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법이란 무엇인가: 법대로 하는게 정답이 아닌 이유

왜 우측보행을 해야할까요? 도로교통법에 그렇게 쓰여있으니까?

“어떤 놈이든 집을 헐러 오는 놈은 그냥 놔 두지 않을 테야.” 영호가 말했다.
“그만둬.” 내가 말했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
아버지 말대로 모든 이야기는 끝나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당가 팬지꽃 앞에 서 있던 영희가 고개를 돌렸다. 영희는 울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영희는 잘 울었다. 그때 나는 말했다.
“울지 마, 영희야.”
“자꾸 울음이 나와.”
“그럼, 소리를 내지 말고 울어.”
“응.”
그러나, 풀밭에서 영희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 나는 손으로 영희의 입을 막았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나는 23년 2월, 로스쿨을 졸업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좋아하는 법 분야는 변호사시험 준비와 큰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수험 공부의 부담 때문에 레포트 정도의 글쓰기를 연습할 기회도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난 변호사 배지만 받았지 아직 실무를 알지 못하지만, 3년간 공부한 '법'이란 게 대체 무엇인가 본질적인 관점에서 고민해보고 글을 남기고 싶어졌다. 우리 법철학 교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서로 다른 두 대상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준이 필요합니다. 가령 사과와 사탕을 비교할 때 당도를 기준으로, 혹은 크기를 기준으로 할 수 있겠죠. 만일 변호사시험 준비에 유익한 정도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다면, 법철학은 포스트잇 한 장보다 쓸모없는 존재가 될 거예요." 수험의 관점에서는 법철학과 인권법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쓸모없는 공부에 시간을 낭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머리 속에 남는 건 수험보다는 관심분야 탐구였던 것 같다. 이 글에서는 메타인지를 키우기 위해, 도대체 법이란 무엇인지 여러 법조계의 어록들과 함께 검토해 보려고 한다.

<금발이 너무해>의 주인공 엘 우즈. 리즈 위더스푼이 연기했다
하버드에 입학한 첫날, 현명한 교수님께서는 "법은 열정을 배제한 이성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해 주셨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반감은 없지만, 저는 그 말에 반대합니다. 하버드에서의 3년 동안, 열정은 법학 연구와 실천, 그리고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첫인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열정과 신념, 강한 자신감을 가지면 세상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 우즈, 영화 <금발이 너무해>의 마지막 연설


한국의 로스쿨 생활이 <금발이 너무해>와 많이 다르기는 했지만, 열정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적극 공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법에서 열정을 배제한 이유는, 사법의 논리적, 체계적, 이론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엘 우즈의 연설처럼, 입법 과정이나 변론 장면, 인권 변호사들의 투쟁 장면을 떠올려 보면 법이야말로 가장 열정적인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설에서 말한 사람에 대한 믿음(faith in people)이란 무슨 뜻일까? 미국 흑인들이 인종차별 철폐를 외친 민권 운동 당시, 기득권 세력은 (어리석은) 흑인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면 미국이 망할 거라며 불안해하고 불신했다. 2008년 오바마라는 가장 똑똑한 흑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거라는 예상은 아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동성혼, 징병제, 사형제, 난민법, 선거법 등 다양한 법적 논란들을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들은 관습이 바뀌면 세상에 큰 일이 나고 사회가 무질서해지고 사람들이 고통받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걱정은 후견주의적인 편견과 불신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인간들은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 잘 해쳐나갈 수도 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와 법을 발전시킨 사람은 대부분 그러한 믿음과 열정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법조인들이 열정을 가지는 것 역시 장려할 일이 아닐까.

