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 새끼가 '인정투쟁'을 멈출 수 없는 이유

피라미드 앞에 선 대한민국 사람들

"여러분 이제 목을 구부리고 '꽥꽥'이라고 말하세요."
아기 오리들은 시키는 대로 하더니, 누군가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봐요, 저 친구는 정말 이상하게(queer) 생겼어요. 우리는 그가 여기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한 오리가 날아가 그 친구의 목을 물었습니다.

"그를 내버려 두거라"라고 엄마 오리가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잖니"
"네, 엄마. 하지만 쟤는 너무 크고 못생겼잖아요"라고 독기 어린 오리가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쟤는 여기서 쫓겨나야 해요, 참아줄 수가 없다고요"
-안데르센, <미운 오리 새끼>



<미운오리새끼>는 아이들에게 들려주기에 잔혹한 측면이 있다. 괴롭히는 장면을 보면, <더 글로리>를 방불케 할 정도다. 오죽하면 저자 안데르센은, 주인공의 고난을 설명하면서 "그 혹독한 겨울 동안 그가 견뎌야 했던 모든 고통과 불행에 대해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너무 슬플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생략하기까지 했다. 동화 속에서는 아름다운 백조로 성장해서 행복해하며 끝나지만, 현실에서 왕따, 소수자, 약자들에게 해피엔딩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우린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이 매우 예쁘네요, 저 아이는 빼고요." 지나가던 늙은 오리가 말했습니다.
"네. 예쁘지는 않아요. 하지만 성격도 착하고, 다른 아이들처럼 예쁘게 수영하고, 심지어 솜씨도 좋아요. 앞으로는 예쁘게 자랄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몸집이 작아질 수도 있고요. 아마도 알 속에 너무 오래 남아 있어서, 몸매가 갖춰지지 않은 거겠죠." 그녀는 그의 목을 쓰다듬고 깃털을 매만지며 말했습니다. "그런 건 중요치 않아요. 저는 그가 튼튼하게 자랄 것이고, 자신을 돌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뭐 어쨌든 다른 아이들은 충분히 우아해 보이네요." 늙은 오리가 말했습니다.
- <미운 오리 새끼> 중.



작가 안데르센은 명확히 지적한다. 인간이란 동물은 참 신기하게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아도', '이상하게 생기거나', '너무 크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무리에서 쫓아내려고 하고 심지어는 같이 있는 걸 잠시도 참기 힘들어 한다는 걸. (나무위키에 따르면, 과학적으로는 실제 오리 집단에 백조가 태어나도 공격하지 않고 대부분 잘 지낸다고 한다. 역시 인간은 인간이다.) 지나가는 늙은 인간은 뭘 보태준 적도 없으면서 아이를 상대로 날카로운 말을 던진다. 아마도 그가 어렸을 때 비슷한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한 구조는 대를 이어 내려간다. 21세기 한국에서도 외모, 성적, 연봉, 인종, 취향 등 차별과 지적의 이유만 달라질뿐, 소수자에 대한 괴롭힘은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다.



안데르센의 일기와 편지 등 기록에 따르면 그는 '양성애자'였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한다. 특히 인어공주 창작 과정에서는 개인적인 (남성을 향한) 짝사랑의 실패 경험이 직접적인 모티프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안데르센은 말이 되나 싶을 정도로 훌륭한 글을 많이 썼고, "미운 오리 새끼, 인어공주, 벌거벗은 임금님, 엄지공주, 성냥팔이 소녀 등"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동화가 그에게서 나왔다. 누군가는 양성애자가 쓴 동화를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없다고 분노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책꽂이의 상당부분을 비워놔야 할 것이다. 그의 동화들을 꼭 '성소수자 권리'의 관점에서만 볼 것은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차별과 다양성에 대한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글에서는 미운 오리 새끼와 관련해서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이라는 개념에 대해 논의해 보려고 한다.




악셀 호네트는 1949년 독일 출생의 현역 교수로서, 매우 최근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정 이론', 혹은 '인정 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이라는 개념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1992년 출간된 책 '인정 투쟁'은 많은 학자에게 인용되며 현대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 마디로 간추린다면, 결국 문명, 역사, 공동체에서의 많은 인간 활동들이 사실 다양한 방식의 '인정'을 받기 위해 벌이는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정 투쟁의 반대말은 분배 투쟁(distribution struggle)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인정 투쟁은 보부아르와 주디스 버틀러가 주창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함께 논의되기도 하는데, 이 글에서는 인정이라는 개념에 더 집중하고자 한다.


