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봄은 자신의 19세기 연작에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 사이에 걸친 이 ‘긴’ 발전의 시대를 규정하는 세 단어는 순차적으로 나타난 것이면서 서로가 양면으로 존재하는 개념들이었다. 부르주아의 승리와 자본의 발전, 그들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제국주의는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다.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라는 대안에 의해 잠시 위협을 받는 듯 했지만, 여전히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시스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장한 ‘노동자들에게 국경은 없다’란 말은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지만, 현재 자본에게는 정말로 국경이 없다. 백화점에서 운동화나 점퍼를 팔아 생긴 이윤이 누구에게 가는지, 매일 사용하는 휴대 전화 요금이 어떻게 나뉘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래도 그중 일부가 바다를 건너가리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본질에 있어 초기 자본주의와 지금의 자본주의는 다르지 않다. 노동자를 착취하여 더 많은 잉여를 생산해내는 것이 자본의 목표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실업을 조장하고 그를 통해 임금을 떨어뜨리려는 자본의 계획 역시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거대 자본이 작은 자본을 사냥하는 규모의 경쟁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달라진 게 없다. 기술 개발과 구조 개선 등의 좋은 말들로 ‘발전’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결국 자본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며 결코 사회적 선이나 다수의 질 높은 삶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도 같다.
노동 쪽의 사정은 조금 복잡한 것 같다. 산업 구조가 달라져 노동자들에게 요구되는 기술이 달라졌다고 해도 과거 노동 방식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것이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선진국에서는 노동 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높이는 데 성공한 예가 많다. 최저 생계비만으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많이 늘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쾌적한 사무실에서 정신노동을 하는 고연봉의 노동자들이 늘어난 것이 과연 노동 전체의 변화를 보여주는지는 잘 모르겠다.
19세기 영국 노동시장을 다룬 글들을 보면 그 시대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수 있다. 지금과 가장 크게 다른 부분은 아동 노동과 여성 노동의 실태이다. 5세만 되면 아이들은 공장에 들어갔고, 여성들은 공장과 가정에서 혹사당하면서 살았다. 자본은 임금이 비싸다는 이유로 남성 노동자는 고용을 꺼렸고 대신 상대적으로 임금이 싼 아동과 여성 노동을 선호했다고 한다. 그 시기를 다룬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술에 취해 아내나 아이를 구타하는 남성들의 모습은 어쩌면 일상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기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 주었던 모양이다. 자본가에게는 고용의 자유, 그리고 노동자에게는 노동의 자유를.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영국에서는 구빈원을 만들어 고아나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일정한 요건이 되면 구빈원을 나와 거지가 되거나 범죄자가 되거나 부랑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가난한 자들을 범죄자와 동일시했던 모양이다. 가난은 가난한 자들이 게으르거나 어리석은 탓이기에 누구도 구제해 줄 수 없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고 한다. 국가는 그들은 보호해줄 의무가 없고 법에 따라 그들을 심판하는 일만 했던 것 같다. 물론 그 법은 부르주아가 만든 법이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애니메이션으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소설을 읽었다. 소설적 관점에서 보면 디킨스의 다른 작품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익스 같이 잘 형상화된 인물도 등장하지만 전반적으로 인물의 내면을 다루는 데 부족함이 느껴졌다. 사건의 인과성 역시 그리 설득력 있다고 보기 어렵다. 해피엔딩의 결론 역시 감동적이지는 않다. 그래도 이 소설이 읽히는 이유는 19세기 자본주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다. 나에게는 그것이 이 소설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