한편 미국의 전설적인 대법관 올리버 웬델 홈스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소위 'Bad man Theory'를 제시한 바 있다. 법의 속성상 낙관적인 기대를 가지고 법을 운영하면 안되고, 어떻게든 법을 악용하려는 악인들의 사회라고 가정하고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능하고 나쁜 사람은 규칙이 허용하는 바를 신중하고 정확하게 계산하고 규칙의 한계 범위를 이용할 것이기 때문에, 법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해석할 때에는 나쁜 사람을 대입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테스트가 된다는 관점이다. 그에 따르면 법 체계는 추상적인 윤리나 도덕의 영향에서 벗어나 개인의 유불리 계산으로 접근할 문제가 된다. 가령 음주운전이 나쁘고 생명이 소중하니까 자제하자고 하는 게 아니라, 단속될 가능성과 법적 불이익 때문에 참게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홈스 대법관은 "This is a court of law, young man, not a court of justice"라는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법원에 와서 정의를 찾지 말라는 말인데, 황당한 말처럼 보이면서도 법과 도덕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격언이다. 그럴 거면 대법원 건물 정면에 '자유, 평등, 정의'라고 써붙인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누군가는 "법원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세 가지를 써 놓은 것"이라고 풍자하기도 했다. 아무튼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지라는 말과, 인간의 사악한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법의 상반된 속성을 잘 보여준다.

'법이란 무엇인가'와 관련해서 내가 직접 경험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2021년 쯤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재판 방청을 갔는데 화장실에서 신기한 스티커를 발견했다. 화장실에는 위생이나 인생에 관한 다양한 내용의 스티커들이 붙어있지만 내 평생 이런 내용은 처음이었다. 그 제목은 <왜 우측보행을 해야할까요?>였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벽에 붙어있던 수십개의 동일한 스티커 사진


수많은 판사와 법원 공무원들이 지내는 중앙지법 건물의 화장실에 이런 스티커가 붙은 이유가 뭘지 생각해봤다. 내가 어릴 때는 좌측통행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있는데 언제부턴가 우측통행으로 바뀌었다. 알다시피 영국, 일본, 호주와 미국, 유럽, 한국, 중국이 관습 등의 이유로 운전석의 위치나 통행 방식 등에서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한다. 어떤 과학 기사에서 인간의 오른손잡이가 비율상 많은 것처럼, 인간의 두뇌 패턴상 우측통행이 자연스럽다고 읽었던 것 같다. 근데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이 스티커는 몇조 몇항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만 말할 뿐이지, "왜?"에 대해서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작은 스티커가 법원의 모든 화장실 모든 칸에 붙어있었는데, 어떤 직원이 땀흘리며 붙였을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온다.


우측보행의 장점에 관한 인포그래픽. 출처: 한겨레신문, <오른쪽걷기, 뇌에선 무슨 일이…심리적 안정감에 ‘알파파’ 퍼진다>, 이근영 기자



법이란 무엇인가?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법전에 쓰여있는 게 곧 법이다. 도로교통법 제8조 제3항에 '우측통행'이라고 되어있으면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다. 왜 음주운전을 하면 안 될까? 법전에 그렇게 되어있고 형사처벌 조항이 있으니까. 이는 음주운전의 피해자의 고통이나 슬픔과는 근본적으로 상관 없는 문제다. 그내용의 타당성이나 효율성, 역사에 대해서 몰라도 되니 훨씬 '간편'하다. 만일 조문에 '4족보행하시오'라고 쓰여있으면 일단 그렇게 따르라는 것이다. 법철학에서는 이처럼 실정법을 강조하는 입장을 <법실증주의>라고 부른다. 반면 실정법 이전에 영구적, 보편적인 질서나 윤리가 존재하며 그러한 원리를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자연법론>이라고 부른다. 자연법론에 따르면 음주운전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행위이므로 보편적인 윤리와 법칙에 위반된다고 말할 수 있다. 중학교 윤리 시간에 배운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법, 영원법, 자연법, 실정법이라는 4단계 이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이 일화에서 법에도 위계가 있고, 상위 법에 위반되는 하위 법은 효력이 없어질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려 볼 수 있다.


