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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법이 아닌 예외를 위해 만들어진 사람-와일드의 심연

원수를 용서하라는 가르침은 원수를 위한 게 아니라 내 아름다움을 위한 것

De Profundis(1905)  심연으로부터(옥중기)

Oscar Wilde


"Sleeping Muse" by Constantin Brâncuși (1909-1910)

   설명: 브란쿠시의 조각은 그의 유명한 "우주의 새"보다 더 차분하지만, 와일드가 자아의 "새로운 발전"으로 가는 길이라고 묘사한 성찰과 내면의 진실에 대한 탐구의 본질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Music in the Tuileries Gardens" by Édouard Manet (1862) 

  설명: 마네의 다른 작품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파리의 사회 생활을 묘사한 이 그림은 슬픔과 개인적 성장의 더 깊은 경험에 비해 사회적 쾌락의 피상성에 대한 와일드의 논평을 미묘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Portrait of the Journalist Sylvia von Harden" by Otto Dix (1926)

   설명: 딕스의 솔직한 저널리스트 묘사는 피상적인 쾌락과 성공을 뛰어넘는 슬픔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경험의 깊이에 대한 와일드의 이해와 일치하는 피로감과 성찰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Sleeping Muse" by Constantin Brâncuși (1909-1910)

   설명: 브란쿠시의 조각은 그의 유명한 "우주의 새"보다 더 차분하지만, 와일드가 자아의 "새로운 발전"으로 가는 길이라고 묘사한 성찰과 내면의 진실에 대한 탐구의 본질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Music in the Tuileries Gardens" by Édouard Manet (1862) 

  설명: 마네의 다른 작품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파리의 사회 생활을 묘사한 이 그림은 슬픔과 개인적 성장의 더 깊은 경험에 비해 사회적 쾌락의 피상성에 대한 와일드의 논평을 미묘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Portrait of the Journalist Sylvia von Harden" by Otto Dix (1926)

   설명: 딕스의 솔직한 저널리스트 묘사는 피상적인 쾌락과 성공을 뛰어넘는 슬픔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경험의 깊이에 대한 와일드의 이해와 일치하는 피로감과 성찰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챕터별 요약


제1장: "드 프로푼디스: 슬픔의 전주곡"

- 고통은 계절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끝없는 경험으로 묘사되며, 고통을 중심으로 한 회전하는 순환과 비슷합니다.

- 단조롭고 변하지 않는 감옥의 일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내부의 부동성을 반영합니다.

- 작가에게 감옥 안의 고통과 감옥과 마음 모두를 어둡게 하는 영원한 황혼에 비유되는 슬픔의 계절이 있을 뿐입니다.

- 개인적인 고통과 지속적인 슬픔이 강조되며, 작가의 어머니의 죽음과 같은 과거 사건은 엄청난 개인적인 고통을 야기합니다.

- 저자는 자신의 행동으로 명예로운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고 불명예스러운 삶을 살게 된 것에 대해 깊은 수치심과 후회를 표현합니다.


제2장: "슬픔의 계절"

- 슬픔은 보편적인 것으로 묘사되며, 사고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의 고통에 가장 큰 감동을 받는 매우 민감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 슬픔은 진정한 고통만이 전해줄 수 있는 삶과 인간 본성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영역으로 여겨집니다.

- 고난의 시기에 낯선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예상치 못한 친절과 동정의 몸짓은 작가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 하층민들의 동정심은 저자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서 비롯된 경멸과 대조되며, 이는 그의 투옥에 대한 반응에서 사회적 분열을 강조합니다.

- 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지혜와 친절, 하층 계급이 감옥을 바라보는 비극적인 시각, 그리고 자신의 계급이 감옥에 갇혀 겪는 사회적 고립에 대해 묵상합니다.


제3장: "깊은 곳으로부터의 성찰"

- 저자는 자신의 행동이 초래한 결과와 스스로 자초한 파멸을 인정하고, 개인만이 진정으로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다는 깨달음에 대해 고찰합니다.

- 저자는 개인적인 성찰을 통해 당대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자신의 상징적 관계를 인식하고 자신의 영향력과 어리석음을 모두 인정합니다.

- 저자는 편안함, 욕망, 방임의 삶에 탐닉하여 자신의 잠재력을 낭비하고 몰락을 초래했음을 인정하고 겸손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 고통을 통한 성찰의 여정에서 저자는 내면의 보물이자 새로운 시작을 위한 촉매제로 여겨지는 겸손을 발견하게 됩니다.

- 새롭게 발견한 겸손으로 저자는 과거를 용서하고 자아실현을 추구하며 괴로움에서 개인주의와 자립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제4장: "고통의 변화"

- 저자는 감옥에서 다양한 감정적 고통을 경험하면서 고통은 의미 있는 것이며 개인의 진화를 위한 길잡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 저자는 겸손을 자신의 내면에 남아있는 마지막이자 최고의 특성으로 인식하고, 겸손을 새롭고 더 심오한 삶의 여정을 위한 토대이자 완전한 개인적 항복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 재정적, 세속적 관심사를 제쳐두고 저자는 괴로움으로부터의 자유와 인간적인 친절을 나눌 수 있는 능력을 물질적 사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 인생의 시련과 굴욕, 특히 감옥에서의 기간은 역경을 통해 영혼을 성화시키는 영적 경험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 수감 생활을 포함한 인생의 경험을 자신을 형성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인정하고 재구성하려는 저자의 열망은 개인적 회복과 성장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필요성을 반영합니다.


제5장: "불명예에서 이해로"

- 감옥은 자아에 대한 도전이지만, 저자는 수감 생활을 포함한 자신의 경험을 내면화하고 소유하여 삶과 그 심오한 교훈 사이의 단절을 피하고자 합니다.

- 저자는 자신의 과거 경험을 거부하는 것은 영혼을 부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진정한 구원의 수단으로 삶의 아름다움과 고난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고 성찰합니다.

- 예술적 노력과 개인적 고통은 모두 역경을 통해 웅장함을 더하고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 변화의 과정으로 간주됩니다.

- 작가가 자유롭고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형벌과 불명예를 인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자신의 인생사를 받아들이는 것이 성취를 위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 저자는 앞으로는 대중의 멸시나 개인적 죄책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꾸기 위해 고통 속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예술적 삶의 원칙을 단순히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행복을 새롭게 찾겠다고 다짐한다.


제1장: "자의식적 목표의 본질"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을 설교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타고난 아름다움과 자기 풍요로움을 위한 사랑의 행동을 강조하셨다고 주장합니다.

- 한 젊은이에게 재산을 나눠주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재물이 영혼에 미치는 부패한 영향에 대한 염려로 제시됩니다.

- 이 글은 그리스도를 계절이 바뀌고 달이 차고 뜨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표현해야 하는 예술가들과 일치하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제2장: "개인 정체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영향"

-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개인의 삶과 더 넓은 인간 경험의 상호 연관성을 설명했습니다.

- 이 기사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개인의 정체성을 거인과 같은 규모로 확장하여 세계 역사에서 개인이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는지 인식합니다.

- 예술적 기질은 표현된 경험에서 번성하여 예술, 문학, 음악, 역사에서 새로운 관점과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제3장: "삶의 방식으로서의 표현"

- 저자는 예술가들이 표현을 삶의 본질로 여기는 반면, 그리스도는 침묵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포함한 전 인류를 포용했다는 생각을 탐구합니다.

- 그리스도를 예술가로서 바라본 그는 자신을 인간의 슬픔을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존재로, 목소리 없는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의 영원한 대변자로 만들었습니다.

- 그리스도는 슬픔의 사람을 예시함으로써 예술에 영원히 영향을 미쳤고, 그 어떤 고전적 신보다 더 영향력 있는 이미지를 창조했습니다.


