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친밀한 이방인>에서는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 나는 그림자로 존재하는 중년의 여성들을 위해서 이 글을 쓴다.
소설 속 화자인 '나'의 어머니는 암을 진단받은 아버지에게 이혼을 선포한다. 딸인 주인공은 어머니에게 그 속내를 묻지만 어머니는 끝내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어머니의 이혼 선포는 다소 충격적이었지만 중년 여성의 캐릭터는 언제나 그런, ㅡ크게 드러나지도 돋보이지도 않는ㅡ것이었기에 크게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놀라게 된 것은, 그에 관한 작가의 인터뷰를 보고 나서인데 이 책을 지은 정한아는 이 주인공의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인터뷰어: 주인공이 어머니 역시 아버지와 이혼하려는 속내를 딸에게 모두 얘기하지 않죠. 모두 같은 맥락이에요.
작가: 되게 어려운 일이에요. 자기 언어를 가져야만 발화가 가능하잖아요. 특히 어머니 세대, 중년 여성에게는 자기 언어가 정말 없어요.
자기 언어가 없는 중년 여성. 스치듯이 읽은 이 구절이 어느날 엄마와의 통화를 통해 가슴에 박혔다.
나: 엄마 다음주 주말에 올 수 있어요? 0서방이 바빠서 엄마가 좀 도와주면 좋겠어요. 엄마: 아빠한테 물어볼게. (이후의 통화에서) 엄마: 아빠가 가신단다.
저런 화법에 아무 생각이 없다가 어느날 저렇게 이상한 말이 어딨나 싶어 엄마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엄마는 안와?" "나도 가지~"
사실 육아에 있어 아빠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다. 내가 필요한건 엄마의 도움이고 도움을 요청한 것도 엄마인데 엄마는 아빠가 온다고 말한다. 이렇게 이상한 말이 어딨나.
이때의 00이는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형이다. 장남, 그러니까 어머님이 사랑하는 그녀의 첫째아들. 이런 대화의 패턴이 수도 없이 이어져 신혼 초 이렇게 특이한 대화에 의문을 품은 내가 남편에게 물은적이 있다.
"여보, 어머니는 왜 맨날 남의 남편 이야기만 하셔?"
요즘의 대화 패턴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달라진 게 있다면 맏아들이 주를 이뤘던 대화의 주체가 종종 맏아들의 아내가 대신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의견을 이야기하면 그 의견에 대해 자신의 맏아들이나 그의 아내의 발화를 대신 언급하신다.
왜 그녀들은 자신을 주체로 발화하지 못하는 걸까? 어쩌다 그녀들은 그렇게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린걸까. 내가 궁금한 건 아빠의 의견도 장남의 의견도 아닌 그녀 자신의 의견임을 그녀들은 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러한 현상이 주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 곰곰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녀들이 다른 사람의 뒤에서 타인을 위해 보낸 시간만큼 그녀들은 그녀의 언어를 잃어버린 것이다. 나로 존재하기 보다는 엄마와 아내로 존재하는 게 더 익숙하고, 인생의 2/3 이상을 자식과 남편을 위해 살아온 그녀들은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그렇게 잃어버린 자신의 빈자리는 남편이나 자식이 채워나간다. 장을 볼 때도 나보다는 가족들을 먼저 생각한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식재료를 사고,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뚝딱 차려낸다. 이렇게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녀들은 자신의 기호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타인의 기호를 우선시한다. 그렇게 타인의 의견이 내 의견이 되고 타인의 생각이 내 발언권을 대체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그녀들은 나를 잃어버리고 타인이 되어버렸다.
나를 잃어버린 우리의 어머니들, 대한민국의 아줌마들은 그렇게 자신과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이슬아 작가가 자신의 엄마를 '복희'로 아빠를 '웅이'로 지칭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겠다. 그들이 나의 '그림자'나 그 어떤 '역할'로도 존재하지 않고, 온전히 그 이름으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게 하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한 중년의 여인들이 지금부터라도 온전히 본인을 위해 살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면 좋겠고, 자신의 기호와 취향을 더 우선했으면 좋겠다. 더 이상 타인을 위해 자신의 말을 뭉뚱그리지 않고 선명한 자신의 언어로 얘기하면 좋겠다. 엄마가 가진 그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며, 그렇게 자신의 자리에 우뚝 서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