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말라카 2018
이 글 바로 전편에서 살짝 언급했듯, 기분 좋게 잠들거라 예상했던 말라카에서의 첫날밤은 끔찍 그 자체였다. 숙소가 주는 분위기에 취해 대충 짐만 던져놓고 나갔기에, 내 숙소가 진짜 어떤 상태인지는 밤이 다 되어서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220V 충전기가 없다는 건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니, 보통은 110V 충전기라도 있기 마련인데 어떻게 된 게 이곳에는 제대로 된 충전 포트마저 없었다. 사실 이건 편의성 부분이니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제일 중요한 건 위생이었다. 순백으로 가득 차야할 시트에는 정체 모를 벌레의 시체 하나가 다소곳이 잠들어있었다. 거기서 퍼져나간 검붉은색 액체는 앙증맞게 시트 위를 물들였다. 그냥 파리나 모기라면 별 상관없겠지만, 여행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베드 버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시간은 벌써 자정이 다 되어가서, 카운터에 갔더니 사람들마저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 바닥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녹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한 번 이런 인식을 갖게 되니 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비위생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잠을 안 잘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침대를 포기하고 소파 2개를 끌어다가 간이침대를 만들었다. 한 팔을 배게 삼아 소파에서 잠을 자기로 선택한 것이다. 불편한 자세 때문에 한두 시간마다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결국 잠을 설쳤다. 정말이지 최악의 하루였다. 기분 좋게 온 여행에서 이런 경험을 한 건 처음이다. 적어도 위생으로 내 기분을 언짢게 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난 일어나자마자 카운터에 가서 나머지 하룻밤을 그냥 취소했다. 당일 취소는 환불이 안 된다는 말에, 상관없다고 그냥 취소해달라고 요청했다. 잘 곳이야 어디든 있겠지. 정 안 되면 도심에 있더라도, 숙박비가 비싸더라도 시설 좋은 호텔에 가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직장을 다녀서 좋다고 생각한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폭풍 같은 아침이 지나가고 이 장소가 한순간이라도 더 있기 싫었던 나는 모든 짐을 챙겨서 말라카 시내로 향했다. 캐리어와 짐을 물품 보관소에 맡기고 식사를 하러 갔다. 원래 숙소에서 아침 조식을 먹을 예정이었기에, 갑자기 정처 없이 식당을 찾았어야 했다. 그 어떤 조사도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서서 스마트폰을 켰다. 그리고는 인스타로 나에게 말레이시아 커피를 추천해줬던 친구에게 DM을 보냈다. 아침에 먹을만한 말레이시아 식당 프랜차이즈가 있냐고. 그 친구는 놀랍게도 똑같은 곳인 '올드 타운 화이트 커피'를 추천해줬다. 이름과는 다르게 식사도 충분히 맛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 가게에 대해서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있다면, 말레이시아 시내 어디서든 매우 찾기 쉬운 곳이라는 점이었다. 한 쇼핑몰 1층에 위치한 가게에 들어가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카레? 비빔? 국수와 카야 토스트, 그리고 커피를 시켰다. 카야 토스트의 황홀함을 살면서 이때 처음 깨달았다. 애초에 카야 버터를 처음 먹는 순간이었다. 한 동생이 꼭 먹어보라고 추천하길래 배부를 걸 각오하고 시켰는데, 안 시켰으면 세상 후회할 뻔했다.
국수 역시 맛이 매우 준수했고, 카야 토스트의 달달함, 그리고 이미 검증된 커피를 통해 기분 나빴던 아침의 불쾌함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역시 사람은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해지는 것 같다. 하나 감사했던 건 카야 토스트는 한국에서도 꽤 유명해서 일반적인 카페에서 자주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외국에서만 유명해서 한국에서 먹지 못하는 음식들이 많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 압도적인 감사라고 할 수 있다.
배도 차고 기분도 좋아졌겠다. 이제 말라카를 유유자적하게 즐길 시간이었다. 오늘은 오후 1시에 투어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상하게 말라카에서 시작하는 투어는 아니고, 내가 어제만 해도 있었던 쿠알라룸푸르에서 관광객들을 데리고 벤을 타고 오는 일정이었다. 반딧불을 보러 쿠알라 셀랑고르로 갔던 내 일정과 비슷한 구조였다. 여기서 내 고민이 시작됐다. 원래는 말라카에서 하루를 더 잘 생각이었으나, 막상 찾아보니 오늘 하루 이후 말라카에서 할 게 별로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왜인지 어젯밤 사건 이후로 쿠알라룸푸르가 너무 그리워졌다. 밤 11시, 자정이 다 되어가도 길거리에 사람과 가게가 가득한 그 부산스러운 거리가 너무 보고 싶었다. 나는 가이드분께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다시 쿠알라룸푸르로 올라갈 때 나를 데리고 가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호텔 하나를 바로 예약했다. 이제 모든 세팅이 끝났다. 즐기기만 하면 됐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투어로 갈 곳을 미리 가면 재미가 없기에 존커 스트리트라는 곳을 걷기로 했다. 여기는 말라카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권이자 야시장이 열리는 곳이라고 했다. 회사의 일정에 묶인 몸이라 야시장이 열리는 날에 오지는 못하지만 그 분위기라도 느끼고 싶었다. 이제는 말하기도 입 아프지만, 나는 도시의 중심 거리를 걷는 걸 매우 좋아한다.
