 했다. 월간지 『어깨동무』는 잠시나마 멋진 건물의 어린이회관과 노란색 교복의 예쁜 여학생이 다니는 ‘리라초등학교’로 데려다주었다.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킹구빵(건빵 브랜드)’이나 ‘뽀빠이(라면 과자 브랜드)’를 사 먹을까, 아니면 만화방에 가서 ‘땡이’나 ‘독고탁’이 나오는 만화를 볼까 선택의 기로에 선 적도 많았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는 ‘엘리트’라는 이름의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서, 뒷자리 친구들이 가져온 『선데이 서울』의 맨 가운데 쪽 컬러 화보를 두근거리며 훔쳐보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수학의 정석』과 『성문 종합영어』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한 가운데, 짬짬이 ‘삼중당 문고’ 속 문학작품들을 읽기도 했다. ‘삼천리호 자전거’는 3년 내내 통학 길을 함께 한 나의 로시난테(돈키호테가 데리고 다니던 말)였다.


돌이켜보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브랜드였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브랜드는 유년과 소년 시절의 갈피갈피에 자리 잡으며 나만의 아련한 추억을 소환해 주는 한편, 한 시대의 고비고비를 살아낸 나의 존재를 증언해 준다.


3.

“해태 들菊花―/ 해태 들菊花―/ 꿀벌이 껌을 꺽꺽 씹으며/ 날아간다/ 들菊花 만발한 안산 동부 지구/ 監視哨의 그늘을 파랗게 뚫으며/ 풀들/ 침을 영혼에 넘기는 소리”


오규원의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에 수록된 <해태 들菊花> 전문이다. 이 시가 발표된 때는 서울올림픽 직전인 1987년,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소비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 시는 브랜드가 일상 깊숙이 침투해서 삶의 일부가 된 세태를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오규원 시가 브랜드에 대한 풍자나 야유였다면, 유하 시는 브랜드에 대한 악담이거나 저주였다. 유하는 소비사회가 더 깊숙이 진행된 1991년 나온 시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 실린 산문시 <콜라 속의 연꽃, 심혜진論>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감독은 얼씨구나 양파 껍질처럼 끝없이 옷을 벗기기 시작하는데, 그녀만 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코카콜라를, 삼성 에이 에프 오토 줌 카메라를, 해태 화인쥬시 껌을 사고 싶어지는 내 눈알, 나는 본다 저 알몸 위로 오버랩되는....../ 온 산을 갈아엎는 사람들을 세상을 온통 콜라 빛 폐수로 넘실대게 하는 사람들을 이 땅을 온갖 욕망의 구매력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들을 그리하여/ 이 지구의 虛를 말살시키고 있는 사람들을 아아 하나뿐인 인격, 하나뿐인 지구”


코카콜라, 삼성 카메라, 해태 껌 등 유명 브랜드에 자동인형처럼 반응함으로써 결국 이 세상은 ‘온갖 욕망의 구매력’으로 인해 파탄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우리가 본격적으로 맞이한 소비사회와 그 주역 중 하나인 브랜드는 현재 전 세계적인 과제인 환경문제 및 불평등과 분명히 깊은 상관관계에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위 시의 내용이 지나친 우려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4.

브랜드를 만들고 유지·관리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을 브랜딩(branding)이라고 한다. 나오미 클라인의 역저 『슈퍼 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에 따르면, 서구에서 브랜딩이 마케팅의 핵심으로 떠오른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제품은 공장에서 만들어지지만, 브랜드는 마음속에서 만들어진다.”, “기계는 닳고 자동차는 녹이 슬고 사람들은 죽지만, 브랜드는 살아남는다.” 등이 당시 브랜드 전문가들의 신념이었다.