제4장: "그리스도의 르네상스와 그 중단"

- 저자는 고전 르네상스 운동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중단된 것을 한탄하며, 이 운동이 덜 진정성 있는 예술적 표현 방식을 배양했다고 주장합니다.

- 그리스도는 예술에서 진정한 낭만주의 운동의 영혼으로 여겨지며, 역사와 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널리 퍼져 있습니다.

- 이 글은 중세 전설부터 현대 문학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광범위하고 다양한 영향력을 기념합니다.


제5장: "그리스도의 상상력과 개인에 대한 영향"

- 이 글은 상상력을 사랑의 한 형태로 간주하는 그리스도의 상상력을 그의 철학의 근본으로 제시합니다.

- 저자는 삶의 단순하고 원초적인 요소를 즐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연에서 정화를 발견하고 원초적인 경험으로 돌아가는 것이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자신의 상상력을 반영하며, 저자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신비로운 면과 조화를 이루고 사회의 거부감을 넘어 평화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하고 싶었던 말들


문장: "번영과 쾌락과 성공은 결이 거칠고 섬유질이 흔할지 모르지만, 슬픔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예민하다. 슬픔이 끔찍하고 절묘하게 진동하지 않는 생각의 세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힘의 방향을 기록하는 얇은 금박은 그에 비해 거칠다. 사랑의 손이 아닌 다른 손이 닿으면 피를 흘리고, 그마저도 고통스럽지 않더라도 다시 피를 흘려야 하는 상처입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거룩한 땅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문장: "Prosperity, pleasure and success, may be rough of grain and common in fibre, but sorrow is the most sensitive of all created things. There is nothing that stirs in the whole world of thought to which sorrow does not vibrate in terrible and exquisite pulsation. The thin beatenout leaf of tremulous gold that chronicles the direction of forces the eye cannot see is in comparison coarse. It is a wound that bleeds when any hand but that of love touches it, and even then must bleed again, though not in pain. Where there is sorrow there is holy ground. Some day people will realise what that means."

설명: 본문의 이 구절은 슬픔의 심오한 감수성과 보편성을 강조하며, 고통을 통해 우리가 인간 경험과 가장 깊이 연결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섬세하면서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힘과 같은 슬픔이 미칠 수 있는 엄청난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연상적인 문구입니다. 저자는 인생의 다른 요소들의 거칠음과 슬픔의 세련된 본질을 대조하며 슬픔을 신성한 현상으로까지 끌어올립니다. 슬픔이 계속 상처를 입지 않도록 슬픔을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는 인식은 인간의 슬픔과 연민에 대한 이해에 대한 설득력 있는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비유와 사례: 슬픔을 복잡하고 섬세한 태피스트리라고 상상해 보세요. 각 실은 특정한 고통의 사례를 나타내며, 함께 엮어지면 단일 실이 전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복잡한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태피스트리는 비통함, 상실감, 황폐함뿐만 아니라 공감, 연결, 깊은 인간애의 장면을 묘사합니다. 교향곡의 개별 음표가 모여 강력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슬픔의 공동체는 슬픔을 경험한 모든 사람을 연결합니다. 텍스트의 '떨리는 금박'은 인간의 감정이 슬픔의 미묘함에 반응하는 것처럼 바람이 불거나 파문이 일 때마다 미세한 힘에도 섬세하게 반응하는 수면 위의 금박으로 시각화할 수 있습니다. 금박이 힘의 미적, 시각적 표현을 의미한다면, 슬픔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감정의 힘입니다.  



문장: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현명하고, 더 자비롭고, 더 친절하고, 더 민감합니다. 그들의 눈에 감옥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비극, 불행, 사고, 다른 사람들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입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힌 사람을 단순히 '곤경에 처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항상 사용하는 문구이며 그 표현에는 완벽한 사랑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같은 계급의 사람들은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감옥이 사람을 천덕꾸러기로 만듭니다. 나 같은 사람은 공기와 햇볕을 쬘 권리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다른 사람들의 쾌락을 더럽힌다. 우리가 다시 나타나면 환영받지 못합니다."  문장: "The poor are wise, more charitable, more kind, more sensitive than we are. In their eyes prison is a tragedy in a man’s life, a misfortune, a casualty, something that calls for sympathy in others. They speak of one who is in prison as of one who is ‘in trouble’ simply. It is the phrase they always use, and the expression has the perfect wisdom of love in it. With people of our own rank it is different. With us, prison makes a man a pariah. I, and such as I am, have hardly any right to air and sun. Our presence taints the pleasures of others. We are unwelcome when we reappear."

설명: 이 섹션은 수감이라는 주제를 바라보는 가난한 사람과 특권층의 관점 차이를 공감각적으로 포착합니다. 저자는 가치관과 공감 능력의 현저한 차이를 강조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더 깊은 인간애와 불행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는 특히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서 추락한 사람들을 배척하고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저자는 수감이라는 상황을 더 이상 경멸할 이유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연민에 대한 요구로 인식하며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비유와 사례: 이 개념을 더 잘 이해하려면 마을 우물과 장식용 분수의 차이를 생각해 보세요. 마을 우물은 필수품이자 공동체의 장소로, 사람들이 모여 생활에 필수적인 물을 길어오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지지합니다. 우물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도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찾아올 수 있는 곳이며, 우물은 그들의 상황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식용 분수는 장식용이며 그러한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한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높이 평가하지만, 생계의 원천이 아니며 외관이 본질보다 더 중요한 환경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우물이 누가 물을 길러 오든 모두를 받아들이고 생명수를 제공하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지위를 우선시하고 타락한 자에게 반발하며 수용과 동행이라는 생명수를 제공하지 않는 '샘' 사회와 달리 '곤경에 처한 것'을 소외가 아닌 공감이 필요한 인간의 근본적인 곤경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문장: "나는 내 시대의 예술과 문화에 상징적인 관계에 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성인이 된 직후에 이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고, 그 후에도 나이를 먹어가며 깨닫도록 강요했다. 일생 동안 그런 위치를 차지하고 그렇게 인정받는 남성은 거의 없습니다. 대개는 역사가나 비평가가 그 남성과 그의 나이가 모두 세상을 떠난 지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하지만 저는 달랐습니다. 나는 그것을 스스로 느꼈고 다른 사람들도 느끼게 했다. 바이런은 상징적인 인물이지만, 그와의 관계는 그 시대의 열정과 그 열정의 피곤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더 고귀하고, 더 영구적이며, 더 중요한 문제, 더 큰 범위의 무언가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문장: "I was a man who stood in symbolic relations to the art and culture of my age. I had realised this for myself at the very dawn of my manhood, and had forced my age to realise it afterwards. Few men hold such a position in their own lifetime, and have it so acknowledged. It is usually discerned, if discerned at all, by the historian, or the critic, long after both the man and his age have passed away. With me it was different. I felt it myself, and made others feel it. Byron was a symbolic figure, but his relations were to the passion of his age and its weariness of passion. Mine were to something more noble, more permanent, of more vital issue, of larger scope."

설명: 여기서 화자는 문화 예술적 아이콘으로서 자신의 의미를 되새기며, 자신의 생애에서 그러한 인정을 받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해하고 이를 역사의 맥락에 배치하여 자신을 시대의 상징, 즉 시대의 본질이 표현되고 반영되는 통로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상징적 인물로서의 역할은 그를 차별화하고 그가 당대 문화와 깊은 관계를 맺고 영향을 미쳤음을 드러냅니다. 이는 세계와 역사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강력한 자기 인정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지 한참이 지나서야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유와 사례: 자신의 문화적 중요성에 대한 저자의 감각을 해안가에 굳건히 서 있는 등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등대는 길을 안내하는 등대일 뿐만 아니라, 등대가 비추는 뱃사람들의 이야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해안 그 자체의 영원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화자는 자신을 문화 환경의 등대로 여기고, 그 시대의 예술적, 지적 흐름을 비춥니다. 그는 단순히 다른 사람의 빛을 반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바다의 본질, 즉 당대의 집단적 의식을 정의하고 해석하는 초점이자 독창적인 빛의 원천입니다. 등대의 존재가 지나가는 모든 배에 의해 인정받는 것처럼 화자는 자신의 상징적 존재가 미래의 역사가나 비평가뿐만 아니라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인정받고 확인되는 것을 느낍니다.  