확실히 수도가 아니라 그런지, 쿠알라룸프르의 거리와는 확연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물론 미시적인 부분에서는 비슷한 분위기를 공유했지만, 전체적으로 쿠알라룸푸르의 그 현대적인 분위기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아니, 이 거리는 내가 편견으로 갖고 있던 말레이시아의 분위기 그 자체를 함유하고 있었다. 편견은 단어 자체가 되게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과학적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편견이라 치부하고 무시하기에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나쁜 건 아니다. 그걸로 해당 문화를 무시하는 게 문제일 뿐이다.
여하튼 내가 예상하던 그 분위기의 거리를 걸으니 기분이 꽤 좋아졌다.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파는 코코넛 아이스크림, 기념품 가게에 파는 다양한 잡화들을 보니 진짜 여행객이 된 기분이다. 만약 밤에 야시장이 열린다면 얼마나 내 감성과 설렘을 자극할지, 직접 보지 않아도 이미 느낄 수 있었다.
존커 스트리트 초입에서 끝까지 왕복을 하며 거리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전날 밤의 기억이 너무 안 좋아서 반대급부였던 걸까? 아니면 정말 이 거리의 향기가 너무 좋았던 걸까? 사람 냄새, 거리 냄새, 그리고 건물에서 나는 모든 냄새마저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나쁘게 말하면 편견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내가 그리던 그 분위기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 사실은 나로 하여금 아주 작은 꿈을 이룬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분명 중간에 사 먹은 코코넛 아이스크림이 지대한 역할을 했음이 분명했다.
그렇게 거리를 다 거닐었을 무렵, 투어 시간이 다가왔고 여행사 가이드분으로부터 보이스톡이 왔다.
가이드분을 만나기로 한 곳은 네덜란드 광장이었다. 말라카 하면 안 들를 수가 없는 곳이며 랜드마크가 되는 장소다. 사실 존커 스트리트와 이 광장은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하지만 일부러 이곳에 가지 않았다. 투어로 이곳을 정식으로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래 밥을 먹을 때도 맛있는 건 나중에 아껴가며 한꺼번에 먹을 때가 제일 즐겁다. 그런 이치다.
사실 네덜란드를 가본 적은 당연히 없다. 그래서 이곳이 진짜 네덜란드 광장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곳인지 모른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접한 여러 매체들을 통해 간접 체험한 네덜란드가 다 정확하다는 가정 하에, 이곳은 네덜란드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밝은 톤을 가진 붉은 원색 건물들과 튤립 가득한 화단만으로 이미 충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건물 양식이 완전히 네덜란드식이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게, 이 지역은 한 때 네덜란드의 식민지였기에 흉내 내거나 따라한 것이 아닌, 네덜란드의 양식을 그대로 닮아있던 것이다. 아주 잠시, 이곳이 말레이시아라는 것을 아예 잊게 만들 정도로 이 광장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이질적이었다. 내가 동남아시아에 와서 네덜란드를 가고 싶어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광장의 아름다움에 넋을 뺏겨 신나게 셔터를 눌러대는 사이, 한 남성분이 나에게 다가와서 혹시 투어 픽업을 신청하신 분이냐고 물어봤다. 살짝 민망했지만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그분이 타고 오신 하얀 벤에 얼른 내 몸과 물품보관소에서 찾은 짐을 밀어 넣었다. 안에는 이미 열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어제보다는 확실히 규모가 좀 있는 투어였다. (거리가 멀어서 단가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제 이런 것까지 보인다) 네덜란드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운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말라카 거리 곳곳을 걷기 시작했다.