나오미 클라인에 의하면, 1980~90년대 기업들은 기계나 공장이나 사람에 투자하는 대신 브랜드를 구축하는 데 사용되는 가상의 것들에 집중했다. 여기서 가상의 것들이란 광고, 포장, 디스플레이, 유통 등을 말한다. 따라서 마케팅이나 브랜드 확장에는 아낌없이 투자하면서도 생산시설이나 노동에 대한 투자는 소홀하게 되었다. 더구나 소수의 슈퍼 브랜드들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현금의 위력을 이용해 지역의 작은 독립 기업들을 몰아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골목상권과 자영업자의 위기로 이어졌다. 많은 기업이 브랜드가 되기 위해 노력할수록 공공장소는 상실되었고, 브랜드가 모든 부가가치를 차지할수록 생산 담당자의 역할은 점점 작아졌다.


2007년 나온 화제작 『88만 원 세대』는 당시 20대들에게 당장 ‘스타벅스’와 같은 프랜차이징 업소에 발길을 끊으라고 촉구한 바 있다. “만약 20대 인구 1만 정도가 스타벅스에 가기를 거부하고 20대 사장이 직접 내려주는 커피와 차를 마시겠다는 선언”을 한다면 “100명의 20대가 자신의 카페를 가지고 경제적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당시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호응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지금의 세상은 이 책의 기대와 많이 어긋나 있다.


5.

일본 영화 <미나미 양장점의 비밀>은 브랜드화를 거부하고 자신이 만드는 제품의 진정한 가치를 지켜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나미 양장점’은 일본 고베 시의 변두리 동네에 자리 잡은 소박한 맞춤옷집이다. 친할머니가 창업한 이 양장점을 2대째 운영하고 있는 ‘이치에’가 주인공이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이 양장점의 오랜 단골이며 이들은 여기서 자신만의 독특한 옷을 만들어 입고 평생 이를 수선해 가며 살고 있다.



유명 백화점으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입점과 브랜드화를 제안받은 이치에는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한다. 입는 사람의 모습, 성격, 라이프스타일 등 모든 것을 고려해서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할머니의 정신을 지켜가기 위해서다.


그 정신은 주인공 이치에와 브랜드화를 제안하러 온 백화점 직원과의 대화 속에 잘 드러난다. 백화점 직원은 인기 모델이 입고 찍은 사진으로 홍보하면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고 옷의 가치도 올라가고 간다고 설득했지만, 이치에는 “입을 사람 얼굴도 모르는 옷은 만들 수 없어요.”라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또 그 직원은 브랜드화를 통해 규모가 커지면 옷감도 원하는 대로 대주고 작업 공간이나 스태프도 다 갖춰주겠다는 조건도 제시했지만 이치에는 “우리 집에 전해 내려오는 재봉틀 아니면 사용 못 해요.”라며 단칼에 자른다. 백화점 직원이『브랜드 시작하는 법』이라는 책을 전해주지만 이치에는 거들떠도 안 본다. 아무리 정교한 브랜딩 기법도 이치에의 순수한 감성 앞에서는 휴지조각일 뿐이다.


이치에에게 자신이 만드는 옷은 돈이나 명성 같은 속된 가치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과의 소통하는 고귀한 수단이며 배려와 나눔의 성스러운 매개체여야 했다. 그래서 대량 생산 시스템을 전제하는 브랜드화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6.

칼은 아픈 환자를 살릴 수도 있고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 내란 우두머리 짓으로 대통령의 자리에서 파면된 자가 자신을 정당화한답시고 한 말이기도 하다. 어처구니없는 비유이지만 그 자체로 틀린 얘기는 아니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순자(荀子)』의 ‘왕제(王制) 편’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이처럼 대다수 사물이나 개념에는 양면성이 있다.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브랜드는 나오미 클라인의 비판대로, 생산 부문의 쇠퇴와 공공부문의 약화, 저임금과 고용불안의 일상화, 임시직과 계약직의 보편화라는 어두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나미 양장점’처럼, 공동체 구성원을 따뜻하게 이어주는 소통과 나눔, 배려와 존중의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앞의 브랜드를 ‘차가운 브랜드’라 하고 뒤의 브랜드를 ‘따뜻한 브랜드’라 한다면, 지난 몇십 년 간 ‘차가운 브랜드’가 ‘따뜻한 브랜드’를 갈수록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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