문장: "겸손은 내가 도달한 궁극의 발견이자 새로운 발전의 출발점인 내 안에 남은 마지막이자 최고의 것이다. 겸손은 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제게 그 이야기를 했다면 거절했을 것입니다. 저에게 가져왔다면 거절했을 것입니다. 제가 발견했으니 저는 그것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새로운 삶, 비타 누오바의 요소들을 담고 있는 유일한 물건입니다."  문장: "Humility is the last thing left in me, and the best: the ultimate discovery at which I have arrived, the startingpoint for a fresh development. It has come to me right out of myself, so I know that it has come at the proper time. It could not have come before, nor later. Had anyone told me of it, I would have rejected it. Had it been brought to me, I would have refused it. As I found it, I want to keep it. It is the one thing that has in it the elements of life, of a new life, Vita Nuova for me."

설명: 이 발췌문은 저자의 겸손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그에 따른 가치를 말해줍니다. 그는 겸손을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정점의 발견이자 개인적 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묘사합니다. 고된 여정과 경험은 새로운 장, 즉 '비타 누오바'의 시작을 촉진하는 강렬한 깨달음으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겸손은 외부에서 강요하거나 지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더욱 소중하며, 새로운 삶을 위한 진정성 있고 자생적인 초석이 될 수 있습니다.  

비유와 사례: 화자가 겪은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불사조가 잿더미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과 유사하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신화 속 새는 삶과 연소, 죽음의 순환을 거친 후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죽음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 인용문의 맥락에서 겸손은 불사조의 재탄생, 즉 개인적 패배와 이전의 잿더미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것에 비유됩니다. 이러한 상승은 단순히 과거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심오하고 깨달은 무언가로 진화하는 것입니다. 불사조의 재탄생이 전적으로 새 스스로의 고독한 사건인 것처럼, 겸손의 깨달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그 이전의 시련의 지혜가 깃든 새로운 삶, 즉 '비타 누오바'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문장: "나는 나 자신을 망쳤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야하며, 크든 작든 자신의 손이 아니면 누구도 망칠 수 없다고 말해야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지금 당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렇게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불쌍한 기소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없이 가져옵니다. 세상이 나에게 한 짓도 끔찍했지만, 내가 나 자신에게 한 짓은 훨씬 더 끔찍했습니다."  문장: "I must say to myself that I ruined myself, and that nobody great or small can be ruined except by his own hand. I am quite ready to say so. I am trying to say so, though they may not think it at the present moment. This pitiless indictment I bring without pity against myself. Terrible as was what the world did to me, what I did to myself was far more terrible still."

설명: 이 구절에서 저자는 자신의 몰락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냉정하고 용서할 수 없는 정직함으로 직시합니다. 그는 외부 환경은 가혹했을지 모르지만 최악의 결과는 자신의 행동 때문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개인의 주체성과 책임감을 직접적으로 인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냉혹한 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망상을 걷어내고 진정한 자기 성찰과 성장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자신의 가장 큰 파멸은 오직 스스로 자초할 수 있다는 생각은 개인의 선택이 얼마나 큰 힘과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말해줍니다.  

비유와 사례: 캔버스 앞에서 붓을 들고 한 획 한 획 색을 입히는 사람을 상상해 보세요. 어떤 붓질은 의도적으로 원하는 걸작의 윤곽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는 성급해지고, 획은 부주의해지고, 색채는 불일치하게 됩니다. 캔버스는 아름다움을 위해 준비되었지만 한때 잠재력을 부여했던 바로 그 손길에 의해 뒤엉키고 변형됩니다. 이 비유에서 캔버스는 인생을, 붓은 선택의 힘을, 붓질은 결정을 상징합니다. 최종 이미지가 망가지든 화려하든 궁극적으로 아티스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글의 저자는 자신의 파멸을 피할 수 없는 시간의 마모나 비평가들의 방해가 아니라 무모하고 잘못된 붓질처럼 인생의 초상을 혼돈으로 이끈 자신의 선택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봅니다.  



문장: "처음 감옥에 갇혔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잊으라고 충고했습니다. 파멸적인 조언이었죠. 내가 누구인지 깨달아야만 어떤 종류의 위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출소할 때 제가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예 잊어버리라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받습니다. 나는 그것이 똑같이 치명적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항상 참을 수 없는 수치심에 시달리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 못지않게 나에게 의미 있는 것들, 즉 해와 달의 아름다움, 계절의 향연, 새벽의 음악과 위대한 밤의 고요함, 나뭇잎 사이로 내리는 비, 풀 위로 기어올라 은빛으로 변하는 이슬 등이 모두 나에게 오염되어 치유력과 기쁨을 전달하는 힘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장: "When first I was put into prison some people advised me to try and forget who I was. It was ruinous advice. It is only by realising what I am that I have found comfort of any kind. Now I am advised by others to try on my release to forget that I have ever been in a prison at all. I know that would be equally fatal. It would mean that I would always be haunted by an intolerable sense of disgrace, and that those things that are meant for me as much as for anybody else—the beauty of the sun and moon, the pageant of the seasons, the music of daybreak and the silence of great nights, the rain falling through the leaves, or the dew creeping over the grass and making it silver—would all be tainted for me, and lose their healing power, and their power of communicating joy."

설명: 이 통찰력 있는 부분은 진정한 자기 인식과 수용이 치유와 구원의 핵심이라는 화자의 신념을 드러냅니다. 그는 아무리 고통스럽고 부끄럽더라도 자신의 과거나 정체성을 잊는다는 개념을 거부하고, 대신 이러한 경험을 자신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온전히 소유함으로써 그는 부정이나 가식의 필터 없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명료함을 통해 그는 과거의 그림자에 물들지 않은 단순하고 확고한 자연의 경이로움에서 위안을 찾고 기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비유와 사례: 격렬한 폭풍우에서 살아남은 나무를 상상해 보세요. 부러진 가지를 잊으라고 나무에게 충고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며, 그 상처는 나무의 역사와 회복력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나무는 폭풍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수 없습니다. 폭풍의 흔적은 나이테와 나무 몸통의 기울기에 새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흔적이 봄이 되면 꽃을 피우는 나무의 능력을 감소시키지는 않습니다. 꽃은 부러진 팔다리에도 불구하고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진 견디고 지속하는 심오한 능력 때문에 피어나는 것입니다. 꽃의 아름다움은 나무가 어떤 풍파를 겪어왔는지 알 때 비로소 더욱 깊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수감 생활의 가혹함을 부정하지 않고, 그 대신 삶의 지속적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능력을 감소시키지 않고 향상시키는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합니다.  



문장: "육체가 사제나 환상이 깨끗하게 한 것 못지않게 온갖 종류의 것들, 흔하고 더러운 것들을 흡수하여 신속함이나 힘으로, 아름다운 근육의 작용과 고운 살의 조형, 머리카락과 입술, 눈의 곡선과 색으로 전환시키는 것처럼,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영양 기능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 기본적이고 잔인하고 타락한 것을 고귀한 생각의 분위기와 고귀한 열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이것들에서 가장 고상한 주장 방식을 찾을 수 있으며, 종종 더럽히거나 파괴하려는 것을 통해 자신을 가장 완벽하게 드러 낼 수 있습니다. "  문장: "For just as the body absorbs things of all kinds, things common and unclean no less than those that the priest or a vision has cleansed, and converts them into swiftness or strength, into the play of beautiful muscles and the moulding of fair flesh, into the curves and colours of the hair, the lips, the eye; so the soul in its turn has its nutritive functions also, and can transform into noble moods of thought and passions of high import what in itself is base, cruel and degrading; nay, more, may find in these its most august modes of assertion, and can often reveal itself most perfectly through what was intended to desecrate or destroy."