오늘날 인정은 우리의 세계를 설명하는 개념어가 되었다. 페미니즘, 퀴어, 문화적 다양성 등을 내세우며 세계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다양한 투쟁들은 이제 인정의 개념 아래 정체성 인정을 위한 투쟁으로서 파악된다. 호네트(Axel Honneth)는 헤겔과 미드의 통찰을 통해 자신의 인정 개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하나의 투쟁 이론으로 구성한다. 세계의 각 주체가 참여하는 사회적 투쟁은 개인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충족되길 원하는 인정 욕구로부터 기인하며, 투쟁을 통해 그들은 자신에게 합당한 인정을 쟁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는 좋은 삶의 이념이 함축되어 있다. 인간은 정서적인 존재로, 권리의 담지자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때 자기실현에 도달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욕구가 좌절되었을 때, 이는 단지 심리적 불안이나 사소한 박탈감에 그치지 않는다. 인정을 통해 긍정적 자기관계에 도달하지 못한 개인은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한 위협을 느낀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좋은 삶을 위해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호네트가 규정하는 “인정을 둘러싼 투쟁(Kampf um Anerkennung)”이다.
-장성빈, <악셀 호네트에서 인정과 순응의 문제: 이데올로기적 인정 개념을 중심으로>, 학위논문(석사)



가령 최저임금을 올려 달라, 노후연금을 보장하라는 요구는 물질에 관한 것이므로 분배투쟁이다. 그런데 어떤 투쟁들은 분배나 물질적, 경제적 이익과 상관이 없는데도 매우 격렬하고 진지하게 벌어진다. 때로는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거액의 합의를 마다하기도 한다. 현실의 여러 투쟁 노선과 사례들을 무 자르듯이 분배냐 인정이냐 라고 양분할 수는 없겠지만, '돈이나 제도와는 상관없이, 일단 나를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해달라'는 메시지를 시위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장애인들은 장애를 특별하게 취급하지 말고 평범한 특징 중 하나로만 여겨달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저 사람들 결국 돈 달라고 떼쓰느거다'라고 욕할 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생각보다 많은 사회 운동들은 분배보다는 인정을 주된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분배와 인정은 단절된 개념이 아니고, '돈 달라고 떼쓰는' 게 꼭 나쁜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남들의 시선이 어떻든 분배만 확보하면 이후 인정도 받게 될 거라는 전략도 있고 반대로 먼저 인정받은 후에야 분배 요구가 실현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한편 인정을 포기하고 실리를 취하기도 하고 분배를 포기하고 인정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처럼, 인간은 물질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렇다면 빵 말고 무엇이 필요할까? 먼저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을 참조해 볼 수 있다. 문헌에 따라서 5단계 이론, 8단계 이론 등으로 불리는데, 1)생리적, 2)안전, 3)사회적, 애정, 4)인정과 존경 욕구 까지는 공통적이고, 5) 지적, 6) 심미적, 7) 자아실현, 8)자기초월 욕구로 서술되는 경우가 있다. 간략하게 5)부터 8)까지 합쳐서 자아실현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 같다. 심리학자 앨더퍼는 이를 세 부류로 통합해서 E(생존), R(관계), G(성장) 욕구로 개념화하기도 했다. 욕구들 간에 우선순위나 우열, 선후 관계가 있는지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중요한 건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에게 인정받는 걸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다. (보통 호네트의 인정은 recognition, 매슬로우의 인정은 통상 esteem과 respect로 표현되는데 뚜렷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Maslow, Abraham H. (1943). "A theory of human motivation". Psychological Review. 50 (4): 370–396.


물론 인정의 근거는 다양할 수 있다. 외모, 지능, 글솜씨, 도덕성, 피지컬 등 우리는 온갖 기준과 표준을 만들어서 소수의 엘리트들을 추앙한다. 이렇게 질문해보자. 한국의 고3 학생들이 수능시험에서 고득점하려고 밤을 새고 자기를 혹사시키는 행동은 분배 투쟁일까 아니면 인정 투쟁일까? 경제학적으로 보면, 전망이 좋은 학교와 전공에 가서 미래에 고소득이 기대되는 직종과 회사에 취업하는 효율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 비용 편익 분석을 통해 합리적인 판단으로 수능특강을 펴는 것이다. 연봉 혹은 고소득 직종이라는 한정된 케이크를 더 많이 먹으려고 달려드는 셈이다.