로알드 달 원작의 동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초콜릿 공장은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이다. 그리고 그 곳에는 당연히 고유하고 독특한 규칙과 법이 있다. 아이들은 "Do not touch or taste anything without permission", "Stay with the group" 등 간단해 보이는 규칙도 지키지 않아서 여러가지 황당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결국 가장 평범해 보이는 어린이 찰리가 투어의 마지막까지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규칙을 잘 지켜서였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교훈은 많은 아이들에게 일단 '순종하라'는 의미처럼 해석될 수 있다. 반면 윌리 웡카라는 캐릭터는 그렇게 합법적인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찰리라는 '착하고 말 잘 듣는' 어린이에게 큰 선물을 주는 주체가 가장 '괴짜'같고 철들지 않은 어른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사실 윌리웡카와 같이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성향의 아이는 오히려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 신동이나 껌 씹기에 진심인 아이가 아니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아마 이 작품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에는 '말 잘 듣는 아이'를 원하는 부모들의 욕구도 반영되지 않았을까 싶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어른들에게, '당신은 얼마나 재미있고 유쾌하게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법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항상 더 좋은 법을 고민하고,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규칙을 창조하며 사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법을 다루는 법조인이라고 해서 꼭 고리타분하고 꽉 막힐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그것을 위한 수단은 투쟁이다. 법이 부당한 공격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한 법은 전쟁을 배제할 수 없다. 법의 숙명은 투쟁이며, 다시 말해 국가들의, 국가 권력의, 계급의, 개인들의 투쟁이다.
세상의 모든 법은 투쟁을 통해 얻어졌다. 모든 법의 원칙은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로부터 무력으로 왜곡되어야 했고, 모든 법적 권리, 즉 국가 전체의 법적 권리와 개인의 법적 권리는 그것을 주장하고 방어할 수 있는 지속적인 준비가 있어야 보장될 수 있다. 법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살아있는 힘이다. 따라서 한 손에는 권리를 저울질하는 저울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그것을 집행하는 칼을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정의이다. 저울이 없는 칼은 무분별한 힘에 불과하고 칼이 없는 저울은 무기력한 말에 불과하다. 법의 상태는 정의의 여신이 칼을 들고있는 '힘'과 저울을 들고있는 '기술'이 동등 할 때만 완벽하다.
법은 국가 권력만이 아니라 전 국민의 끊임없는 노동의 결과물이다.
-루돌프 폰 예링, <권리를 위한 투쟁> (얇으니까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법은 단순한 이익 계산이 아니라 주관적인 권리와 자존심의 문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독일의 법학자 예링에 따르면 권리 침해나 인격적 모욕을 당하면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일 뿐만 아니라 사회 공동체에 대한 의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한 투쟁의 결과물이 현재의 법이며, 현재의 투쟁이 미래의 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모욕을 당했을 때 개인 입장에서는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예링에 따르면 이는 단순한 불이익이 아니고 법을 훼손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법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투쟁해서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법치국가'라고 하면 평화로운 세상을 생각하지만 실제로 법정은 치열한 전쟁의 공간이다. 과거에는 실제로 '결투재판'을 통해 승패를 가렸다고 하는데, 법이 가지는 투쟁적인 속성과 평화적인 속성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답이 없는 분쟁을 그대로 두느니 한 명이 세상을 떠나는 게 더 평화롭다는 것인데, 지금은 말과 글싸움으로 충분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투쟁을 통한 법적 쟁취의 모범적인 사례로는 로자 파크스 여사의 자리 양보 거부 사건과 버스 보이콧이 유명하다. 당시 유사한 사건들이 많았고, 버스회사 측에서는 흑인 좌석을 늘리겠다, 혹은 인종 분리가 오히려 분쟁을 줄일 수 있다는 명분으로 인종 분리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로자 파크스 여사가 1955년 12월 1일에 체포당하면서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피곤해서였는지, 아니면 차별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후 흑인 사회는 보이콧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권리를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파크스 여사는 "Arrest me for sitting on a bus? You may do that.(버스에 앉았다는 이유로 체포하겠다고요? 그럼 그렇게 하시죠)" 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법이 단순히 이익의 문제였다면, 그러한 폭발력과 연대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흑인 사회 일원들은 매일 수 시간을 걸어서 출퇴근하면서도, 이러한 차별은 법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했고 결국 연방대법원은 버스에서의 흑백 분리는 위헌이라는 기념비적인 판결을 내린다. 이 일화를 통해 법은 단순히 법전에 쓰여진 것이 아니고, 판례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동시에 미국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권 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법적 설득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예링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피는 흘리지 말라'는 판결에 대해 흥미롭게 비판한 바 있는데, 분량의 한계상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자.)