설명: 저자는 이 신랄한 발췌문에서 육체적 영역과 영적 영역 사이의 강력한 유사성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는 다양한 물질을 아름다움과 힘으로 바꾸는 신체의 변형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를 부정적인 경험을 지혜와 인격으로 바꾸는 영혼의 능력에 비유합니다. 영혼은 역경을 성장과 자아실현을 위한 연료로 사용한다는 영적 연금술이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관점은 자신을 비하하거나 해치려고 했던 경험이 오히려 영혼의 가장 깊은 진정성과 힘을 표현하는 환경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비유와 사례: 이 개념을 더 잘 이해하려면 검을 단조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세요. 불결하고 눈에 띄지 않는 원시 광석이 땅에서 추출됩니다. 강렬한 열과 대장장이의 끈질긴 망치질을 통해 금속 덩어리였던 광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도와 아름다움을 지닌 칼날이 됩니다. 인생의 도전이 영혼을 단련하듯, 단조 과정에서 한 번 두드릴 때마다 검은 단련됩니다. 칼날의 완벽함은 불타는 용광로와 강력한 타격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것들 때문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강철과 같은 영혼은 평온할 때가 아니라 고통과 시련의 도가니 속에서 가장 진실하고 탄력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생의 시련이 내면의 본질을 유서 깊고 강인한 것으로 빚어내는 것처럼, 금속을 약화시키거나 손상시킬 수 있는 것들이 오히려 그 완전성을 시험하고 확인시켜 줍니다.  



문장: "도덕은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타고난 안티노미안이다. 나는 법이 아니라 예외를 위해 만들어진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러나 나는 사람이 하는 일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이 되는 일에는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배운 것은 잘한 일입니다. 종교는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주지만, 나는 만지고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을 줍니다. 나의 신들은 손으로 만든 신전에 거하고, 실제 경험의 원 안에 나의 신조는 완벽하고 완전하게 만들어져 있다: 너무 완전해서, 이 땅에 천국을 둔 많은 또는 모든 사람들처럼, 나는 천국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지옥의 공포도 발견했다."  문장: "Morality does not help me. I am a born antinomian. I am one of those who are made for exceptions, not for laws. But while I see that there is nothing wrong in what one does, I see that there is something wrong in what one becomes. It is well to have learned that. Religion does not help me. The faith that others give to what is unseen, I give to what one can touch, and look at. My gods dwell in temples made with hands; and within the circle of actual experience is my creed made perfect and complete: too complete, it may be, for like many or all of those who have placed their heaven in this earth, I have found in it not merely the beauty of heaven, but the horror of hell also."

설명: 이 부분에서 저자는 전통적인 도덕과 종교를 지지나 지침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본성이 본질적으로 비순응적이고 경험 중심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행동과 자아의 변화를 크게 구분하여 도덕적 무게는 행동이 아니라 개인의 인격에 미치는 영향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의 신조는 물질적 세계에서 신성을 찾아야 한다는 실체적 경험의 신조로, 그러한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삶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고통과 어둠에도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합니다.  

비유와 사례: 대리석으로 조각상을 만드는 조각가를 생각해 보세요. 조각가는 돌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돌과 함께, 때로는 돌에 대항하여 원래의 원료를 초월하는 형태를 만들어냅니다. 조각가가 대리석에 가하는 모든 행동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키며, 끌을 두드릴 때마다 돌뿐만 아니라 조각가도 창작 과정을 통해 변화하는 행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자신의 행동이 도덕적, 종교적 규범에 어긋나더라도 내면의 자아를 표현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우아함과 기괴함의 잠재력을 모두 지닌 대리석처럼 저자의 생생한 경험은 아름다움과 공포를 동시에 지닌 인생의 이중적 능력에 대한 이해를 형성합니다.  



문장: "종교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을 때면, 나는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한 수도회를 설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믿지 않는 자들의 수도회'라고 부를 수 있는, 향로가 타오르지 않는 제단 위에서 평화가 깃들지 않은 사제가 축복받지 않은 빵과 포도주가 비어 있는 성배로 축하할 수 있는 곳 말이다. 진실이 되려면 모든 것이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불가지론은 신앙 못지않은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순교자를 심고, 성자를 거두며, 인간에게서 자신을 숨기신 하나님을 매일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이든 불가지론이든, 그것은 나에게 외부적인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 상징은 내가 만든 것이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형태를 만드는 영적인 것입니다. 내가 내 안에서 그 비밀을 찾지 못하면 결코 찾을 수 없고, 내가 이미 얻지 못하면 결코 내게 오지 않을 것이다."  문장: "When I think about religion at all, I feel as if I would like to found an order for those who cannot believe: the Confraternity of the Faithless, one might call it, where on an altar, on which no taper burned, a priest, in whose heart peace had no dwelling, might celebrate with unblessed bread and a chalice empty of wine. Every thing to be true must become a religion. And agnosticism should have its ritual no less than faith. It has sown its martyrs, it should reap its saints, and praise God daily for having hidden Himself from man. But whether it be faith or agnosticism, it must be nothing external to me. Its symbols must be of my own creating. Only that is spiritual which makes its own form. If I may not find its secret within myself, I shall never find it: if I have not got it already, it will never come to me."

설명: 이 발췌문은 개인적인 믿음 또는 불신과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 진실한 영적 연결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전통적인 신앙이 없는 상황에서도 의식과 상징의 중요성과 필연성을 인식하고, 의미와 구조에 대한 인간의 내재적 욕구에 고개를 끄덕이며 불신자를 위한 역설적인 '질서'를 구상합니다. 이는 영성이 외부의 지시에 따라 채택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내면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이러한 개인적 기원을 통해서만 진정성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강조합니다.   

비유와 사례: 인간의 다양한 영적 신념을 나타내는 광활한 빛의 스펙트럼을 상상해 보세요. 한쪽 끝에는 명확한 교리와 의식을 가진 기성 종교를 상징하는 밝고 잘 정의된 색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불가지론과 회의주의의 다양한 색조를 포괄하는 덜 뚜렷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빛의 공간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 덜 정의된 공간에서 공식적인 종교적 경계를 벗어난 영성의 주변 빛을 인식하고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는 이 스펙트럼에서 확실성보다는 의심과 의미 찾기를 기념하는 의식을 통해 자신만의 색조를 만들 것을 제안합니다. 화가가 팔레트를 혼합하는 것처럼, 그는 각 개인이 기존의 색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고유한 영성의 색조를 혼합하여 개인의 진실과 일치시켜야 한다고 믿으며, 전통적인 밝기의 부재가 의미나 깊이의 부재와 동일시되지 않는 자신만의 영성을 표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장: "현재 내 친구들은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유와 한가함과 편안함 속에서 사는 친구들에게는 무릎을 꿇고 감방 바닥을 닦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나보다 겸손의 교훈을 배우기가 더 쉽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끝없는 특권과 제한이 있는 감옥 생활은 사람을 반항적으로 만듭니다. 가장 끔찍한 것은 감옥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돌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은 놋쇠로 된 앞면과 경멸의 입술이 있어야만 하루를 버틸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반역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그토록 좋아하는 표현을 사용하자면,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삶에서도 반역의 분위기는 영혼의 통로를 막고 하늘의 공기를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디에서든 이러한 교훈을 배우려면 이곳에서 배워야 하며, 비록 내가 수렁에 여러 번 빠지고 안개 속에서 종종 길을 잃을지라도 내 발이 올바른 길에 있고 내 얼굴이 '아름답다고 불리는 문'을 향해 있다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문장: "And, though at present my friends may find it a hard thing to believe, it is true none the less, that for them living in freedom and idleness and comfort it is more easy to learn the lessons of humility than it is for me, who begin the day by going down on my knees and washing the floor of my cell. For prison life with its endless privations and restrictions makes one rebellious. The most terrible thing about it is not that it breaks one’s heart—hearts are made to be broken—but that it turns one’s heart to stone. One sometimes feels that it is only with a front of brass and a lip of scorn that one can get through the day at all. And he who is in a state of rebellion cannot receive grace, to use the phrase of which the Church is so fond—so rightly fond, I dare say—for in life as in art the mood of rebellion closes up the channels of the soul, and shuts out the airs of heaven. Yet I must learn these lessons here, if I am to learn them anywhere, and must be filled with joy if my feet are on the right road and my face set towards ‘the gate which is called beautiful,’ though I may fall many times in the mire and often in the mist go astray."