가이드분을 만나기 전에 말라카를 걸으면서 의문을 가졌던 것이 하나 있었다. 일반 사람들이 사는 집들을 보면, 복층 구조로 되어있는 집들의 양식이 현저히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층과 그 위층들의 색감부터 재료까지 다 너무 상이했던 것이다. 가이드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가 제대로 봤다는 것과 그 이유까지 알 수 있었다. 말라카는 원래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가, 네덜란드의 소유로 바뀌었다가, 영국의 지배까지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식민 지배하는 나라가 바뀔 때마다 건물을 증축하며 그 양식이 바뀌었다고 한다. 즉, 한 자리에 각기 다른 두 세 유럽 국가의 색이 칠해진 것이다.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를 받은 적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의 지배를 받았다는 건 처음 안 사실이었기에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서로 다른 나라의 색채가 한 곳에 모인 아름다운 마을. 그 지배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잔재 속에서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자들의 이야기. 벌써부터 재밌는 설정과 시놉시스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여행을 왔지만 결국 여기 와서도 게임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놀러 다니면서 콘텐츠를 상상하는 건 참 재밌는데 왜 회사에서 그러는 건 스트레스받고 고통스러울까. 즐기는 걸 보면 천직이 맞긴 하는데 말이다. 이때부터 '혹시 내가 아니라 회사가 문제인 걸까?'라는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여태까지는 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다음으로는 존커 스트리트로 향했다. 아까 걸었던 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가이드분의 설명을 들으며 내가 놓친 부분들을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존커 스트리트 투어가 끝난 뒤, 한 시간 정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투어를 다니면서 눈여겨둔 곳에 가서 그 장소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시간이다. 평소의 나라면 말을 조금 튼 사람들과 함께 어딘가로 향했겠지만, 이날은 그냥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일단 가장 중요했던 건 존커 스트리트의 맛집 중 하나인 존커 88에 가는 것이었다. 아직 식사 시간은 아니었기에 나와 함께 이곳에 갈 사람이 없었을 게 뻔했다.
매콤한 국물에 튀김, 해산물, 그리고 국수를 넣은 요리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비주얼만 보면 떡볶이 국물에 면, 달걀, 튀김, 해산물을 넣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성공할 수밖에 없는 요리긴 한데, 확실히 이 지역 특유의 향신료를 써서 그런지 더 매콤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날,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진짜 '맛이 없어서' 못 먹는 음식을 찾아냈다. 바로 두리안 아이스크림이다. 이미 두리안이라는 과일 자체가 호불호가 매우 심하지만, 설마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었는데 맛이 없을까 싶은 생각으로 도전했다. 하지만 한 입 베어 물고 다짐했다. 앞으로는 두리안으로 만든 그 어떤 것도 먹지 않겠노라고.
자유시간이 끝났다. 우리는 약속한 시간과 장소에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와중에 서서히 하늘이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대망의 하이라이트, 해상 모스크 노을 감상이었다. 네덜란드 마을과 존커 스트리트를 둘러본 것 역시 좋은 경험이었지만, 이후에 있을 해상 모스크 감상이야말로 사람들이 이 투어를 신청하는 이유다. 마지막 일행이 약속 장소에 올 때까지, 네덜란드 광장의 강가를 감상하며 그 설레는 마음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말라카에 있는 해상 모스크는 그 아름다운 모습으로 유명한 곳이다. 진짜로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건 아니지만, 바닷가 끝자락에 세워져서 그런지 바다 위에 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 곳이다. 건물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도 상당하지만, 이곳에서 제일 유명한 건 바로 노을 경관이다. 말라카는 말레이시아에서도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곳이라 그런지 노을을 보기 좋은 장소다. 그리고 사실 이 경관이 내가 미러리스 카메라를 산 이유다. 이 노을을 가감 없이 렌즈에 담고 싶었기에 미러리스를 산 것이다. 그랬기에 날씨가 안 좋아서 노을을 못 본다면 땅을 치고 한탄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날씨가 매우 좋다며 가이드분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셨다. 주차장에 내리니 우리 말고도 수 십, 아니 수 백 명은 되는 듯한 관광객들이 해상 모스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노을 시간에 맞춰서 투어를 낀 여행객들이 단체로 걸어가는 장면을 보니 학창 시절 수학여행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설렜다는 얘기다.
우리는 가이드분이 안내하는 대로 노을이 잘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근처는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야시장이 걸린 것처럼 사람들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고, 행복한 웃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단순히 여기서 노을을 본다는 사실 때문에? 아니다. 그저 예쁜 장면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본다는 사실이 기쁜 것이다. 나와 함께 투어를 다니던 일행들 역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행복에 겨워했고, 특히 연인 분들의 분위기는 오늘 내가 본 것 중 가장 달콤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만약 평소였다면 소위 말하는 '현타'가 왔을 것이다. 왜 나는 이런 곳에 혼자 와있는가라는 그런 허무함과 공허함이 뒤섞인 생각 말이다. 조금은 달랐지만,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나를 찾아왔다. 보고 싶은 사람이 문득 떠올랐다. 아니, 문득 떠올랐기 때문에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이 여행에 함께 오기로 한 사람이 있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였다. 내 즉흥적인 여행 계획에 자기도 신나서 함께 간다고 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바로 다음날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되는 바람에 잠시 연락을 끊은 그런 친구였다. 같이 와서 함께 봤으면 좋았을 텐데. 돌아가면 먼저 용기 내서 미안하다고 연락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다시 웃음꽃을 피우길 간절히 바랬다.