예링의 지적은 특히 법이 얼마나 실질적인 힘을 가지는지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미국의 경우 수정헌법 제14조에 따라 위헌 판결을 받는 법률들이 나오면서, 아무리 의회에서 다수가 합의한 법률이라도 소수자에게는 위헌 여부를 다퉈볼 수 있는 강력한 헌법재판 제도가 정립되었다. 하지만 헌법이 있다고 해서 다 힘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북한 헌법에는 이런 조항들이 있다.



각급 주권기관은 일반적, 평등적, 직접적원칙에 의하여 비밀투표로 선거한다.
국가는 착취와 압박에서 해방되여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된 로동자, 농민, 군인, 근로인테리를 비롯한 근로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며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한다.
국가는 실업을 모르는 우리 근로자들의 로동이 보다 즐거운것으로, 사회와 집단과 자신을 위하여 자각적열성과 창발성을 내여 일하는 보람찬것으로 되게 한다.
공민은 언론, 출판, 집회, 시위와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국가는 민주주의적정당, 사회단체의 자유로운 활동조건을 보장한다
공민은 휴식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북한의 사회주의헌법 중.


특히 휴식권은 한국 헌법에 명문화하자는 주장이 있을만큼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북한에서 정말 이러한 아름다운 사회가 조성되어 있을까? 전혀 아니다. 어떤 학자들은 북한과 같이 실질적인 힘이 없는 헌법을 '장식적 헌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링이라면 이를 보고, '칼이 없는 저울은 무기력한 말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중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여행, 시위의 자유를 가지고, 어느 국가 기관이나 공무원에 대해서든지 비판하고 건의할 권리를 가지며, 공민의 제소, 고소 또는 고발에 대하여 관련 기관은 반드시 사실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책임을 지고 처리해야 한다. 어떠한 사람도 억압하거나 보복 공격할 수 없다. 적어도 헌법에는 그렇게 쓰여 있다. 그런 와중에 시진핑 주석은 독재권력을 강화하며 영구집권까지 가능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과연 그들만의 문제일까? 이제 우리의 헌법은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는지 되물어야 한다. '언론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근사하게 말해놓고, 막상 이런 건 이래서 저런건 저래서 헌법의 보호범위가 아니라고 말해버리면 장식적 헌법과 유사한 취급을 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칼 마르크스는 "법"은 기껏해야 자본가의 이익을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많은 국가의 법들이 인권과 생명에 대해서는 추상적이거나 무의미한 언급만 하고, 노동자가 몇시에 출근하고 무슨 행위가 금지되며 어떻게 하면 어떤 처벌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무척 상세하게 규정을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19세기와 21세기의 법은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지만 과연 우리 법은 지배자가 아닌 피지배자, 약자, 소수자의 시선을 충분히 반영, 대표하고 있는지 의문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문학과지성사


서두에 인용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그들 옆엔 법이 있다"는 말처럼, 법은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유용한 도구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과 같이, 많은 문화권에서는 법에 대한 복종을 미덕으로 가르치기도 한다. 본래 '법치주의' 관념은 통치자가 자의적으로 '인치'하지 말고 법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로서 권력에 대한 견제나 제한, 기본권에 대한 보장적 의미에 가까운 것이지만, 일상적 용어에서 법치주의는 국민들 보고 '법을 지켜라'라고 강요하는 등 빅브라더 식의 의미로 오용되는 경우도 많다. 무엇이 합법이고 불법인지는 생각보다 명확하지 않다. 법은 고정된 도덕규칙이라기보다는 유동적인 논증 과정이다. 그러니까 무조건 법대로 해! 라고 말할 게 아니라 어떤 법적 논증을 통해 내 권리를 지킬 수 있을지 늘 궁리해야 한다.