설명: 이 구절은 수감의 비인간적인 영향과 그러한 환경 속에서 겸손과 개방성을 유지하기 위한 저자의 내성적인 투쟁을 반영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의 여유로움과 대조하며, 계속되는 고난과의 투쟁이 마음을 굳게 하고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투쟁이 진정한 은혜와 자기계발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인정합니다.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배움과 성장에 대한 이러한 고집은 자기 개선에 대한 깊은 헌신을 강조합니다.  

비유와 사례: 도시 보도틈새에서 자라는 나무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세요. 나무의 주변 환경은 거칠고 제한적이며 울창한 숲의 이상적인 조건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나무는 그곳에서 햇빛을 받기 위해 구부러지고 구부러지면서 역경을 딛고 자랍니다. 거목처럼 웅장하게 자랄 수는 없지만, 울타리를 뚫고 나뭇가지가 뻗어나가고 뿌리가 콘크리트 밑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등 좁은 공간에서도 잘 자라는 법을 배웁니다. 이 도시 나무는 저자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도시의 콘크리트와 같은 감옥의 척박한 환경은 성장을 방해하고 괴로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혹독한 환경에서 은혜를 구하며 회복탄력적으로 성장하기를 열망합니다. 부자연스러운 서식지의 나무가 한 뼘이라도 더 자라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것처럼 그의 겸손은 강인하지만, 둘 다 저항에서 힘을 얻어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향해 인내합니다.  



문장: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자선가로 만들려고 하거나, 과학과 감성을 겸비한 이타주의자로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실 이도 저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는 가난한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비천한 사람들, 비참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지만, 부자들, 쾌락주의자들,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자유를 낭비하는 사람들, 부드러운 옷을 입고 왕의 집에 사는 사람들을 훨씬 더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에게 부와 쾌락은 가난이나 슬픔보다 더 큰 비극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타주의에 관해서는, 우리를 결정하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소명이며 엉겅퀴에서 가시 포도나 무화과를 따낼 수 없다는 것을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문장: "People have tried to make him out an ordinary philanthropist, or ranked him as an altruist with the scientific and sentimental. But he was really neither one nor the other. Pity he has, of course, for the poor, for those who are shut up in prisons, for the lowly, for the wretched; but he has far more pity for the rich, for the hard hedonists, for those who waste their freedom in becoming slaves to things, for those who wear soft raiment and live in kings' houses. Riches and pleasure seemed to him to be really greater tragedies than poverty or sorrow. And as for altruism, who knew better than he that it is vocation not volition that determines us, and that one cannot gather grapes of thorns or figs from thistles?"

설명: 이 글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본질이 자주 잘못 묘사되는 것에 반대하며, 그의 공감이 전통적인 자비심이나 과학적 이타주의를 넘어섰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모든 형태의 인간 고통을 깊이 이해한 인물로 해석하며, 물질적 풍요가 내면의 공허함을 가리는 부유하고 쾌락주의적인 사람들의 영적 빈곤에 대한 자비로운 관심을 전달합니다. 진정한 공감과 봉사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소명감에서 비롯되며, 식물의 필연적인 열매처럼 사람의 본성은 단순히 달라지기를 원한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비유와 사례: 다양한 배들이 항해하는 광활한 바다를 생각해 보세요. 어떤 배는 가난한 사람들을 태우고 폭풍우 속에서 간신히 떠 있는 작고 낡은 배입니다. 또 다른 배는 풍요로움으로 반짝이는 크고 호화로운 요트이지만, 탑승자들은 물질적 과잉의 바다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습니다. 등대 위에서 파수꾼은 이러한 선박의 물리적 상태뿐만 아니라 탑승자의 상태도 확인합니다. 파수꾼은 불빛을 비추어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성취의 항구로 인도합니다. 이 파수꾼은 명백한 박탈감뿐만 아니라 부유함의 숨겨진 절망에서 슬픔을 보고, 지상의 운명에 관계없이 모든 영혼을 물질적 부의 매력이나 환상을 넘어 더 깊은 위안과 목적의 장소로 인도하는 지침을 제공하는 저자가 묘사한 그리스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문장: "나는 그리스도의 참된 삶과 예술가의 참된 삶 사이에 훨씬 더 친밀하고 즉각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본다; 그리고 슬픔이 나의 날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나를 그녀의 수레바퀴에 묶어두기 오래 전에 나는 <인간의 영혼>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려는 사람은 전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썼고, 언덕 위의 양치기나 감옥의 죄수뿐 아니라 세상이 하나의 축제인 화가와 세상이 노래인 시인을 나의 유형으로 삼았다는 반성에 큰 기쁨을 느낀다. 언젠가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앙드레 지드와 함께 앉아 형이상학은 나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고 도덕은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플라톤이나 그리스도가 말한 것 중 예술의 영역으로 즉시 옮길 수 없고 거기서 완전한 성취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문장: "I see a far more intimate and immediate connection between the true life of Christ and the true life of the artist; and I take a keen pleasure in the reflection that long before sorrow had made my days her own and bound me to her wheel I had written in The Soul of Man that he who would lead a Christlike life must be entirely and absolutely himself, and had taken as my types not merely the shepherd on the hillside and the prisoner in his cell, but also the painter to whom the world is a pageant and the poet for whom the world is a song. I remember saying once to André Gide, as we sat together in some Paris café, that while metaphysics had but little real interest for me, and morality absolutely none, there was nothing that either Plato or Christ had said that could not be transferred immediately into the sphere of Art and there find its complete fulfilment."

설명: 이 심오한 성찰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삶과 예술가의 삶을 비유하며, 진정성과 진정한 자아의 추구가 둘 다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플라톤과 그리스도와 같은 사상가와 종교인이 지지한 원칙이 예술의 영역에서 가장 진실하게 표현되고 완성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유사점을 소중히 여기며, 인간과 신의 가장 깊은 진리를 온전히 구현하고 전달하는 예술의 힘에 대한 믿음에 대한 위로와 근거를 찾습니다.  

비유와 사례: 거울과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세요. 거울은 개인이 마땅히 보여야 할 모습이나 보고 싶은 모습이 아니라 그 순간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이 반사 표면은 변경하거나 판단하지 않으며, 그저 그 앞에 있는 모습의 진실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예술을 철학적, 영적 가르침의 본질을 반영하는 거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진정한 삶을 구현하고 반영한 것처럼,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작품에 쏟아 붓는 예술가들은 보편적인 진리를 드러내고 기념하는 거울을 만듭니다. 삶의 교훈을 내러티브에 담아낸 그리스도의 비유와 같은 맥락에서, 예술가의 창작물은 세상의 복잡성을 포착하고 반영하여 지적 담론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방식으로 플라톤의 이상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춥니다.  