한편 인정 투쟁의 관점에서 보면, 부모님과 교사, 친구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인정받으려는 목적이 더 근본적인 원동력이 될 것이다. 물론 그 내면에는 자기를 무시했던 선생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다든지, 원치 않는 학교에 가서 무시당하기 싫다는 식의 부정적인 마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모든 요소를 통틀어 인정 투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인정이라는 자원 역시 대부분 유한한 것이고, 그 투쟁은 결코 아름답거나 평화롭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 사회에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혹사당하며 괴로워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기고 지는 것에만 치중하지 말고, 좋은 투쟁이 무엇인지 성찰해야만 한다.


드라마 SKY캐슬에서는 이러한 투쟁 과정을 피라미드에 비유해 참신한 논의를 제시하기도 했다.


인생에서 중요한건 우정, 의리가 아니야. 니들 위치야. 피라미드 어디에 있느냐라고. 밑바닥에 있으면 짓눌리는 거고, 정상에 있으면 누리는 거야.
세상이 왜 피라미드야. 지구는 둥근데 왜 피라미드냐고!
피라미드에서는 미라가 맨 꼭대기에 있는 게 아니라 (가운데를 가리키며) 요기, 요기에 있대. 요기가 제일 좋은 거지. 중간이 최고야.
엿 같은 피라미드.
-<SKY캐슬> 중.




위 이야기에서 한 가지 생략된 건 피라미드, 혹은 위계의 선별 기준이 무엇이냐이다. 이에 대해서는 칼 마르크스의 일원론, 계급론과 막스 베버의 다원론, 계층론 같은 개념들이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사회문화 참고서 중에는 아래와 같이 정리한 책도 있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우리는 계급론처럼 편협한 사고를 가지기보다는 계층론처럼 다양성을 인정하는 시선을 가지도록 노력합시다"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출처: https://chamstory.tistory.com/3375

사회학 교수님이 보면 경악할 정도로 과도하게 단순화된 도표이며 오류도 많다고 생각하지만, 나름의 인사이트를 주는 건 사실이다.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하다. 우리 사회의 피라미드는 다원론인가 아니면 일원론인가. 내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지난 10여년 사이에 급격하게 일원론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본다. 언제부턴가 '돈이 최고다'라는 말이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인지 섬뜩한 느낌도 든다. 다원론은 지위 불일치 현상을 설명하기에 용이하다고 하는데,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 지위 불일치라는 것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앞으로는 더욱더 돈이 곧 권력이고 명예고 사회적 지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다면, 돈이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해봐라"는 속설이 있다. 빵만으로 살 수는 없어도 돈이 있으면 우정도 인정도 학벌, 심지어 종교적 파워도 살 수 있게 된다. 예수님 시절에는 자본주의가 없었으니 모두 종교를 열심히 믿었지만,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뒤에는 진정 부자들의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될 지도 모를 일이다. 다원론을 가지자고 독려했던 선생님의 가르침은 그저 현실을 모르는 좋은 말에 불과했던 것일까.


아무튼 계급론과 계층론의 비교는, 분배 투쟁과 인정 투쟁의 비교와 대응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계급, 계층 이외에도 성별, 인종, 장애, 국적, 종교, 성적 취향 등에 근거한 차별적 관습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어떤 소수자들은 특출난 능력과 재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여전히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인정투쟁이라는 개념의 독자적 의미는 유지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사회문화적 차별과 관습이 효율성의 논리에 따라 개선되고, 자연스럽게 능력주의 사회로 이행한다고 예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미운 오리 새끼가 괴롭힘당한게 무슨 능력이 부족해서 그랬던건가? 그냥 꼴보기 싫어서 그랬던거 아닌가. 그래서 그런 모순을 해결하려는 투쟁가들은 인정 투쟁에 집중하면서 분배 투쟁에는 관심을 소홀히 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한편 분배 투쟁에 몰두하는 활동가들은 인정 투쟁의 시급성을 경시하거나 먼 미래의 과제라고 미뤄두기 쉽다.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투쟁의 우선순위 방법론 측면에서 이견이 생기기 쉽다. 그렇게 투쟁 노선이 분산되는 과정에서도 연대와 결속을 유지하는 것이 현대 사회운동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지위와 계급이 불일치하는 현상은 우리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소위 '사농공상'이라는 관념과 박지원의 <양반전>을 떠올려보자. 돈은 많아도 천대받았던 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지위가 높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늘 비천하여 감히 말도 타지 못하고, 양반을 보면 바로 허리를 숙이고 종종걸음쳐야 하며, 길에서는 엎드리고 뜰에서는 절하며 코를 처박고 무릎으로 기어야 한다. 우리 신세가 항상 이렇게 욕되다. 지금 양반이 쌀을 갚지 못해 매우 난감하게 되었으니, 그 꼴이 그 양반 자리를 보존치 못할 듯하다. 우리가 그 신분을 사서 가지도록 하자. - 박지원의 <양반전> 중.