때로는 법을 생각하면 답답하고 꽉 막힌 규정집들이 떠오른다. 난쏘공 속 아버지의 말처럼, '그들 옆엔 법이 있다'라고 하는데, 왜 법은 항상 그들 옆에 있고 우리 옆에는 없는 걸까? 공익, 인권 변호사들은 왜 항상 소수에 불과할까. 사실 계급론에 따르면 그게 정상이다. 법조인은 원래 그들 옆에 서서 지배자들의 행동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약자의 저항을 억제하고 순종하게 해서 기존 체제를 유지하도록 돕는 일이 임무이자 존재가치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법조인들은 자기 임무를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잘 달성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무엇엔가에 이끌려 또는 떠밀려 거기까지 온 우리들을 가로막고 버티고 선, 저 완강한 철조망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풀죽어 되돌아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넘는다. 아니, 넘어서지 않을 수 없다.
철조망, 그것은 법이다. 질서이다. 규범이며 도덕이며 훈계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억압이다. 겹겹이 철조망을 둘러치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철조망을 넘어서려는 사람을 짓밟고 그 쓰려진 얼굴 위에다 침을 뱉는다. 쓰러져 짓밟힌 인간의 이지러진 얼굴 위로 고통스런 죄의식의 올가미가 덮어 씌워진다. 그리하여 철조망을 넘는 과정은 무뢰한으로 전략하는 과정, 법과 질서의 테두리 밖으로 고독하게 추방되는 과정, 양심과 인륜을 박탈당한 비인간으로 밀려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으로 회복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그 어떤 법률과 질서와 도덕과 훈계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자신의 삶의 권리를 주장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철조망 앞에 결박당하여 의식이 마비되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생명력, 인간의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조영래, <전태일 평전>


하지만 모든 변호사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변호사들은 약자 옆에 서서 '그들'과 그들 옆에 선 변호사들과도 싸워왔다. 의외로 법은 약자들의 무기가 될 때도 있다. 전태일이 마지막 순간까지 들고 있었던 책이 바로 근로기준법이다. 전태일을 세상에 알린 평전을 쓴 사람이 바로 조영래 변호사다. 그는 법의 힘을 역이용해서 강자들에게 훅, 스트레이트, 어퍼컷까지 성공시킨 유능한 변호사였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법조계에서도 그런 인물들을 기억하고 계승해서 칼 마르크스의 고집스러운 단언이 틀렸다는 점을 부디 입증할 수 있으면 좋겠다.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 평전에서 "법"이란 관념을 위와 같이 철조망, 질서에 비유해 설명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법의 의미, 가치에 대해 전달하고 싶은 내용과 어록들이 많다. 가령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는 "전쟁 중에 법은 침묵한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국제 사회에서의 법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살펴볼 만한 많은 어록들이 있다. 또한 미국의 브레넌 대법관은 "법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며 목적을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법은 단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실현(serve)하기 위한 방법론일 뿐입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독일의 법학자 엘리네크가,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말한 이래로, 법과 도덕이 얼마나 밀착되어야 하는지, 혹은 구분되어야 하는지는 수많은 법철학자들의 쟁점이 되어왔다. "법은 거미줄과 같아서 작은 파리를 붙잡지만 큰 파리는 뚫고 지나가버린다"는 발자크의 비유적인 표현도 있다. 이 많은 주제들을 공부하고 글로 정리하려니 흥미진진하다.

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 <옥스보우 인서던트>에서 누명을 쓴 주인공은 이렇게 법철학적인 내용의 편지를 남긴다. 법이란 무엇인지 한마디로 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확실한 것은, 법은 법전에 쓰인 것과 동일하지는 않으며, 개별 사건과도 다르다. 그 이상의 무언가라는 것이다. 법이 무엇인지, 무엇이 되어야 할지는 답이 정해진 질문이 아니며, 앞으로 우리가 답해나가야 할 과제이다. 법은 법조인들에게만 맡겨놓기에는 너무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법대로 합시다'라는 피상적인 이해만 내새운 채, 근본적인 법 교육과 논쟁에 대해 너무 소홀했던 것은 아닐까.

Law is more than the words that put it on the books; law is more than any decisions that may be made from it; law is more than the particular code of it stated at any one time or in any one place or nation; more than any man, lawyer or judge, sheriff or jailer, who may represent it. True law, the code of justice, the essence of our sensations of right and wrong is the conscience of society. It has taken thousands of years to develop, and it is the greatest, the most distinguishing quality which has evolved with mankind. None of man's temples, none of his religions, none of his weapons, his tools, his arts his sciences, nothing else he has grown to, is so great a thing as his justice, his sense of justice.