문장: "나는 전적으로 쾌락을 위해 살았다. 나는 모든 종류의 고통과 슬픔을 피했다. 나는 둘 다 싫어했다. 나는 가능한 한 그것들을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즉, 그것들을 불완전함의 한 양태로 취급하기로 했다. 그들은 내 삶의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다. 제 철학에서 그것들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문장: "I used to live entirely for pleasure. I shunned suffering and sorrow of every kind. I hated both. I resolved to ignore them as far as possible: to treat them, that is to say, as modes of imperfection. They were not part of my scheme of life. They had no place in my philosophy."

설명: 이 구절에서 저자는 고통과 슬픔을 원치 않는 불완전성으로 의식적으로 피하면서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 채 쾌락만을 추구했던 과거를 인정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인생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제공하는 성장과 깊이를 부정하면서 일시적인 기쁨을 선호하는 인간 경험의 전체 스펙트럼에 대한 고의적인 실명을 보여줍니다. 저자의 초기 철학은 존재의 이중성을 거부하며 궁극적으로 지속 불가능하고 불완전한 행복에 대한 타협 없는 추구를 보여주었습니다.  

비유와 사례: 낮에만 매혹되고 밤을 혐오하며 태양의 따스한 광채 아래서 영원히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상상해 보세요. 그들은 인공 조명으로 가득 찬 집을 짓고 영원한 낮을 추구하며 깊어가는 황혼에 커튼을 치지 않으려고 주저합니다. 영원한 밝음 아래서 사는 삶은 언뜻 행복하고 활기차게 보일지 모르지만, 밤의 아름다움과 회복을 주는 고요함을 소홀히 합니다. 어둠을 피하며 사는 삶은 고요함 속에서 사색의 기회를 놓치고, 밤의 어둠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별을 볼 수 없습니다. 슬픔의 순간에 속삭이는 심오한 교훈을 외면하고 고통의 윤곽을 그리던 작가처럼, 자연 순환의 어떤 측면도 부정함으로써 존재의 충만함을 스스로 박탈하는 것입니다.  



문장: "그러나 각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죽인다. 어떤 사람은 씁쓸한 표정으로, 어떤 사람은 아첨하는 말로, 겁쟁이는 키스로, 용감한 사람은 칼로! 어떤 이는 젊어서 사랑을 죽이고, 어떤 이는 늙어서 죽이고, 어떤 이는 욕망의 손으로 목을 조르고, 어떤 이는 황금의 손으로 목을 조르네: 가장 친절한 사람은 칼을 사용하네, 왜냐하면 죽은 자는 곧 차가워지기 때문이네."  문장: "Yet each man kills the thing he loves, By each let this be heard, Some do it with a bitter look, Some with a flattering word, The coward does it with a kiss, The brave man with a sword! Some kill their love when they are young, And some when they are old; Some strangle with the hands of Lust, Some with the hands of Gold: The kindest use a knife, because The dead so soon grow cold."

설명: 이 구절은 사람들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소중한 것들을 파괴하는 비극적인 아이러니를 반영합니다. 시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된 인간 본성의 역설에 대한 냉철한 고찰은 자기 파괴적 성향과 사랑과 애정의 복잡성에 대한 심오한 진실을 드러냅니다. 악의, 비겁함, 심지어 친절함까지, 그 결과는 결국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나타나며, 인간의 조건에 얽매인 파괴의 패턴을 표현합니다.  

비유와 사례: 한 어린이가 연약한 나비를 보호하고 가까이 두고 싶어 너무 꽉 쥐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나비에 대한 아이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나비의 연약한 날개는 열정적으로 꽉 잡은 힘을 견디지 못합니다. 아이는 순수함 속에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행동으로 해를 끼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본성이나 행동으로 인해 보존하고, 동경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바로 그 아름다움을 소멸시키는 데 기여합니다. 나비의 섬세한 형태가 선의지만 잘못된 방향의 애정에 의해 짓밟히는 것처럼, 인간관계와 기쁨은 종종 소유욕과 오해, 그리고 이 구절에 묘사된 무수한 사랑의 결함 있는 표현의 무게로 인해 흔들립니다.   



문장:  

그리스도는 모든 매혹적인 인격체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아름다운 말을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말을 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 저는 성 마가가 들려주는 그리스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 여인이 믿음의 시험으로 이스라엘 자손의 떡을 줄 수 없다고 말하자, 그는 식탁 아래 있는 작은 개들(κυναρια, '작은 개'라고 번역해야 함)이 아이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과 감탄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은 사랑과 존경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어떤 사랑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우리가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누구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이상적인 것들의 신성한 질서에서 영원한 사랑은 영원히 합당하지 않은 것에 주어져야한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는 그 문구가 견디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면,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합시다. 사랑은 무릎을 꿇고 받아야 하는 성사이며, 도미네, 논 섬 디그누스는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입술과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Christ, like all fascinating personalities, had the power of not merely saying beautiful things himself, but of making other people say beautiful things to him; and I love the story St. Mark tells us about the Greek woman, who, when as a trial of her faith he said to her that he could not give her the bread of the children of Israel, answered him that the little dogs—(κυναρια, ‘little dogs’ it should be rendered)—who are under the table eat of the crumbs that the children let fall. Most people live for love and admiration. But it is by love and admiration that we should live. If any love is shown us we should recognise that we are quite unworthy of it. Nobody is worthy to be loved. The fact that God loves man shows us that in the divine order of ideal things it is written that eternal love is to be given to what is eternally unworthy. Or if that phrase seems to be a bitter one to bear, let us say that every one is worthy of love, except him who thinks that he is. Love is a sacrament that should be taken kneeling, and Domine, non sum dignus should be on the lips and in the hearts of those who receive it.

설명:  

이 인용문은 인간 관계에서 사랑과 겸손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반영하며, 성경의 일화를 통해 뒷받침됩니다. 이 인용문은 신성한 사랑 앞에서 무가치한 존재의 본질을 강조하며, 사랑에 대한 진정한 감사는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스스로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외에는 누구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역설은 사랑받을 자격에 대한 통념을 뒤집고 겸손과 감사의 철학을 강조하기 때문에 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도미네, 논 섬 디그누스"(라틴어로 "주여, 저는 합당하지 않습니다"라는 뜻)라는 표현은 사랑은 자격이 아니라 경외심과 겸손의 태도로 받아야 한다는 개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비유와 사례:  

이 개념의 무게를 이해하기 위해 사랑을 태양과 같은 광원에서 발산되는 빛으로 생각해 보세요. 이 빛은 선택적이지 않고 황무지와 궁전 정원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비춥니다. 이와 유사하게, 신의 사랑은 아무런 대가 없이 모든 피조물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지는 무보상적이고 편재적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예를 들어, 교사는 학생이 뛰어날 때뿐만 아니라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판단하기보다는 격려하기 위해 칭찬할 수 있으며, 이는 공로와 관계없이 고양시키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녀의 성공이나 실패를 전제로 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표현할 때 사랑은 은혜와 비슷해집니다. 사랑은 획득하는 권리가 아니라 베푸는 선물이며, 인간을 작은 개처럼 보잘것없고 비천한 존재가 넉넉한 손길로부터 은혜롭게 생계를 유지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수혜자가 아니라 우리의 유한한 가치 척도를 뛰어넘는 더 넓은 연민 경험에 겸손하게 참여해야 한다는 충동을 받습니다.  