박지원이 양반 제도의 모순과 고리타분함을 풍자하려 한 의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타당했지만, 아마 그 똑똑한 연암 박지원도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전해 모든 가치가 돈으로 거래되는 물질만능주의의 폐해까지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모든 규범과 관습을 거래와 금전으로 환산하는 세태를 비판한 바 있는데, 뭐든지 돈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오히려 어떤 가치들은 돈으로 사지 못하게 금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할 수 있다. 사회적인 '인정'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일까? 혈통과 신분에 따라서 '인정과 명예'를 할당하는 시스템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자본과 경쟁에 맡기는 것도 잘못이다.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어느 정도 최소한의 인권을 인정받아야 하고, 인간의 이타심과 정직, 우정, 사랑, 예술, 봉사, 창의성 등은 그 자체로 숭고한 가치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출처 : wikipedia, "the ugly duckling"

다시 미운 오리 새끼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린치당하고 목덜미를 물어뜯겼던 이유는 뭘까? 밥을 많이 먹어서 다른 형제들에게 불이익이 될까봐? 그렇지 않다. 약자를 타겟으로 정하고 공격함으로써 인정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많은 학교의 교실에서 벌어져 왔고 앞으로도 벌어질 것이다. 최근 유튜브에서 방송인 알베르토가 "학교폭력의 원인 중 하나는 가해자들의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라고 말한 걸 봤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학급 내에서 인정을 쟁취하기 위한 방식으로 괴롭힘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인정은 평화로운 방식으로 모두가 존중받으면서 확보될 수도 있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 꼭 누군가 무시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돈 뿐만 아니라 인정 역시옆집의 다른 누구보다 많이 가져야 만족하는 습성이 있다. 격차와 불평등이 있어야 관찰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 상호 존중과 인정이 정착되기 위해서는 유능한 교사의 적절한 지도와 시스템과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학교 공동체는 약자를 괴롭히거나 놀리지 않고 모두가 win-win하는 인정 투쟁의 방식을 충분히 학습하고 정착시키지 못한 것 같다. 인정 투쟁에서 마저 경쟁 논리가 작동하면 학생들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무시함으로써 자존감을 지켜야 하는 배틀로얄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 미운 오리 새끼는 구조적으로 계속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 백조 새끼를 쫓아낸 뒤에는 또다른 희생자를 찾아낼 것이다. 그래서 피라미드 앞에 선 미운 오리 새끼들은 인정 투쟁을 멈출 수가 없다. 위계적인 피라미드에 돌을 던지든지, 세력을 모아서 소리를 지르든지 해서 작은 변화라도 이끌어 내야 한다. 배틀로얄식 인정 투쟁은 잘못이라고 외쳐야 한다.

이외에도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로자 파크스의 흑백분리 반대운동, 긴즈버그 대법관의 인권변론을 통한 인정투쟁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는데 분량의 한계로 일단 미뤄두려고 한다.

인정투쟁을 논할 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투쟁해서 인정을 받아봤자 그 결과가 지독하게 공허하고 허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많은 흑인에게 인정 투쟁의 승리를 가져다 줬지만 그 동력이 타인에게 칭찬받으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의미를 부여하고 기특히 여길 수 있는 건 스스로밖에 없다. 인정을 타인에게서만 찾으면, 화려한 의전, 갑질, 눈치와 서열, 질투 문화로 이어지기 쉽다. 진정한 인정은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늘 성찰하면서도(히틀러의 <나의 투쟁>처럼 자기 독단에만 빠져있으면 안된다),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어야 진정 인정투쟁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형도 시인은 <질투는 나의 힘>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 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이 시의 화자는 미친 듯이 일하고 소유하고 피라미드 정상으로 올라가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 원동력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에 대한 갈망과 인정 욕구, 즉 질투였다. 누군가에 대한 질투와 자기혐오, 열등감은 때로 강력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가끔은 좋은 성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진짜 결과물이 어떤지 직시해야 한다. 수많은 공장을 세우고 공중에서 머뭇거리고,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어봤자 마찬가지다. 살아온 날들을 세어봐도 남은 건 행복은 커녕 탄식밖에 없을 것이다. 타인의 인정은 당신의 지위나 소유물에 그칠 것이다. 당신을 그 자체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물론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것은 무척 어려운 과제이다. 유일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탈출구가 바로 스스로에 대한 사랑, 다른 말로 자기 자신과의 인정 투쟁이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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