내 염원이 하늘에 닿은 건지, 어느새 아름다운 노을이 오로라처럼 창공을 수놓고 있었다.
글을 쓰다 보니 깨닫는 거지만, 말레이시아에서 본 노을들은 아름다움의 우위는 제쳐두고 그 형상이 하나하나가 다 특이했다. 원숭이 언덕에서 본 노을은 아프리카 대자연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지금 이곳에서 보는 노을은 마치 극지방에서 하늘을 커튼처럼 수놓는 오로라처럼 보였다. 어떤 자연법칙 때문에 그런 건지 궁금할 정도로 신기한 모양의 노을이 저 멀리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노을과 대비되는 해상 모스크의 에메랄드빛 조명이 이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켰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그리움은 이 경이로운 장면 앞에서 저 노을처럼 사라져 갔다. 지금 이 순간은 노을에만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건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진 것이다. 아 물론 완전한 침묵은 아니다. 사람이 모두 같을 순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말 조용해진 게 티가 날 정도로 사람들은 노을을 멍하니 보며 감상에 빠졌다. 물론 소리 말고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만큼 이 노을이 누가 봐도 아름다웠다는 반증일 것이다.
숙소에서 일어났던 불쾌함은 이미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이 되어 있었다. 오늘 하루는 이 노을 선에서 정리 가능했다. 하루 종일 네덜란드 광장과 존커 스트리트를 보며 느꼈던 것들이 이 노을 하나 앞에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어쩜 이리 경건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아마 이때가 감성이라는 수치가 내 인생에서 가장 최고조를 달리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약속 장소에 도착한 뒤, 감상에 빠진 우리들의 모습을 본 가이드분이 씩 웃으셨다. 되게 전형적인 반응들이었나 보다. 그분은 이제 감성이 충만해졌으니 오늘의 마무리를 해본다고 하셨다. 그리고서는 이 중 한 명은 분명히 마지막 코스에서 눈물을 흘리실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다음 일정은 말라카를 빙 둘러싸는 강을 페리로 돌며 유람하는 것이다. 가이드분은 꼭 이어폰을 준비하라고 하셨고, 이때는 잡담하지 말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말라카의 밤을 감상해보라고 하셨다. 해상 모스크에서의 노을을 보고 온 뒤, 밤 유람선을 타면 무조건 한 명씩은 감성에 사무쳐서 울었다고 한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불빛 가득한 강가를 페리로 둘러보니, 아까 잠시 사라졌던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사무칠 정도로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파리의 밤을 한 바퀴 돌던 바토무슈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생각은 더 커져가며 유럽 여행의 추억들을 불러냈다. 노래마저도 이스탄불에서 야경을 보며 듣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유럽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 역시 머릿속을 빠르게 훑어 지나갔다. 대만, 일본 및 다른 여행지와 거기서 만난 모든 것들이 파도처럼 빠르게 몰아쳤다. 비단 여행뿐만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살아오며 지나친 모든 것들이 나를 잠식해 들어갔다. 그 과거들이 그리워졌다.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이 아닌, 그저 지나간 것들을 향해 우리가 흔히 보내는 그런 그리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놓고 온 것들...
가이드분이 했던 말이 단번에 이해가 갔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사람들은 분명 어딘가에 소중한 것 하나를 놓고 온 사람들일 것이다. 그 소중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해상 모스크에서의 노을과 강가에서 말라카의 밤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으로 인해 눈물이 된 것이리라. 아, 그제야 깨달았다. 이번 말레이시아 여행이 끝자락아 도달했구나.
갑자기 쿠알라룸푸르가 그리워졌다. 고작 이틀 있었고, 헤어진 지 하루밖에 안 된 도시이지만 서글플 정도로 그 도시가 보고 싶었다. 도시 어디에서든지 보이는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도 보고 싶었고, 부킷 빈탕의 번잡한 거리가 그리웠고, 편안한 호텔 방에 누워서 창밖 도시 야경을 바라보고 싶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런 걸까. 마치 유럽 여행 도중에 이스탄불을 그리워하던 모습과 비슷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일주일 동안 있던 곳을 3주 뒤에 그리워하는 것과, 이틀 있었던 곳을 하루 뒤에 그리워하는 것은 분명 다를 것이다. 그 감정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이 그리움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항상 여행의 막바지를 그리움이라는 감정으로 마무리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여행을 끊지 못하는 것 같다. 기-승-전-결로 끝나야 하는 것들이 기-승-전으로 끝나버리니, 그 마지막에 올 '결'이 궁금해서 다시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다. 마무리 짓지 못한 감정의 끝을 보기 위해서 여행을 가는 것이다.
누가 울었냐고 물어보는 가이드분의 질문에 부끄러워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 서로가 울었는지 안 울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말라카의 밤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말라카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