문장: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자의식적인 목표가 되는 것은 그의 신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신조의 기초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원수를 용서하라'고 말할 때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사랑이 미움보다 더 아름답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청년의 간청에서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상태가 아니라 그 청년의 영혼, 즉 부가 훼손하고 있는 영혼입니다. 그의 인생관에서 그는 자기완성의 필연적 법칙에 따라 시인은 노래해야 하고, 조각가는 청동으로 생각해야 하며, 화가는 세상을 자신의 기분을 비추는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예술가와 하나이며, 이는 봄에 산사나무가 꽃을 피우고 추수기에 옥수수가 황금으로 변하고 달이 방패에서 낫으로, 낫에서 방패로 변하는 것처럼 확실하고 확실하게 이루어집니다.  To live for others as a definite selfconscious aim was not his creed. It was not the basis of his creed. When he says, ‘Forgive your enemies,’ it is not for the sake of the enemy, but for one’s own sake that he says so, and because love is more beautiful than hate. In his own entreaty to the young man, ‘Sell all that thou hast and give to the poor,’ it is not of the state of the poor that he is thinking but of the soul of the young man, the soul that wealth was marring. In his view of life he is one with the artist who knows that by the inevitable law of selfperfection, the poet must sing, and the sculptor think in bronze, and the painter make the world a mirror for his moods, as surely and as certainly as the hawthorn must blossom in spring, and the corn turn to gold at harvesttime, and the moon in her ordered wanderings change from shield to sickle, and from sickle to shield.

설명:  

이 구절은 이타주의와 도덕의 철학을 다루며,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은 자의식적인 목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미움보다 사랑에서 아름다움을 보려는 영혼의 고유한 특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자신의 행동이 외적인 보상보다는 자기 수양과 개인적 성장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환경에 존재하는 자연적 순환을 반영하여 완벽과 표현에 대한 내적 동기에 의해 창작이 촉진되는 예술적 과정과도 일치합니다. 예측 가능한 자연의 패턴과 비교하면 계절이 흐르고 달이 규칙적으로 차오르고 지는 것처럼 인간도 외부의 인정이나 보상 없이도 자연스럽게 최고의 자아를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유와 사례: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가 단순히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들로부터의 잠재적인 칭찬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가꾸고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내재적인 기쁨과 개인적인 성취감을 위해 정원을 가꾼다고 상상해 보세요. 이 정원사는 모든 식물과 꽃을 판매용 상품이 아니라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생명체로 인식합니다. 마찬가지로 '네게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간구는 돈을 위해 연주하는 대신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사랑으로 음악을 작곡하는 음악가처럼 물질적 소유를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연주가 끝났을 때의 박수갈채가 아니라 창작의 과정 자체에 동기를 부여받습니다. 이 섹션에서는 예술가의 창작 욕구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베풀고 용서하는 개념을 끌어올리며, 두 행위 모두 표현과 아름다움, 성장에 대한 영혼의 갈망의 연장선임을 시사합니다. 자연과 계절에 대한 은유를 통해 자연이 자신의 주기를 과시하지 않고 그저 아름답고 목적의식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도 인위적이지 않은 삶의 방식으로서 관대함과 용서로 행동해야 한다는 개념을 강조합니다.  



문장:  

그의 도덕은 모두 동정심이고, 도덕은 바로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가 한 말이 '그녀가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의 죄가 용서되었다'라는 말뿐이었다면, 죽어서도 그 말을 할 가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정의는 모두 시적인 정의이며, 정의란 정확히 무엇이어야 하는가. 거지는 불행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다. 나는 그가 그곳에 보내진 더 좋은 이유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선선한 저녁에 포도밭에서 한 시간 동안 일한 사람도 땡볕에서 하루 종일 수고한 사람만큼의 보상을 받습니다. 왜 안 될까요? 아마도 그들은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면 그들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을 마치 물건처럼 취급하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무딘 생명 없는 기계 시스템에 대해 인내심이 없었습니다. 그분에게는 법이 없었고, 단지 예외가 있었을 뿐, 누구든, 무엇이든, 세상의 다른 어떤 것과도 같았습니다!  His morality is all sympathy, just what morality should be. If the only thing that he ever said had been, ‘Her sins are forgiven her because she loved much,’ it would have been worth while dying to have said it. His justice is all poetical justice, exactly what justice should be. The beggar goes to heaven because he has been unhappy. I cannot conceive a better reason for his being sent there. The people who work for an hour in the vineyard in the cool of the evening receive just as much reward as those who have toiled there all day long in the hot sun. Why shouldn't they? Probably no one deserved anything. Or perhaps they were a different kind of people. Christ had no patience with the dull lifeless mechanical systems that treat people as if they were things, and so treat everybody alike: for him there were no laws: there were exceptions merely, as if anybody, or anything, for that matter, was like aught else in the world!

설명:  

이 인용문은 엄격하게 율법주의적인 도덕보다 공감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도덕의 본질을 말해줍니다. 정량화할 수 있는 행동보다 인간 경험의 깊이를 존중하며, 엄격한 규칙의 집행보다는 이해와 연민에 뿌리를 둔 정의의 시스템을 제안합니다. 포도원의 저녁 일꾼에게 동등한 보상을 제공한다는 평등주의적 개념은 공로나 투자한 시간에 기반한 기존의 공정성 개념에 도전하며, 대신 필요와 의도를 존중하는 가치 체계를 제안합니다. 이는 비인간적인 율법주의에 대한 그리스도의 인내심을 반영하며, 각 개인과 각 상황에 존재하는 고유한 개성을 인정할 것을 옹호합니다.  

비유와 사례:  

교사가 엄격한 성적 대신 각 학생이 자신의 개인적인 장벽을 얼마나 극복했는지에 따라 점수를 매기는 학교를 상상해 보세요.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난독증 학생은 수행한 과제가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 성취도가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등생과 동일한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 인용문은 자녀를 먹여 살리기 위해 맞벌이를 하는 미혼모가 수백만 달러를 기부하는 부유한 자선가만큼이나 사회적 명예를 얻는 세상을 암시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는 모든 행간에 독특한 투쟁과 의도가 담겨 있고 존경, 천국, 인정 등 사회적 '보상'이 엄격한 잣대가 아니라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마음으로 주어지는 살아있는 시가 됩니다. 도덕과 정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사람들을 융통성 없는 법에 따라 판단해야 할 획일적인 대상이 아니라 각자의 복잡성을 지닌 개개인이 맞춤형 배려를 받을 자격이 있는 태피스트리로 보는 공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문장:  

우리 각자에게는 서로 다른 운명이 주어집니다. 내 운명은 대중의 악명, 오랜 투옥, 비참함, 파멸, 불명예 중 하나였지만, 나는 아직은 그럴 자격이 없다. 나는 비극이 보라색 옷과 고귀한 슬픔의 가면을 쓰고 내게 다가온다면 진짜 비극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근대의 무서운 점은 비극을 희극의 옷으로 입혀서 위대한 현실을 평범하거나 기괴하거나 스타일이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는 근대성에 대해 꽤 사실입니다. 아마도 실제 삶에서도 항상 그랬을 것입니다. 모든 순교는 보는 사람에 따라 비열해 보였다고 합니다. 19세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To each of us different fates are meted out. My lot has been one of public infamy, of long imprisonment, of misery, of ruin, of disgrace, but I am not worthy of it—not yet, at any rate. I remember that I used to say that I thought I could bear a real tragedy if it came to me with purple pall and a mask of noble sorrow, but that the dreadful thing about modernity was that it put tragedy into the raiment of comedy, so that the great realities seemed commonplace or grotesque or lacking in style. It is quite true about modernity. It has probably always been true about actual life. It is said that all martyrdoms seemed mean to the looker on. The nineteenth century is no exception to the rule.

설명:  

이 구절에서 저자는 역경과 사회적 판단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개인적인 불행과 대중의 인식의 본질에 대해 반성합니다. 현대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볼 때 자신의 가장 깊은 고난이 사소해 보이거나 잘못 표현되어 중요한 사건이 진정한 중대성이나 존엄성이 결여된 형태로 왜곡될 수 있다는 논평이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고난을 고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대 사회는 이를 덜 엄숙한 맥락에서 재구성하여 그가 생각하는 정중한 인정을 약화시킵니다. 이 비평은 주관적인 고통의 경험과 사회의 객관적인 사소화 사이의 단절을 조명합니다.  