법은 장부(법전)에 기록된 단어들 이상의 것이며, 법은 법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결정이나 판례들 이상의 것입니다. 법은 어느 시점의 어느 국가에서 명시된 특정한 법전(규정집) 이상의 것입니다. 법은 법을 대표하거나 집행하도록 고용된 변호사나 판사, 보안관이나 간수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법, 정의의 원칙,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본질적 감각은 곧 사회의 양심이 됩니다. 법이란 수천 년 간 인류와 함께 발전하고 진화한 결과물로서,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품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원, 종교, 무기, 도구, 예술, 과학,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정의(법), 혹은 정의감만큼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월터 반 클라크, <The Ox-bow Incident>




끝으로 법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는 힙합 노래를 하나 소개하고 마치려고 한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그룹' N.W.A의 <Fuck Tha Police>다. Ice Cube, Eazy-E, MC Ren, Dr. Dre, DJ Yella가 모두 참여한 이 노래는 법정에서의 재판을 패러디해 닥터 드레 판사가 흑인을 차별하고 폭행하는 백인 경찰에게 유죄 선고를 내린다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Ice Cube는 "authority to kill a minority"라는 가사로, MC Ren은 "So Called Law"라는 표현으로, 현실에서 법이라는 이름으로 어떠한 불법과 침해가 자행되고 있는지를 신랄하게 드러낸다. 이들의 가사는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 <Life on Mars?>에 나오는, "lawman"을 연상시키게 한다."

Take a look at the lawman Beating up the wrong guy
Oh man, wonder if he'll ever know He's in the best selling show
Is there life on Mars?
무고한 사람을 때려잡는 저 Lawman(집행관)을 봐
난 그가 알지 궁금해 그는 가장 잘 팔리는 쇼에 나오고 있다는걸
화성에는 생명이 있을까?


N.W.A.의 노래 마지막에 Police는 공정한 재판을 원한다고 울부짖지만, Dr.Dre는 무시하고 나가라고 한다. 과연 지금까지 소수자들에게는 현실에서 공정한 재판이 보장되어 왔는지 다시 한번 성찰하게 만든다. 이 노래는 2021년 롤링 스톤 선정 역대 500대 명곡 중 190위에 올랐을 정도로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냥 멜로디와 비트만 듣더라도 많은 사람을 소위 불순분자로 몰입시킬 수 있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스눕독은 경찰 행사의 수많은 고위 경찰들 앞에서 이 노래를 불러서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적이 있는데 그 영상도 유명하다. 앞서 소개한 '법이란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N.W.A의 음악을 들어보길 권한다. (다음 글에 계속)


https://www.youtube.com/watch?v=Z7-TTWgiYL4


 Ice Cube>

So police think, Think that They have the authority to kill a minority.

경찰 놈들은 지들이 약자를 죽일 권위라도 가진 줄 알지.



Dr.Dre>

M.C.Ren, will you please give your testimony to the jury about this fucked up incident.

MC Ren, 배심원에게 이 개같은 사건에 대해 증언해주겠나.


MC Ren>
Fuck tha police and Ren said it with authority, Because the niggas on the street is a majority a gang. is with whoever I'm steppin, And a muthafuckin weapon is kept in a stash, For the so called law, Wishin Ren was a nigga that they never saw.
경찰은 엿먹어라 엠씨 렌이 권위를 가지고 말한다. 왜냐하면 거리의 '깜둥이'들은 거의 전부가 갱이니까. 나와 함께 있는 이조차도 말야. 그리고 개같은 무기들은 법이란 이름 아래 모두 짱박혀있지. 깜둥이 렌을 결코 만나지 않기를 바라며.


Dr.Dre>
The jury has found you guilty of bein a redneck, whitebread, chickenshit muthafucka.
배심원들은 그대들이 무식한 레드넥에 하얀 빵에 닭똥같은 백인이라는 죄로 유죄를 선고한다.
Police>
Wait, that's a lie! That's a goddamn lie!
기다려, 그건 거짓말이야! 그건 빌어먹을 거짓말이라고!
Dr.Dre>
Get him outta here.
당장 퇴정 시키시오.
Police>
I want justice!
나는 공정한 판결을 원해!
Dr.Dre>
Get the fuck out of ma face!
내 눈 앞에서 당장 꺼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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