비유와 사례:  

한 개인의 개인적 재난이 미디어의 스펙터클로 대중 앞에 공개되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마치 고대의 비극이 단순한 인형극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선정적인 헤드라인과 토크쇼 분석 속에서 사건의 심각성은 사라집니다. 더 확실한 예를 들자면, 유명한 배인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재앙적인 사건이었지만 수년 동안 블록버스터 엔터테인먼트에서 할로윈 코스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그 이야기가 재구성되어 왔습니다. 한때 인간의 공포와 엄숙함이 느껴지던 이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는 대중의 의식 속에서 실망스러운 가벼움에 굴복했습니다. 재난의 개인적 영향과 대중의 소비 사이의 이러한 부조화는 슬픔에 화려한 색채를 입히고 군중을 위해 춤을 추라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며, 이는 상실의 생생한 경험에 대한 모욕입니다. 따라서 저자의 깨달음은 사회가 기억과 표현에 있어 개인의 고통의 존엄성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심오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문장:  

감옥 스타일은 전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나는 출소할 때 그것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이든 줄 것입니다. 노력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렇게 잘못된 것은 없지만 인류의 정신, 즉 사랑의 정신, 교회에없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옳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너무 많은 마음의 괴로움없이 견딜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나의 형제는 바람, 나의 누이는 비'라고 불렀던 그 둘의 사랑스러운 것들, 대도시의 상점 창문과 석양에 이르기까지 매우 유쾌한 것들이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내게 아직 남아 있는 모든 것의 목록을 작성한다면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신은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나를 위해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나는 전에 얻지 못한 것을 가지고 나갈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도덕의 개혁이 신학의 개혁만큼이나 무의미하고 저속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제안하는 것은 비과학적인 말이지만, 더 깊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고난을 겪은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The prison style is absolutely and entirely wrong. I would give anything to be able to alter it when I go out. I intend to try. But there is nothing in the world so wrong but that the spirit of humanity, which is the spirit of love, the spirit of the Christ who is not in churches, may make it, if not right, at least possible to be borne without too much bitterness of heart. I know also that much is waiting for me outside that is very delightful, from what St. Francis of Assisi calls ‘my brother the wind, and my sister the rain,’ lovely things both of them, down to the shopwindows and sunsets of great cities. If I made a list of all that still remains to me, I don’t know where I should stop: for, indeed, God made the world just as much for me as for any one else. Perhaps I may go out with something that I had not got before. I need not tell you that to me reformations in morals are as meaningless and vulgar as Reformations in theology. But while to propose to be a better man is a piece of unscientific cant, to have become a deeper man is the privilege of those who have suffered. And such I think I have become.

설명:  

이 진심 어린 고백은 고통을 통한 변화의 여정과 인간의 정신과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 제도화된 시스템에 대한 경멸을 반영합니다. 저자는 조직화된 종교의 경직성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철학이 보여주는 사랑과 연민의 정신에서 영감을 받아 교도소 시스템을 재구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그는 진정한 역경을 경험한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는 심오한 깊이가 결여된 피상적인 도덕적 개혁을 비판하면서 삶의 제물에 대한 새로운 감사를 암시하는 외부 세계의 소박한 기쁨을 기대합니다. 도덕적 개선의 외형과 시련을 통한 진정한 인격의 풍요로움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으며, 고난을 견뎌낸 데서 오는 영혼의 심화를 암시합니다.  

비유와 사례:  

씨앗이 식물로 변화하는 과정을 상상해 보세요. 씨앗은 먼저 깨져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하며, 흙을 뚫고 햇빛을 받으며 성장하는 고난을 견뎌내야 합니다. 이 과정은 저자가 묘사하는 개인의 변화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감옥 스타일'은 벗어던져야 하는 갇힌 껍질이고, 그 결과 탄생한 식물은 역경을 딛고 '더 깊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오빠는 바람, 누나는 비'에 대한 작가의 기대와 기쁨은 오랜 시간 실내에 갇혀 지내던 아이가 일상의 평범한 모습에서 경이로움을 재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장을 정의하는 것은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거나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생의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내면 깊숙이 뿌리내린 조용하지만 종종 보이지 않는 인격의 변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다시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통의 용광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심오한 내면의 변화를 강조하며 정신을 더 견고하고 현명하며 무한히 진정성 있는 것으로 단련시킵니다.  



문장:  

그리스도를 이토록 두근거리는 로맨스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본성이 지닌 상상력의 특성입니다. 시적 드라마와 발라드의 기묘한 인물들은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나사렛 예수는 전적으로 자신의 상상력에서 자신을 창조했습니다. 이사야의 외침은 나이팅게일의 노래가 달이 뜨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그의 오심과 더 이상, 아니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언의 부정이자 긍정이었습니다. 그가 성취한 모든 기대에는 그가 파괴한 또 다른 기대가 있었습니다. 베이컨은 '모든 아름다움에는 어떤 기묘한 비례가 있다'고 말하며, 영으로 태어난 사람들, 즉 자신과 같이 역동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그리스도는 그들이 '들리는 곳에서 불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바람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술가들에게 매혹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미스터리, 기이함, 파토스, 암시, 엑스터시, 사랑 등 삶의 모든 색채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경이로움의 기질에 호소하고 혼자서도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It is the imaginative quality of Christ’s own nature that makes him this palpitating centre of romance. The strange figures of poetic drama and ballad are made by the imagination of others, but out of his own imagination entirely did Jesus of Nazareth create himself. The cry of Isaiah had really no more to do with his coming than the song of the nightingale has to do with the rising of the moon—no more, though perhaps no less. He was the denial as well as the affirmation of prophecy. For every expectation that he fulfilled there was another that he destroyed. ‘In all beauty,’ says Bacon, ‘there is some strangeness of proportion,’ and of those who are born of the spirit—of those, that is to say, who like himself are dynamic forces—Christ says that they are like the wind that ‘bloweth where it listeth, and no man can tell whence it cometh and whither it goeth.’ That is why he is so fascinating to artists. He has all the color elements of life: mystery, strangeness, pathos, suggestion, ecstasy, love. He appeals to the temper of wonder, and creates that mood in which alone he can be understood.

설명:  

이 발췌문은 상상력의 상징으로서 그리스도의 독특한 본성을 조명하여 그를 로맨틱한 매력의 중심 인물로 제시합니다. 외부 서사에 의해 형성된 다른 신화적 인물과 달리, 그리스도는 자신의 존재의 저자, 즉 자신의 삶과 가르침이 예언적 기대를 초월하고 변형시킨 스스로 창조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저자는 그리스도가 삶의 모든 감정적 경험을 포괄하는 예술적 영감의 무형적 본질을 구현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대와 놀라움을 결합하는 이러한 능력은 아름다움의 내재적 기이함에 대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관찰과 일치하며, 그리스도를 예술가와 철학자 모두에게 예측할 수 없고 끊임없이 역동적인 창조의 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합니다.  

비유와 사례:  

여기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본질은 잘 가꾸어진 정원에 비해 예측할 수 없는 야생의 풍경이 주는 아름다움과 비슷합니다. 광야는 인간의 기대를 따르지 않고 숨막히면서도 길들여지지 않았으며, 내재된 예측 불가능성과 원시적인 화려함에서 비롯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예언을 성취하는 동시에 도전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방식에 대한 거울입니다. 예술의 세계에서 잭슨 폴록과 같은 추상화가를 예로 들면, 캔버스 위에 물감을 자유롭게 떨어뜨리는 그의 기법은 예측 불가능성과 표현력이 돋보이는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역동적인 인물로 표현되고 신비와 숙달의 조화를 통해 시선을 사로잡는 방식과 완벽한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가, 즉 그리스도의 영향력은 아름다움이나 신성에 대한 선입견을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 창조적 힘을 통해 그것에 도전하고 확장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본성은 관상을 유도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경직된 기대를 버리고 진정한 예술성과 영적 깊이를 정의하는 유동적이고 불가사의한 힘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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